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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115화 (115/145)

115화

“몸이 좋지 않다지?”

에드먼은 두서없는 그 문장이 다프네에 관한 것임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황제가 있었다.

웬일로 조금은 뚜렷한 눈을 하고 사람 몰골을 한 황제가 와인 잔을 든 채 에드먼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시체 썩은 내는 쉽사리 그의 코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예.”

에드먼은 굳이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무례할 정도로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것을 에드먼도 황제도 알지만, 황제는 딱히 지적하거나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심드렁한 표정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저런, 짐이 신관이라도….”

황제는 말을 이어 가다가 말고 에드먼과 눈이 마주치자 무언가 번뜩 생각난 듯 눈을 흐릿하게 떴다.

“아아, 윈터 공작가는 황제가 내린 신관이나 의원을 거절할 권리가 있지. 짐이 부족하여 그것을 잊었군.”

대놓고 에드먼을 향한 비아냥이 가득했다.

“아닙니다. 폐하께서 보내 주실 신관이나 의원만큼 대단한 이들은 없으나 그리 심한 병도 아닌지라 차차 회복하고 있습니다.”

“흠.”

황제는 물 흐르듯 나오는 에드먼의 대답이 탐탁지 않은지 눈가를 좁혔다. 그러나 에드먼의 태도와 말은 흠 잡을 곳이 없었기에 그저 못마땅한 기색으로 흘끔거릴 뿐이었다.

황제가 와인 잔에 입을 대며 고개를 조금 들자 들어오는 순간부터 에드먼의 약점을 잡기 위해 달라붙던 끈적한 시선이 사라졌다. 에드먼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황제를 훑었다.

황제의 풍채는 언뜻 보면 예전과 비슷했다. 그러나 꼼꼼한 눈초리를 가진 이라면 그것이 옷을 덧대어 입은 것이라는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옷이 두꺼워져 구별이 잘되지 않았지만, 움직일 때마다 잠깐잠깐 드러나는 가느다란 손목이나 시체처럼 딱딱하고 마른 손가락이 그 증거였다. 창백한 피부는 물론 눈우물은 깊게 패어 병자의 모습처럼 보였다.

더군다나 황제는 마치 음식을 못 먹는 이처럼 와인만 들이켜고 있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신가 봅니다.”

“아… 통 입맛이 없군.”

에드먼은 황제의 말을 믿지 않았다. 입맛이 없다는 사람이 배고픔에 굶주린 것처럼 홀로 와인을 세 병이나 마시진 않을 것이다.

뇌를 거치지 않아도 문제없는 말을 내뱉는 대화가 이어졌다.

황제는 뜬금없이 에드먼을 자극하려 했고 이것에 익숙한지라 자연스러운 대꾸가 나가는 것이기도 했으나 그는 현재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었다.

‘지금쯤 어디일까.’

크리스와 유진의 체력이라면 중간중간 말만 교체해도 쉬지 않고 단숨에 남부로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다프네를 생각하면 멀쩡하다가도 목이 탔다. 물이나 술을 마셔도 목에 꽉 막힌 것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에드먼은 텁텁한 입 안에 음식을 밀어 넣을 뿐이었다.

에드먼은 치솟는 다프네의 생각을 애써 저편에 묻어 버렸다.

문이 부드럽게 열리는 것은 그때였다.

“폐하.”

애교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마린다는 마치 에드먼이 있는 줄 몰랐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머, 두 분이 식사 중이셨군요.”

“마린다!”

황제는 마치 주인을 마냥 개처럼 보이지 않는 꼬리를 붕붕 흔들며 마린다에게 달려들었다.

마린다는 웃음을 흘리며 황제와의 자리로 돌아갔다.

“윈터 공작님과 식사 중이신지 몰랐어요. 그럼 방해하지 않고 오지 않는 것인데요.”

“방해라니. 그냥 여기 있도록 해라.”

황제가 슬쩍 에드먼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원하는지 뻔히 보이는 태도에 에드먼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계시지요, 황비 전하.”

마린다는 기다렸다는 듯이 시종을 불러 와인 잔을 받았다.

“폐하, 약 시간을 까먹으셨어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황제는 말을 흐리며 마린다의 허리를 부둥켰던 손을 내렸다. 누가 보아도 약을 꺼리는 모습이었다.

“폐하, 안 드시면 제가 정말 슬플 것이에요…. 흑.”

마린다가 말도 안 되는 연기로 눈물을 쥐어짜자 황제는 다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가 내민 약을 꿀꺽 삼켰다.

마린다는 그런 그를 칭찬했고 황제는 미간을 좁히며 와인을 두 잔이나 연달아 마셨다.

머지않아 황제의 눈의 초점이 흐릿해지는 것과 함께 마린다의 태도가 변했다. 에드먼을 흘끔거리기만 할 땐 언제고 아예 대놓고 그를 핥아 올릴 듯 노골적인 시선을 던졌다.

“이렇게밖에 얼굴을 못 보네요.”

…하.

에드먼은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이 자리가 마린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어쩐지 황제는 용건을 말하지 않고 에드먼을 자극하기만 했다.

“인정할게요. 저번에는 내가 너무 성급했어요.”

“황비 전하.”

“하지만 에드먼, 내게도 기회를 주셔야 공평한 거잖아요.”

“…….”

“마님, 아니 그 여자와… 황녀님처럼 말이에요.”

에드먼의 얼굴이 얼핏 굳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표정이네요. 나도 그 정도 능력은 돼요, 에드먼. 그러니까.”

“…….”

“내게도 기회를 줘요. 날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에요?”

마린다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물론 약에 취한 듯 몽롱한 몰골이지만 버젓이 황제 앞에서 마치 황제가 없는 듯 대담하게 행동했다. 혹은 그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실제로 황제는 눈을 깜빡이며 마린다의 말을 모두 듣고 있음에도 무기력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아, 신경 쓰지 말아요.”

마린다는 에드먼이 황제를 보고 있자 손을 내저었다.

“그래서 내 제안에 대답을 해 줘요.”

“먼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에드먼, 예전부터 하고 싶은 말인데 왜 내게 높임말을 써요? 내가 황비가 되어서 그래요? 우리 둘밖에 없는데 그냥 예전처럼 편하게 하대를….”

“난 그대에게 내 이름을 허락한 적 없는데.”

“…에드먼, 왜 그래요. 내가 당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해요? 네? 그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어요.”

“도대체 혼자 무슨 망상에 빠진 건지….”

에드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늘한 시선에 마린다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가 돌아서려고 하자 마린다는 다급히 붙잡았다.

“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다 알고 있어요! 난 황비예요! 현재 가장 고귀한 여인이라고요. 날 포섭하면 분명 당신에게….”

“황태자가 말한 계획에서 네가 살아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때 막지 않은 거예요? 날… 날 죽이는 거에 동의했다는 거예요?”

에드먼은 대답의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돌아섰다.

마린다는 매정한 에드먼의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꽉 쥔 채 새하얗게 질린 손이 보였다.

마린다는 에드먼을 꼭 끌어안았고 갑작스러운 무게에 에드먼이 주춤거렸다.

“그, 그냥 지금처럼 나를, 꺄악!”

가만히 있던 에드먼은 마린다를 그대로 떨쳐 냈다. 마린다는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에드먼이 뒤돌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나가면 날 강간하려 했다고 할 거야.”

걸음이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공작이라도 황비를 강간하려 했으니 벌을 피해 갈 수 없을걸!”

일정한 속도, 일정한 보폭. 에드먼은 여전히 앞으로 걸어갔다.

“…다프네.”

걸음이 멈추었다.

고개를 돌린 에드먼과 눈이 마주친 마린다는 저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함부로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마라.”

쾅.

문이 닫혔다.

에드먼의 흔적은 이미 사라졌다. 문 너머로 점점 사라지는 걸음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마린다는 옆에 있던 황제를 발로 찼다. 그대로 넘어진 황제는 옷을 워낙 껴입은 탓에 낑낑거리며 일어나지도 못했다. 마린다는 멈추지 않고 발길질했다.

“너 때문이야! 네가 다 망친 거라고!”

이 자리를 만들기 위해 시중들을 포섭하고 황제의 비위를 얼마나 맞췄는데.

분명 내가 오기 전에 황제가 무례를 저지른 게 틀림없어. 그래야 해. 그래야 한다고….

‘도움도 안 되는 늙은이 같으니라고.’

마린다는 제게 도움을 요청하는 황제를 보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너만 없으면.”

마린다는홀린 듯 손을 뻗어 품 안을 더듬어 알약을 꺼냈다.

황제가 방금 먹은 이 약은 환각제다. 황제를 이렇게 만드는 데한몫을 한것인 동시에 독이 될 수도 있다.

아직 완전하지 못한 약품이기 때문에 두 알 이상 한꺼번에 먹으면 뇌에 무리가 가 영원히 식물인간으로 살아가게 된다.

황태자는반역에 실패하면죽을 테고, 황녀는 어디 먼 나라로 시집을 보내면 된다. 그러면 남은 유일한 황족은… 바로 황비, 자신이었다.

‘그리고….’

마린다는코르셋으로 잔뜩 조인 자신의 배를 쳐다보았다. 어떻게든떼려고갖은 노력을 해도 거머리처럼 붙어 있던 배 속 생명의 쓸모가 떠올렸다.

“…난 황제의 어머니가 되는 거야.”

마린다는알약을 꺼내 그대로 황제의 입 안에쑤셔 넣고와인을병째로 입에 꽂았다.

“커헙,크흑.”

황제는 숨을 헐떡이며 꿀꺽, 삼켰다. 그러더니캑캑거리며목을 붙잡았다. 입에는 게거품이 무성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린다는떨리는손으로 뒤로물러났다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거기, 거기 누구 없느냐!윈터공작이…윈터공작이 폐하를…!”

마린다의외침에 밖에서 대기 중이던 기사들이 들어왔다. 마린다는덜덜 떨리는 손으로 정신을 잃은 황제를 가리켰다.

“폐하!”

“당장 의원을 불러와!”

혼란속에서마린다는아무도 모르게 짙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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