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다프네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리를 휘감은 굵은 팔뚝을 치울 힘조차 없었다.
“목마릅니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몸을 적당히 묵직하게 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지고 컵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잠시 뒤통수가 움켜쥐며 입술이 닿았다.
다프네는 반사적으로 에드먼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단단한 가슴팍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에드먼이 입으로 넘겨 주는 물을 전부 마셨다. 그 후로도 몇 번 입을 더 맞춘 에드먼이 놓아주자 몸이 힘없이 침대로 흘러내렸다.
그제야 타는 듯한 갈증에서 벗어난 다프네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에드먼의 손가락이 젖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뗐다. 가슴이 가려워지는 행위여서 고개를 옆으로 치웠으나 손이 또다시 따라왔다.
관계를 가진 후 에드먼은 단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다. 마치 우리가 다정한 연인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왜 이러는 거예요?”
잔뜩 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생각보다 더 볼품없는 목소리였기에 다프네는 당황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에드먼은 대답 없이 다프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익숙했다.
바로 직전, 관계를 가질 때 에드먼이 하던 눈빛이었기에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대충 두른 이불 사이에 숨은 흰 속살이 더 드러났다.
피하기 위함이었지만 그를 더 자극했다는 걸 다프네는 꿈에도 모른 채 그저 지나가길 기다리며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나 옆으로 푹 꺼진 이불은 좀처럼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고 옷을 입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프네가 하는 일은 없었다. 오늘도 그저 창문 너머만 멍하니 보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모를 에드먼이 갑자기 입을 맞췄다.
에드먼이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당황하며 그가 이끄는 대로 속절없이 흔들렸다.
허락을 구하는 듯이 새가 쪼는 것처럼 쪽쪽거리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괴롭혔다. 그 소리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인 끄덕임이었기에 다급히 번복하려 했으나 옷이 아래로 끌어내려지는 게 더 빨랐다.
숨이 턱턱 막힐 만큼 파도처럼 휘몰아치던 것이 멈추고 관계가 끝난 후에야 그가 왜 이러는 것인지 생각했다.
거사를 일주일 남기고 불안하기라도 한 걸까, 그답지 않게 조급하긴 했다.
“…무슨 일 있어요?”
그가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묻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제대로 된 답변이 아니었다.
애당초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학습력 없는 가슴이 욱신거렸다. 이제는 익숙한 고통이었다.
“이 일이 끝나면 나는 어떻게 되나요?”
“…무슨 말입니까.”
“나도 알아요. 들었고요.”
며칠 전 우연히 들은 이야기였다.
윈터가로 회의를 하러 온 이들이 에드먼 오기 전 궐련을 피우면서 하는 말들을.
거리가 멀어 정확히 듣지 못했으나 주워들은 단어로 충분히 조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윈터 공작 부인, 세르기 블레드, 처벌.
다프네도 이것에 대해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세르기 블레드이고, 자신은 다프네 윈터이기 전에 다프네 블레드였다. 그럼 세르기 블레드를 죽인 후에 나는 어떻게 될까?
순수한 궁금증이 들었다.
“날 어떻게 할 거예요?”
뒤를 돌자 눈이 마주쳤다.
다프네는 덤덤하게 물었다.
“죽일 건가요?”
에드먼의 표정이 험악해지자 바로 이어 말했다.
“아니면 이용할 건가요?”
저번처럼.
굳이 뒷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했기에 에드먼의 미간이 좁혀졌다.
“다프네, 그건….”
“됐어요. 그 일에 대한 변명을 듣고 싶어서 물은 게 아니에요.”
에드먼의 입이 꾹 다물렸다.
“다프네.”
그의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맞췄다.
익숙하게 혀가 파고들면서 침과 함께 무언가 꿀꺽, 하고 목을 넘어갔다. 이상함에 목을 더듬자 에드먼은 그새를 기다려 주지 않고 다시 밀어붙였다.
설마 또?
불안감에 눈을 굴리고 있는데 다행히도 에드먼이 입술을 뗐다.
안도와 함께 갑작스러운 졸음이 밀려왔다. 아니, 갑작스럽진 않았다.
지금은 어느덧 깊은 새벽을 넘어 동이 트기 전이었고 몇 시간 동안 혹사당한 몸은 피곤함에 푹 젖어 있었으니 졸린 게 맞았다.
관계 도중 몇 번이나 기절할 고비를 넘겼는지 모른다.
꿈뻑. 꿈뻑.
무거운 눈꺼풀이 움직이는 대로 눈을 깜빡이던 때였다.
“…어떤 동물을 키우고 싶습니까?”
난데없는 질문에 다프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뭐라고요?”
“작은 정원이 딸린 이층집에는 아무래도 반려동물이 있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뭐라는 거지?
다프네의 미간이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에드먼이 덧붙였다.
“그냥, 그렇다는 가정하에 말입니다.”
…작은 정원이 딸린 이층집. 다프네는 조금 멍한 얼굴로 에드먼이 한 말을 중얼거렸다.
졸려서 그런지 에드먼의 뜬금없는 말에도 상상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중형견이나 대형견 사이가 좋을 것 같다. 예전에 지나가면서 갈색 대형견을 본 적 있다. 축 처진 귀에 순해 보이는 인상. 그런 반려동물이 좋겠다.
하지만 다프네는 그것을 입 밖으로 뱉어 내지 않았다.
“…키우고 싶지 않아요. 동물은 사람보다 일찍 죽어요. 나는 그런 슬픔 겪고 싶지 않아요.”
사랑하는 것을 잃는 경험은 질리도록 했다. 상상 속에서도 더는 잃고 싶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참고하겠습니다.”
무슨 참고?
묻고 싶었으나 졸음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밀려왔다.
몸이 저절로 기분 좋게 나른해졌으나 이상하게 불안감이 치솟았다.
“에드… 먼….”
힘겹게 그를 부르자 머리카락을 넘기는 조심스러운 손길이 스쳤다.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겁니다.”
아니야.
“쉬이. 눈 감아요.”
아니야, 아니야… 이건 아니야.
“다 잊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흐릿해지는 시야와 함께 물에 잠긴 것처럼 귀가 먹먹해지면서 에드먼의 목소리가 흐려졌다.
“…쉬세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프네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규칙적인 숨소리. 흔들림 없는 눈. 다프네는 그가 입으로 건넨 약을 먹고 잠들었다.
에드먼은 다프네에게 옷을 입히고 한참 안고 있기를 얼마.
똑똑.
“각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에드먼은 다프네를 들어 올렸다.
요한을 지나쳐 아래로 내려가자 마차 두 대가 서 있었다.
아무런 인장도 없는 단출한 마차 앞을 초조하게 서성이던 뉴벨 남작 부인이 다프네를 안고 오는 에드먼을 보다가 몸을 틀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에드먼은 마차 안에 다프네를 내려놓았다.
한 번 보면 도무지 보낼 수 없을 것 같아 곧바로 마차를 나왔다.
“수면제를 먹였고 몸이 피곤하니 적어도 반나절은 깨어나지 않을 거다. 그땐 도착한 후겠지. 일어나기 전에 이걸 먹이면 된다.”
에드먼은 갈색 물약이 담긴 작은 병을 뉴벨 남작 부인에게 넘겼다.
“각하….”
“후유증이 남을 거다. 거의 30년의 기억을 지우는 거니까 힘들지도 몰라.”
“옆에서 열심히 모시겠습니다.”
뉴벨 남작 부인은 머뭇거렸다.
“남기실 말씀이라도….”
“절대 다프네가 진실을 알아서는 안 된다. 죽는 순간까지 다프네는 아무것도 몰라야 해.”
“…예.”
“…만약 나에 대해 물어보거든 있는 그대로 말해.”
“…….”
“부인에겐 무관심했고 아무런 도움도 안 주던 쓸모없는 남편이었다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뉴벨 남작 부인은 마차 안에 올라탔고 로브를 쓴 알렉과 유진이 다가왔다.
“다녀오겠습니다, 각하.”
그들이 마부석에 앉자 마차가 출발했다.
“…잠깐!”
에드먼의 외침에 마차가 섰다. 그는 다급히 마차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잠든 다프네를 보다가, 손등에 입술을 댔고 귓가에 속삭였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으나 에드먼에게는 눈 한번 깜빡이는 찰나와도 같았다.
“…가.”
에드먼은 어느새 마차를 나와 말했다.
느리던 마차 바퀴에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마차는 점점 작은 점이 되었다가, 사라졌다.
“각하.”
한참이 지나도 요지부동인 에드먼에게 요한이 다가왔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 가야지.”
가야지, 가야 하는데.
에드먼은 마차가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다프네가 있던 품이 휑했다. 분명 춥지 않은데 어깨가 떨릴 만큼 한기가 돌았다.
에드먼은 텅 빈 자신의 품을 내려다보다가 몸을 틀었다. 그리고 윈터가의 인장이 박힌 마차에 오르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프네를 태운 마차와는 반대 반향이었다.
둘은 그렇게 서서히 그리고 빠르게 멀어졌다.
점점… 점점 더 멀리.
에드먼은 벌써 다프네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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