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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113화 (113/145)

113화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사이 칼리토는 남부에서 완전히 올라왔고 식사도 제대로 못 할 만큼 바쁜 나날이었다.

제국은 여전히 조용했다. 매일 밤 연회가 열리지만,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에드먼은 작은 인기척에 굳게 닫혀 있던 눈을 떴다.

두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었으나 잠을 자기 위함은 아니었다. 어차피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지 않으니 단순히 ‘눈을 붙이는’ 행위에 지나치지 않았다.

“제가 깨운 겁니까.”

“아니. 일어날 생각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벤자민은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되는 차를 든 상태였다.

“…정말 며칠 남지 않았군요.”

일주일.

어느덧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이 일이 실패하면 그대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도망이라도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글쎄.”

에드먼은 벤자민이 따른 찻잔을 들어 올렸다.

“벌하지 않겠다는 거야.”

떠나도 상관없다는 말에 벤자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미묘한 표정으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배려에 감사합니다만 저는 죽는 순간까지 윈터가의 집사이고 싶습니다. 한평생 그리 살아왔으니까요.”

에드먼은 벤자민의 얼굴을 훑었다. 그의 표정은 결단코 거짓된 것이 아니었다.

벤자민은 습관처럼 자신의 말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에드먼의 모습에 가슴이 쩌릿했다.

“6일 후, 저택은 불탈 거다.”

“…예.”

벤자민은 요한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 저택이 불탈 것이라는 말과 함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서류로 향하던 시선이 벤자민에게 돌아갔다.

벤자민은 허공에 고개를 들어 저택을 응시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낡은 부분이 있긴 하지만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그의 눈에는 낡은 부분까지 완벽했다.

이 저택을 처음 본 순간부터 벤자민은 풋사랑에 빠진 청년처럼 저택에서 떠날 수 없었다.

“제가 저택을 불태우고 싶습니다.”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적어도 다른 이의 손보단 직접 보내 주고 싶은 욕심이었다.

벤자민은 감사 인사와 함께 허리를 숙였다.

“아직 이른 아침입니다. 주무시고 계셨던 것 같은데 좀 더 쉬시는 게 어떠신지요.”

“됐다. 어차피 잠은 오지도 않아.”

“아직도 잘 못 주무십니까?”

에드먼은 오러 각성을 한 즈음부터 불면증에 시달렸다.

독한 수면제도 효과는 일시적일 뿐, 에드먼은 깊게 잠들어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부상이 심해 과다 출혈로 기절했을 때가 가장 깊게 잠들었던 것 같다.

“각하!”

조급한 목소리와 함께 요한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요한은 늘 침착함을 유지하는 편이었기에 다급한 모습이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게다가 거사까지 며칠 남지 않았기에 더욱이 그랬다.

“무슨 일이냐.”

요한은 창백한 얼굴로 드문드문 말을 이어 갔다.

“황, 황제의 명입니다.”

에드먼의 얼굴이 굳었다.

그는 요한이 가져온 편지를 낚아채듯 가져가 열었다.

“황제의 명이라니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갑자기 내려온 것입니다. 황궁에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고요. 블레드 후작도 조용합니다.”

벤자민의 물음에 요한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도대체….”

벤자민의 주름에 깊은 근심이 자리했다.

“각하, 무슨 내용입니까?”

벤자민은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에드먼을 재촉했다.

에드먼은 편지를 느리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식사를 하자는군. 다프네와 함께.”

“함정일 확률이 높습니다.”

요한의 말은 타당했다. 거사가 고작 일주일 남은 시점에서 몇 주 동안 건드리지도 않던 에드먼과 식사라니. 그것도 다프네와 함께.

“일단 거절하고 계획을 앞당기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무리하는 일이긴 해도 황태자 전하께서 각하를 포기하시진 않으니까요.”

“그래도 너무 위험합니다. 일주일 뒤에도 성공 가능성이 낮은데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하면….”

벤자민과 요한은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다.

에드먼은 그저 편지를 가만히 응시한 채 테이블을 툭, 툭 두들기고만 있었다.

“간다.”

“각하, 하지만….”

“나 혼자 가는 것이다.”

“예?”

에드먼은 고개를 들었다.

“다프네는 어제부터 고열에 시달리고 있는 거다. 정신을 차리지도 못할 만큼 몸이 아파서, 그래서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다.”

“각하.”

“요한, 준비가 다 되었다고 했지.”

“예? 아, 예.”

벤자민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에드먼은 요한을 향해 말했다.

“그 계획을 내일로 앞당겨야겠다.”

요한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에드먼은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저택이 불탔고 남작 부인과 다프네는 미처 불길을 피우지 못해 저택을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다.”

“…….”

“그대로 이행하도록.”

“…예.”

요한이 방을 나갔다.

“…각하.”

벤자민은 잠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마님께는 여쭤 보셨습니까?”

바쁘게 서류를 정리하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물어볼 이유가 없다.”

“각하.”

“누가 보아도 다프네는 내 선택에 만족할 거야.”

에드먼은 벤자민의 말머리를 잘랐다.

“벤자민, 다프네가 행복해 보이는가.”

“…….”

“그래, 답을 못하겠지. 다프네는 행복하지 않아.”

내 옆에서는.

에드먼은 씁슬한 뒷말을 삼켰다.

“내 마지막 사죄이자 사과다. 지난 5년 동안… 다프네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으니 내 곁을 떠나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어.”

“…….”

“다프네의 기억 속에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 오히려 증오하는 상대면 모를까.”

에드먼은 입꼬리를 비틀어 조소했다.

“기억을 아예 못하는 게 낫다. 모두 잊는 게 나아.”

그래야 하고, 실제로 그러하다.

에드먼은 중얼거렸다.

“그러니 벤자민, 더는 내 말에 토 달지 마.”

“…죄송합니다.”

“나가 봐.”

벤자민이 마저 나가서 집무실은 다시 고요함으로 그득 차올랐다.

에드먼은 습관처럼 품을 더듬었다. 궐련 통이 아니라 까슬거리는 종이 재질이 그의 손끝을 스쳤다. 에드먼은 그것을 꽉 움켜잡지도 못한 채 손을 잘게 떨었다.

그리고 자리에 일어나 다프네의 방으로 향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다프네가 보였다. 창가에 기댄 채 가만히 저 먼 곳을 응시하는 다프네가.

워낙 존재감이 큰지라, 문틈 사이에 있어도 뉴벨 남작 부인이 에드먼을 발견했다.

에드먼은 다급히 검지를 들어 ‘쉿’ 했다.

뉴벨 남작 부인은 엉겁결에 입을 다문 후 다프네와 에드먼을 번갈아 보다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님, 그럼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언제든 부르세요.”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그래, 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프네는 날개뼈 아래에서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러운 것인지 한쪽으로 끌어모아 놨다.

곧바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한 움큼 정도 흘러내려 등에서 흐트러졌다. 조금 드러난 흰 등을 덮는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내리쬐는 햇볕 아래 속눈썹이 깜빡거렸다.

색소가 옅은 속눈썹 너머로 이제 막 지기 시작하는 해가 그대로 투영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녹색 눈동자는 초점이 없었다. 그저 저기 먼 곳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기도 하고, 지나가는 이름 모를 새를 보기도 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기도 하고.

에드먼은 천천히 다프네를 더듬었다.

저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안에서 어떻게 흐트러지는지. 녹색 눈을 한 번 보면 얼마나 시선을 떼기 어려운지. 도톰한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숨이 얼만큼 달콤한지. 늘 정돈된 자그마한 손톱이 쾌락이 못 이겨 팔뚝과 등에 박아 올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눈만 감으면 실체처럼 눈앞에서 펼쳐졌다.

에드먼은 눈을 깜빡이지 않기 위해 무던한 애를 써야 했다.

기억은 달고 현실은 썼으나 그는 조금이라도 현실의 다프네를 담기 위해 노력했다.

그대의 이런 작은 기억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옅은 미소, 작은 웃음소리. 나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 욕심이 난다.

그 미소와 웃음소리가 내게로 향한다면.

나는 정말 그대를 평생 보지 않고 기억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에드먼은 저도 모르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프네는 뒤늦게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았다. 몇 주 동안 모습을 보지 못했던 에드먼의 모습에 눈을 깜빡였다.

다프네의 얼굴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조금 멍했다.

“에드먼?”

가느다란 목소리가 저를 불렀다.

에드먼은 몇 번이곤 눈으로 훑었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또르륵, 다프네의 눈이 그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지금 뭐 하는….”

에드먼은 고개를 틀어 입을 맞추었다. 말캉한 감촉에 몸이 찌르르, 울렸다. 다프네가 무어라 더 말했으나 모두 에드먼의 입 안에 삼켜 들어갔다.

풀썩.

몸이 쓰러졌다.

에드먼은 귓가에 간절히 허락을 요청했다.

드러난 어깨와 쇄골, 목, 귀에 자잘한 입맞춤을 하며 받아 줄 때까지.

그 대답으로 어깨와 가슴팍을 때리던 주먹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그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에드먼은 모조리 삼켜 버릴 것처럼 정신없이 입술을 눌렸다.

마지막 밤은 그의 상상 이상으로 달콤하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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