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욕하고, 미워하고, 소리 지르는 것이 그에겐 그저 다디단 단비에 불과하다.
에드먼은 주먹을 느리게 쥐었다가 폈다.
“…….”
숨을 느리게 들이켜던 그는 이내 자리를 떴다.
***
탁.
창문을 닫은 데미안이 옅은 한숨을 내뱉을 때였다.
“안에 있니?”
예고 없이 문이 열렸다.
바네사는 창문 앞에 서 있는 데미안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어머니, 무슨 일이십니까.”
“너야말로 어딜 다녀왔니?”
그 말에 데미안은 아, 하곤 창문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 중에 블레드 후작이 보낸 이들이 있어 잠시 나가 처리를 하고 왔습니다.”
데미안의 말에 확신을 못 박듯 옅은 혈 향이 느껴졌다.
바네사는 코를 스치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데미안은 꿈쩍도 하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다가온 바네사는 데미안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코를 킁킁거렸다.
“정말이네?”
싱긋, 미소를 지은 바네사가 이어 말했다.
“오늘은 나뭇잎이 없구나.”
바네사의 시선이 데미안의 텅 빈 어깨를 훑었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렇단다.”
바네사는 미소를 머금은 채 언제 가까이 다가갔냐는 듯 뒤로 물러났다.
“아, 내게 무슨 일이 있어서 왔냐고 물었지?”
“…예.”
“음, 따라와.”
바네사는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을 나왔다.
흘끔, 데미안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본 바네사의 콧노래가 더 커졌다. 마치 즐거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콧노래는 점점 더 빠르고 커졌다.
데미안의 미간이 인정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분명 바네사의 목소리는 가늘고 고운 편에 속한다. 그러나 데미안에게는 쇳소리만큼이나 섬뜩하고 소름이 돋았다.
“아.”
바네사는 갑자기 걸음을 멈춘 후 뒤를 돌았다. 데미안의 일그러진 얼굴은 관심조차 없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원하는 걸 찾았니?”
“무슨 말씀이신지….”
뒤늦게 얼굴을 푼 데미안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눈을 내리깐 채 반문했다.
“조사하는 거 말이야. 뭐 좀 찾았어?”
바네사가 하고자 하는 말을 그제야 알아챈 데미안의 눈이 얼핏 굳었다.
“어미가 된 도리로 아들의 궁금증을 응당 풀어 줘야지.”
바네사는 굳은 데미안을 보며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 몸을 틀어 지하실의 문을 열었다.
“자, 네가 그렇게 찾던 문제의 답이 저기 있단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지하실. 그 안에 옅게 흘러나오는 두려움에 찬 신음 소리.
데미안은 바네사의 존재를 잊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무거운 철문이 힘겨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바네사의 미소가 짙어졌다.
***
“블레드 후작이 맞습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블레드 후작이 왜 소공작님을….”
이상한 점은 자객의 실력이었다. 결단코 데미안이나 에드먼에게 견줄 만하지 않았다. 그냥 적당히 실력 있는 이들에 불과했다.
죽이려고 보낸 게 아니란 소리였다.
“…그 작자의 생각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머리통을 뜯어봐도 모르겠지.”
에드먼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긴 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황실을 장악하려는 것인지.
세르기는 단순히 권력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한다. 알았다면 지금 이러고 있지 않았을 테니.
“블레드 후작은 아마 데미안에게 접근한 것도 다 예상했을 것이다.”
에드먼이 세르기를 예상했듯이, 세르기도 에드먼을 예상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예상하고 행동했다는 겁니까?”
에드먼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은 소름이 오소소 돋은 뒷목을 문지르며 옅은 숨을 내쉬었다.
알렉의 눈에는 그저 둘 다 괴물같이 보일 뿐이었다.
“만만치 않겠습니다….”
요한은 낮게 신음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거사가 코앞에 다가오면서 에드먼만큼이나 바쁜 이가 있다면 단연 요한이었다. 요한의 피부는 푸석했고 눈 아래는 거뭇거뭇해진 지 오래였다.
에드먼은 문득 데미안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지금 하시려는 일, 그만두세요.”
“큰 피해를 입으실 겁니다. 애당초 성공 가능성도 낮은 일입니다.”
“데미안이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다.”
“예?”
“소공작님께서 어떻게….”
알렉과 요한은 당황했다.
“내게 그만두라더군. 블레드 후작이 꾸미는 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아는 것 같고….”
“…그럼 혹시 소공작님께서….”
요한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가설을 꾸깃하게 접었다. 소공작님이 블레드 후작에게 붙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오늘 회의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왔지?”
에드먼의 물음에 요한은 간신히 정신을 다잡았다. 오늘, 요한은 에드먼 대신 회의에 참석했다.
“…마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에드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블레드 후작과 손을 잡았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적잖게 나왔습니다. 황태자 전하와 백작님께서 쓸데없는 가설이라도 단정 지으셨지만… 마님의 평판이 좋지 않은지라 의심을 거두진 않았습니다.”
그들의 의심은 합당했다. 다프네는 윈터 공작 부인이지만 그 전에 블레드 영애였으니까.
“더군다나 마님은 블레드 후작이 아끼는 혈육이지 않느냐며 반말이 있었습니다.”
“‘아낀다’라….”
암살자를 아낌없이 보내는 것이 언제 ‘아낀다’고 포장이 가능해졌는지. 에드먼은 비릿한 조소를 삼켰다.
“이 일이 성공한 후에 마님의 처벌을 생각하자고 하더군요.”
“처벌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알렉이 울컥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이 블레드 후작과 같은 편도 아니고 처벌을 받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에드먼은 나직이 물었다.
“누가 그 말을 했지?”
“오렌트 백작입니다.”
오렌트, 오렌트….
에드먼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툭, 툭 두들기며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일이 끝나면 처리해.”
“네.”
요한은 미리 생각해 두었던 방법으로 오렌트 백작가를 무너트릴 계획을 세우며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알렉이 화가 채 식지 않은 채 씩씩거리며 나가고 에드먼은 요한을 붙잡았다. 요한은 문으로 향했던 몸을 돌렸다.
“내가 한 말, 잊지 않았겠지.”
며칠 전, 에드먼은 요한을 따로 불러 한 가지를 명했다.
“황태자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명을 이행해.”
거사가 치러지는 날이 되면 다프네는 떠날 것이다. 저 멀리 남부로.
수도와 북부에서는 아주 멀리 동떨어진 곳이다. 인구가 백 명도 넘지 않는 소박하고 작은 시골은 평화롭고 조용하다.
낮에는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며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밤에는 따스한 달빛이 보듬어 주고 이름 모를 풀벌레가 우는.
다프네가 갈 곳이다.
“다프네는 이제 죽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신분으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삶을 다시금 살아가는 거다.
모두 새롭게. 이전의 일은 전부, 모조리 잊고.
“뉴벨 남작 부인에게 말을 해 두었다.”
뉴벨 남작 부인을 설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님을 제가 속일 수 있을까요.”
“속여야 한다. 다프네를 위해서라도.”
“…그런데 왜 성공한 후에도 마님을 남부로 보내시는 건가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각하께서는 마님을….”
그 말에 무어라 대답했더라.
다프네는 자신의 곁에서 영원히 불행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뉴벨 남작 부인의 표정을 본 후에야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다만 뉴벨 남작 부인은 고개를 조아린 후 에드먼의 명을 받아들였다.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황궁이 혼란스러울 때를 노리면 된다. 다프네는 불타는 저택을 빠져나오지 못해 사망한 것이다.”
그것이 다프네의 사인이다.
다프네의 사망 신고를 하게 될 사람은 요한이다. 이건 에드먼이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었다.
요한은 왠지 모르게 잠기는 목소리로 이어 갔다.
“서류 처리는 이미 다 끝내 놓았습니다. 준비는 다 끝났으니 각하의 명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그럼 쉬십시오.”
문이 닫혔다.
에드먼은 품 안에서 궐련 통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한없이 가벼웠던 궐련 통 안이 가득 채워지면서 묵직한 무게로 변했다.
에드먼은 궐련 통을 손안에서 굴렸다.
성공 여부는 중요치 않다. 에드먼은 성공을 위해 황태자를 돕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을 위해. 다프네의 남은 생이 부디 편안하기를 바라며.
단지 그뿐이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욕심을 내는 것이다.
다프네가 자신을 담길. 그 경멸로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보길. 분노에 떨며 자신을 생각하길. 자신을 본 후 불쾌감을 느끼길.
잊혀질 감정이라면 좀 더 욕심내도 되지 않을까.
에드먼은 오늘도 불쑥 치솟는 욕심을 억누르고 눈을 감았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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