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나가셨습니다.”
다프네가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알렉이 다가와 말했다.
에드먼은 어느새 새까맣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유레이트와 대화를 할 때 밖에서 엿듣고 있는 이가 다프네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녀가 뉴벨 남작 부인에게 부탁해 로브를 얻어 새벽에 밖을 나갈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갈등하는 뉴벨 남작 부인에게 로브를 전하도록 지시한 것이었다.
에드먼은 본래 알렉을 포함한 검은 기사단 몇몇을 몰래 붙일 생각이었다. 오늘 유레이트가 사람들을 모아 회의를 한다고 했고 그곳에 참여해야 했다.
검은 기사단의 실력을 따라올 이는 드물다. 그 기사단을 만든 에드먼이 제일 잘 안다. 그런데….
“후.”
에드먼은 초조함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요한에게 전하라 해라. 오늘 회의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다고.”
에드먼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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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프네는 무작정 저택을 빠져나왔다.
수도는 축제 분위기인지라 시간이 늦었음에도 거리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워낙 큰 행사다 보니 해외 고위 귀족이나 왕족들 역시 제국으로 넘어와 축제를 즐기기도 했고, 그러니 로브를 꾹 눌러쓴 이들이 많았다.
다프네의 모습은 수상하거나 이상해 보이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이제 어쩌지?’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다프네는 눈을 멍하니 깜빡이다가 근처 술집에 들어가 제일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저녁때부터 시작한 것인지 이미 얼굴이 온통 새빨개진 이들이 왁자지껄하게 모여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다프네는 종업원을 불러 간단한 수프를 주문한 후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모인 테이블에 신경을 집중했다.
“요즈음 아주 나라가 말세야, 말세!”
“예끼, 이 사람아. 목소리 좀 낮추게.”
아무리 저들끼리 나라님 욕을 한다지만 그것을 들키지 않았을 때 하는 말이다.
이 술집에서 귀족이 있다면 저 남자는 불경죄로 잡혀 가도 충분했다. 하지만 술집은 지나가던 귀족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허름하고 낡은 집이었기에 남자의 목소리가 클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틀린 말 했나? 나라가 흉흉한 것은 사실이지 않나!”
테이블에 있는 이들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이번에 한드가 모시는 귀족 나리가 귀족 실종 사건 담당을 맡게 되었다면서.”
귀족 실종 사건?
다프네는 낮에 유레이트와 에드먼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같은 사건인 듯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건인지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한드의 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 그 귀족 나리가 뭐라 그랬지? 실종된 사람 찾는 게 어디 쉬운지 아냐며 뭐라 하지 않았는가! 하루에 우리 같은 사람들 수십이 사라져도 아무것도 안 하면서 고작 귀족 몇몇이 사라지자 조사하고… 이게 누구를 위한 나라인 것인지!”
그 후로도 고래고래 소리치던 사내는 술을 쭈욱, 들이켜더니 머지않아 그대로 테이블 위로 고개가 털썩 쓰러졌다.
다프네가 술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작한 남자의 술주정에 그 무리는 거의 파투 분위기였고 남은 이들이 주변을 정리하며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한 다프네는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다른 술집이라도 가야 하나 싶은 그때, 다프네가 기다리던 단어가 귀에 꽂혔다.
“노예 시장?”
다프네는 고개를 돌릴 뻔한 것을 겨우 억누르며 바로 뒤 테이블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이번에 거래를 트기로 한 이가 노예 시장에서 좀 직급이 있는 사람이더라고. 오늘 노예 시장에 오라고 하더구만.”
제 친구에게 자랑하기 위한 목적인지 거들먹거리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친구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이보게. 이곳에서 팔리는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 같은 이들이 납치당한 것이지 않나.”
그러자 남자는 당황하며 빠르게 대꾸했다.
“여긴 그냥 노예 시장이 아닐세. 납치가 없는 곳이야. 정말이야. 모두 다 사채를 써 갚지 못한 이들이야.”
친구가 한숨을 내쉬자 남자는 기분이 상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기 싫으면 오지 말게. 하지만 난 아량이 넓으니 그대에게 기회를 주겠어. 붉은 골목길 다섯 번째 문지기에게 붉은 꽂을 보러 왔다고 말하면 내게 안내해 줄 테니 한번 잘 생각해 보게.”
친구가 뭐라 하기도 전에 남자는 휙 돌아섰다.
다프네는 물을 들이켜며 긴장감에 버석하게 마른 목을 축였다.
장소는 물론 방법도 알게 되었다. 다프네는 긴장감에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남자가 떠나고 조금 시간을 둔 후 돈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술집을 나왔다.
‘붉은 골목길 다섯 번째 문지기. 붉은 골목길 다섯 번째 문지기.’
다프네는 혹여나 까먹을까 머릿속으로 몇 번이곤 다시 되새기며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멍청한 놈. 도움을 줘도 받아먹을 줄을 몰라!”
남자의 목소리에 다프네는 걸음을 멈추고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고개만 빼꼼 뻗었다.
술집에서 다프네에게 정보를 준 남자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비틀거리며 쓰레기통에 마구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다프네는 홀린 듯 남자의 뒤를 따랐다.
그러자 오래 지나지 않아 붉은 등불이 가득 달린 골목길이 나왔다. 붉은 골목길이었다. 다프네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붉은 골목길이 몸을 사고파는 유흥가란 것이었다.
다프네는 여자는 물론 남자도 헐벗은 상태로 손님을 찾는 모습에 화들짝 놀라 저도 모르게 남자를 놓치고 말았다.
뒤늦게 남자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다프네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유흥가 사람을 피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가 빠른 걸음으로 다섯 번째 가게로 향했다.
“붉, 붉은 꽃을 보러 왔는데.”
목소리를 일부러 잔뜩 내리깔았다.
문지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다프네를 위아래로 훑었다. 다프네는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지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흠, 들어가슈.”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겨우 삼킨 채 안으로 들어갔다.
긴 일자 복도 끝에는 형형색색의 불이 번쩍거리고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프네는 마른침을 삼키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마침내 그 끝에 도착한 다프네의 눈이 크게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어둠에 가려졌다.
다프네는 그 어둠이 다른 이의 손바닥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반항하지 않았다.
“숨 쉬세요.”
에드먼의 말에 다프네의 입에서 얄팍한 숨이 터져 나왔다.
다프네는 귓가에 울리는 에드먼의 말을 따라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는 것을 반복했다. 작은 어깨가 크게 들썩거렸다.
“소, 손 내려요. 볼 거예요.”
“다프네.”
“어서요.”
다프네의 단호한 대답에 에드먼은 결국 시야를 가린 손바닥을 내렸다.
무대에는 어느 소년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순간적으로 회색이라 생각했던 탁한 검은색 눈동자가 보였다.
데미안은 아니었다. 그러나 스치듯이 보면 데미안이라는 생각이 들 것 같은 머리색과 눈 색이었다.
“뒷말을 다 들으셨어야죠. 데미안은 노예 시장에 온 귀족의 호위를 맡았습니다.”
아.
다프네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뒤의 대화가 이런 줄 미처 몰랐다. 그것도 모르고 혼자서….
“…알고 있었어요?”
말을 하는 에드먼의 어투는 질책하지도 타박하지도 않는, 평소의 높낮이에서 변화가 거의 없었다.
에드먼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프네가 더듬더듬 물었다.
“근데 왜… 막지 않았어요?”
다프네는 이내 에드먼의 뒤를 보고는 깨달았다.
“…사람을 붙였군요.”
“그대가 이런 유흥가 골목길을 홀로 다녔음에도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았죠.”
누군가 골목길에서 홀로 다니는 다프네를 노리고 있었고, 술집에서는 음식을 주문해 놓고 전혀 먹지 않는 다프네를 이상하게 여겼다.
에드먼은 골목길 쓰레기장을 나뒹굴고 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만약 그들이 다프네에게 손을 댔다면… 상상만 해도 살기가 치솟았다.
“데미안은 이곳에 없습니다.”
“…그럼 됐어요.”
다프네는 수많은 이들과 무대 위를 훑는 것도 잠시 몸을 돌렸다.
밖을 나오자 사람들이 더 북적해졌다.
다프네는 애써 유흥가 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 걸었고 에드먼은 그 뒤에 바짝 다가갔다.
“조심.”
다프네의 뒤에서 휙 튀어나온 이와 어깨가 부딪칠 뻔했다. 에드먼은 재빨리 다프네의 손목을 잡아 제 품으로 잡아당겼다. 다프네는 머리가 에드먼의 가슴판에 닿았다.
놀란 다프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에드먼을 올려다보았다.
다프네는 후다닥 그 품을 벗어났고 에드먼은 손목을 놔주었다. 다프네는 마른침을 삼키며 애써 시선을 앞에 고정했다.
그런 다프네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붉은 등불이 가득한 골목길. 붉은 등불을 받아 반짝이는 허리춤의 검. 검은 손잡이 부분만 겨우 드러난 상태였다. 그러나 다프네는 눈을 뗄 수 없었다.
“…데미안?”
다프네가 데미안에게 선물한 검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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