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다프네가 있던 곳은 정원 입구였다. 한참을 온 것 같았으나 에드먼의 걸음으로 움직이니 얼마 가지 않아 정원을 나왔다.
알렉은 마차를 미리 입구 쪽에 가져다 놓았다.
에드먼이 조심스럽게 다프네를 마차 안에 올려놓고 따라 오르려던 때였다. 에드먼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나뒹구는 신발 한쪽을 발견했다. 다프네의 것이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에드먼은 마차의 문을 닫고 걸어갔다.
신발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가 다시 펴려던 때, 인기척을 느끼고는 우거진 나무들 사이를 가만히 응시했다. 에드먼은 좀 더 다가간 후 입을 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음에도 어느 나무의 가지가 조금 흔들렸다.
“혹, 우리와 접촉한 것을 들키면 안 되는 상황이냐.”
나뭇가지가 두 번 흔들렸다. 긍정의 뜻이었다.
에드먼은 다프네의 방에서 빠져나오던 그림자의 정체를 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아들인데, 모를 리 없었다.
“…다치거나 아픈 곳은?”
나뭇가지가 한 번 흔들렸다.
멀쩡하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직접 들으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데미안.”
“…데미안?”
에드먼의 말을 따라 하는 음성에 그는 몸을 돌렸다.
다프네는 갑자기 문을 닫고 마차로 들어오지 않는 에드먼이 의아해서 창문 너머로 시선을 주었다.
에드먼은 우거진 나무들을 바라본 채 서 있었다. 특정 나무 하나만 흔들리는 것을 본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마차에서 조심스럽게 나왔다.
다프네는 에드먼이 응시하던 나무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거, 거기 있니?”
나뭇가지는 잠잠했으나 다프네는 앞으로 내디뎠다.
“대체, 대체 어딜 갔던 거니. 왜 나오지 않고….”
그러나 다프네는 에드먼의 의해 막혔다.
“이거 놔요.”
“다프네, 진정하세요.”
“데미안!”
“어머니.”
다프네의 발버둥은 데미안의 목소리가 들리자 멈췄다.
다프네는 눈을 부릅뜨고 나무들을 훑었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데미안의 흔적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직 부족합니다. 어머니의… 전 아직 다 느끼지 못….”
“데, 데미안.”
바람이 불어왔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치자 데미안의 목소리가 묻혔다.
“곧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데미안의 마지막 말만이 뚜렷하게 들린 후, 기다렸다는 듯이 바람이 멈추었다.
“데미안!”
다프네는 계속 소리쳤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
“뉴벨 남작 부인을 보냈습니다.”
벤자민은 집무실을 들어오자마자 말했다.
“그리 심한 상처는 없었고 연고를 바르면 된다고 합니다.”
혹시 몰라 진찰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뉴벨 남작 부인에게 전해 듣고 왔다. 옳은 선택이었는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에드먼의 표정이 조금 느슨하게 풀렸다.
“…다프네가.”
에드먼은 멍하니 입을 열었다.
“데미안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를 모르겠다.”
“…….”
“친자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프네와 데미안의 사이가… 그리 좋았던 것도 아니고.”
그리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누가 봐도 둘 사이는 안 좋았다. 에드먼도 그것을 알고 있었고 보고, 들었다.
데미안을 찾아 소리치는 다프네의 모습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글쎄요.”
벤자민은 애매한 답변을 내놓았다.
어차피 그를 통해 정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 없었던 에드먼은 애당초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마님께 무슨 사정이 있으신 걸지 모르죠.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마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지 않잖습니까.”
끝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려는 에드먼을 일깨운 것은 벤자민의 부름이었다.
“비어 있습니다, 각하.”
벤자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린 에드먼은 어느새 자신이 텅 빈 궐련 통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언젠가부터 이게 습관이 되었다.
마지막 궐련을 피운 것은 깊은 새벽이었고, 에드먼은 다른 이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빈 통을 품 안에 쑤셔 넣었다. 그 후로 궐련을 피울 시간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바빠 완전히 잊고 말았다.
“새로 가져올까요?”
“…그래.”
에드먼은 빈 통을 마저 만지작거리다가 테이블 위로 내려놨다.
벤자민은 궐련을 가져오기 위해 나갔다.
“마님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지 않잖습니까.”
지금까지 다프네의 자신의 과거 따위를 말한 사람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귀를 기울이지 않은 걸지도.’
다프네가 끊임없이 말하려고 할 때, 그것을 외면하고 귀 닫은 걸지도 모른다. 에드먼은 분명 자신이 그러한 실수를 저질렀을 거라 확신했다.
에드먼은 무지했던 과거의 자신을 자책하며 주먹을 쥐었다가, 펴는 것을 반복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에드먼은 마른세수를 하며 뻑뻑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뭐든지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 그러나 그 짓은 에드먼이 가장 두려워하며 최후의 선택으로 보류한 것이다.
그는 다프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줄 자신 있었다. 눈앞에 사라져 주는 것을 빼면, 정말 뭐든지.
그러나 에드먼은 다프네에게 물었을 때, 다프네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선택할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다프네에게 물을 수 없었다.
다프네가 제게 무관심한 것보다 눈앞에서 사라져 주길 바라는 게 더… 무서웠다.
에드먼은 메마른 눈가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나뒹구는 빈 통을 바라보다가 품 안에서 꾸깃한 종이를 꺼냈다. 조그만 힘주면 찢어질세라 조심조심 종이를 펼친 에드먼은 그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에드먼은 문득 이런 제 모습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우스웠다.
찾아갈 용기도 없어 꾸깃한 종이 너머에 있는 얼굴만 한없이 바라보는 것이.
에드먼은 손을 들었다.
그러나 거친 종이에 닿기 직전, 손이 멈췄다.
이내 손가락이 움찔거리더니 안으로 곱아들었다. 에드먼은 다시 종이를 곱게 접어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눈을 내리깐 담백한 입맞춤은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독실한 신자의 모습을 연상시킬 만큼 짐짓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에드먼은 머지않아 입술을 떼고 품 안에 조심스레 넣었다.
이따금씩 꺼내 입을 맞추는 것.
에드먼은 이것으로 제 끝없는 욕심을 채웠다.
그에게는 이마저도 과분한 것임을 알기에, 에드먼은 만족해야만 했고 만족했다.
***
“데미안.”
탁. 창문을 닫은 데미안은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
바네사는 방 한 곳에 위치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그와 똑같은 회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불도 안 켜고 뭐 하시고 계셨습니까.”
데미안은 바네사의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방의 불을 켤 뿐이었다.
바네사는 그런 데미안의 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냥. 어딜 다녀오는 길이니?”
“바람을 좀 쐬고 왔습니다.”
“아하.”
바네사는 데미안의 외출복 차림을 훑었다.
“차라도 내오겠습니다.”
“아니, 됐다. 금방 갈 거라서. 얼굴이 보고 싶었단다.”
바네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미안을 지나치려고 할 즈음, 걸음을 멈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뭇잎이 묻었구나.”
팔랑.
어깨에 붙어 있던 나뭇잎이 카펫 위로 조용히 떨어졌다.
둘의 시선이 낙하하는 나뭇잎을 따라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툭툭.
바네사는 데미안의 어깨를 털어 주며 미소 지었다.
“황태자가 살아 있다더구나.”
“들었습니다.”
“계획을 앞당길 예정이야. 그쪽에 심어 뒀던 사람도 걸렸으니 계속 기다릴 필요가 없어서.”
“언제쯤입니까.”
바네사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왜 묻니? 말해 줄 사람이라도 있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다. 궁금해서 여쭤 보았습니다.”
데미안은 차분히 눈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바네사의 도발적인 물음에도 침착한 태도였다.
“다 준비되면 알려 줄 테니 걱정 마렴.”
“예.”
바네사는 마저 걸음을 옮기다 말고 입을 열었다.
“아, 데미안.”
데미안은 고개를 돌려 바네사와 눈을 맞췄다. 바네사는 자신을 똑 닮은 눈매를 보며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다음에는 좀 더 그럴듯한 거짓말을 해 보렴.”
움찔.
뒤로 포갠 데미안의 손이 안으로 곱아들었다.
“속아 주려고 해도 재미가 없구나.”
“…예.”
바네사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쉬라는 말과 함께 데미안의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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