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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107화 (107/145)

107화

“…확실해요?”

“제가 거짓말해서 얻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황녀님은 저와 같은 편이신데.”

맞는 말이었다.

세르기는 자신의 편인 데다가 지금까지 그의 말을 믿고 따라서 안 좋은 적 없었다. 물론 성공한 적은 없지만, 그 실패에 세르기의 지분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 약점이 뭐죠?”

엘리자벳의 물음에 세르기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만 아셔도 윈터 공작은 걸려들 겁니다.”

세르기는 태도는 자신만만했다.

정확한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아 황녀가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내자 세르기는 낮게 속삭였다.

“황녀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치명적인 약점이 아니고서야 윈터 공작이 다프네와 결혼했을 리 있겠습니까.”

엘리자벳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결혼 직전까지 황제에게 황녀와의 결혼을 강요받고 있었다. 당시 엘리자벳은 자신을 거부하는 에드먼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사랑? 가당치도 않은 말이죠.”

엘리자벳은 점점 세르기의 말에 넘어갔다.

“하, 하하… 그렇죠. 그렇지 않고서야….”

머지않아 엘리자벳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물드는 것을 본 세르기는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뭔데요? 다 들어줄게요.”

이미 머릿속으로 모든 계획을 짠 엘리자벳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빠를수록 좋으니까… 내일 연회에서 윈터 공작에게 접근하세요.”

“좋아요. 어차피 참석할 예정이었으니까. 어렵지 않아요.”

“감사합니다.”

‘진짜였어. 진짜라고!’

엘리자벳은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전율에 몸을 잘게 떨었다. 늘 꼿꼿한 태도를 고수하던 에드먼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자 가슴을 묵직하게 누르던 것이 한꺼번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알게 됐는지 궁금해요?”

“…….”

“글쎄요. 공작 부인이 어제 내게 말해 줬었나?”

“황녀님.”

엘리자벳은 참지 못하고 또다시 꺄르륵,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모두의 이목은 이미 에드먼과 엘리자벳에게 집중된 상태였다. 사람들은 살벌한 에드먼의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저 맑은 웃음을 쉼 없이 터트리는 엘리자벳을 보며 ‘설마?’ 하는 의문을 표했다.

놀랍게도 에드먼과 엘리자벳이 재결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 시선을 진작 눈치채고 있던 엘리자벳은 우뚝 멈추었다.

노래가 끝나기 전이었으나 엘리자벳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에드먼을 올려다보았다.

“궁금해요? 알려 줄게요.”

“…….”

“대신. 내게 입 맞춰요.”

엘리자벳은 에드먼의 크라바트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지금.”

동시에 엘리자벳은 몸을 휙 틀었다.

에드먼의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다프네가 보였다. 정확히 옆모습을 다프네에게 보여 주고 있는 구도였다.

크라바트를 매만지던 가는 손가락이 마치 타고 오르듯 에드먼의 목을 지나 날렵한 턱을 쓸고, 굳게 닫힌 입술로 향했다.

“하아….”

엘리자벳은 곧 저 입술과 맞닿을 생각에 눈이 느슨하게 풀렸다.

“어서요.”

촉촉한 음성으로 에드먼을 재촉했다.

에드먼의 입술에 시선이 빼앗긴 탓에 그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미처 알 턱이 없는 엘리자벳은 애가 탔다.

에드먼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엘리자벳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에드먼의 입술을 기다렸다.

“세르기 블레드가 알려 준 겁니까?”

그러나 내려앉은 것은 부드러운 입술이 아닌 차가운 목소리였다. 호선을 그리던 엘리자벳의 입매가 경직됐다.

“흐응. 지금 그게 중요해요? 빨리 내게 입을….”

“내가 다프네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까?”

결국 참지 못한 엘리자벳이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에드먼의 얼굴이 엘리자벳을 스쳐 귓가에 닿았다.

“황녀님은 눈치채시지 않았습니까.”

엘리자벳의 눈이 잘게 떨렸다.

그녀는 애써 눈을 접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공작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는데요.”

“내가 다프네를….”

엘리자벳은 인상을 쓰며 에드먼의 말이 끝을 맺기 전에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어깨를 움켜쥔 에드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엘리자벳의 얼굴이 잔뜩 굳은 상태였다.

“끝까지 들으십시오. 나는 다프네를….”

“그만!”

엘리자벳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에드먼은 그제야 엘리자벳의 어깨를 놓았다.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난 엘리자벳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입술을 꽉 깨문 엘리자벳은 이내 뒤로 휙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가라앉은 눈으로 쳐다보던 에드먼은 옅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올리며 뒤돌았다. 그리고 멈추었다.

“…다프네?”

분명 몇 분 전까지 다프네가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

“허억, 헉.”

다프네는 나무를 짚은 채 거친 숨을 헐떡였다.

황녀의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허리를 숙이던 에드먼의 모습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움직였다.

따끔거리는 목을 움켜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다프네는 손을 세워 손톱으로 목을 꾹 눌렀다.

‘아파.’

고통이 밀려오자 머리를 어지럽히는 잔상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마님.”

“가까이 오지 말아요.”

다프네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열심히 뛰어 정원으로 왔지만 알렉을 떼어 놓는 건 불가능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알렉을 마주하자 화가 치솟았다.

“하지만….”

“오지 말라고요!”

다프네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그제야 알렉의 걸음이 멈추었다. 알렉은 잠시 동안 다프네를 응시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알렉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다프네는 그제야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던 탓에 시야가 조금 흐릿했다.

그사이 숨이 좀 진정됐기에 다프네는 나무에 등을 댄 상태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

다프네는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꺄르륵. 티 없이 맑은 엘리자벳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괜찮아.”

다프네는 중얼거렸다.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난, 괜찮아.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처럼 다프네는 계속 중얼거렸다.

한참 후 고개를 든 다프네의 시야에 맨발이 보였다. 뛰다가 어디에 흘리고 온 것인지 신발 한쪽이 벗겨져 있었다.

드레스도 군데군데 찢어져 있고 발은 흙이 묻어 있었다.

누가 봐도 엉망인 자신의 모습에 다프네는 조소를 터트리며 나무에 머리를 기댔다.

문득, 다프네는 누군가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정원을 넓었고, 그리 멀지 않은 나무 뒤에 반쯤 모습을 드러낸 인영이 있었다.

다프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왠지 익숙한 모습이었다.

“…데미안?”

바스락, 하는 소리와 함께 인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허공으로 손을 뻗었던 다프네는 미간을 좁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분명 오지 말라고….”

뒤를 돌던 다프네의 말이 뚝 끊겼다.

“…왜 왔어요?”

뛰어온 듯한 에드먼이 서 있었다.

“오해입니다.”

“무슨 오해요?”

반사적으로 되물었던 다프네는 에드먼의 입술이 달싹거리기 전에 그의 말을 가로챘다.

“아니. 그냥 말하지 마요.”

“그게 아닙니다.”

“내게 굳이 변명할 필요 없어요.”

다프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에드먼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입, 맞추지 않았습니다.”

에드먼의 입술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엘리자벳의 입술이 칠해진 새빨간 립스틱이 닿은 흔적도, 지운 흔적도 없었다.

“그래서요.”

그러나 다프네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나랑 상관없어요.”

“…괜한 오해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무심한 말에 에드먼은 눈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왠지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손바닥 안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다프네는 그런 에드먼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스쳐 지나갔다. 다프네의 뒤를 눈으로 쫓던 에드먼은 맨발을 발견하고 곧장 다가갔다.

“잠깐. …맨발이잖습니까.”

“신경 쓰지 마요.”

“…실례하겠습니다.”

에드먼은 그대로 다프네를 들어 올렸다.

갑작스레 시야가 훅, 높아지자 다프네는 화들짝 놀라며 에드먼의 목에 팔을 감았다.

“지금 뭐 하는…!”

다프네는 꾹 참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려놔요.”

“마차까지만 이러고 가겠습니다.”

“에드먼!”

“그대는…!”

에드먼의 목소리에 다프네의 부름이 묻혔다. 다프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에드먼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그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이내 꾹 눌러 담고 고개를 돌렸다.

“나와 닿는 게 싫어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다프네는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정말 싫어요.”

정말로.

다프네는 모를 것이다. 그 말에 에드먼이 얼마나 안도했는지.

욕하고, 때리고, 외면받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나 다프네가 그를 향해 무관심하다는 행동을 취할 때마다….

“…제 의견이 중요할까요.”

“내게 굳이 변명할 필요 없어요.”

“나랑 상관없어요.”

얼마나… 얼마나….

끔찍한지.

다프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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