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지하에 데려다 놔.”
에드먼은 기절한 카말 조루디를 요한에게 간략한 설명과 함께 넘겼다.
“설마 벌써 첩자를 심어 놨을 줄은….”
상황을 들은 요한은 낮게 신음했다.
“이미 흑마법에 걸린 이였을지도 모른다.”
주술사는 보통 한 명당 한 명에게만 흑마법을 걸 수 있다. 아무리 뛰어난 주술사라고 해도 다섯 명이 최대다.
그런데 세르기의 세력은 총 다섯 가문. 황제 그리고 카말 조루디까지 합치면 적어도 7명이다.
세르기에게 뛰어난 주술사가 있거나 7명 그 이상의 주술사를 거느리고 있다는 것이다.
“주술사는 분명 사냥 전쟁 때 사라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몇십 년 전, 어렵지 않게 주술사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이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
당시 황제는 정치적인 문제로 민심이 시끄러워지자 이것을 안정시키고자 주술사를 향해 누명을 씌우고 일면 주술사 사냥을 시작했다. 거의 모든 주술사의 대가 끊겼다.
겨우 도망친 어린아이가 나중에 커서 기사단 하나 정도에게 흑마법을 걸어 제국을 쳐들어왔다. 에드먼은 그 전쟁에 합류해 주술사를 죽였다.
그것이 마지막일 줄 알았다.
“쥐새끼도 남아 있기 마련이지. 세르기의 뒤를 최대한 캐 봐야겠다. 주술사가 몇인지 알아야겠다.”
“예. 황태자 전하께도 전달하겠습니다.”
에드먼은 고개를 끄덕인 후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에드먼.”
그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들리는 건 그때였다.
에드먼은 걸음을 멈추고 목소리가 들린 어둠 속을 주시했다.
“나예요.”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화려하게 치장한 마린다였다. 에드먼은 마린다의 발그레해진 뺨을 보다가 그대로 지나쳤다.
“잠깐요!”
마린다는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에드먼은 뒤를 돌면서 손을 피하는 것이 더 빨랐다.
“무슨 짓입니까.”
“나, 나 기억 못 해요? 머리색이랑 눈 색이 좀 달라지긴 했지만 왜 날 기억 못 하죠? 나 마린다예요.”
에드먼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마린다는 에드먼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당황하며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더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에드먼은 마린다의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에드먼!”
에드먼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마린다를 피해 그대로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하….”
옅은 한숨을 내쉰 에드먼은 멀지 않은 곳에서 알렉을 발견했다.
“알렉.”
“각하, 벌써 오셨습니까?”
“다프네는?”
“발코니에 계십니다.”
아무도 없는 알렉의 주위를 살피다가 그의 손에 들린 물잔을 발견했다.
“아, 마님께서 목이 마르시다고 하셔서.”
에드먼은 알렉이 말한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어머!”
“공, 공작님.”
그 안에서 밀회를 즐기던 귀족은 에드먼의 등장에 화들짝 놀랐다.
“…왜 여기 있지?”
“주, 주인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비어 있어서… 죄송합니다.”
귀족은 헐레벌떡 발코니 밖으로 나갔다.
“저들이 왜 이곳에서 나옵니까?”
알렉은 당황하며 물었다.
에드먼은 번뜩 발코니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녹색 천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발코니는 텅 비어 있었다.
“각하, 그건….”
오늘 다프네가 한 머리 장식이라는 것을 알렉도 알아차렸다.
“…….”
천을 움켜쥔 에드먼은 곧바로 발코니의 문을 열어 계속 얼쩡거리던 시종의 멱살을 끌어 당겼다.
“억!”
순식간에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시종은 에드먼의 가라앉은 시선에 몸을 잘게 떨었다.
“황녀인가?”
범인은 단 한 명이었다. 시종은 두려움에 휩싸여 고개를 위아래로 거세게 끄덕였다.
“예, 예. 맞습니다.”
시종은 에드먼을 데려오라는 황녀의 명을 받았다. 그러나 연회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에드먼이 갑자기 사라졌기에 정차 없이 움직이다가 다시 돌아온 그에게 접근하기 위해 발코니 근처에 있었을 뿐이다.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좀 더 주의를 했어야 했는데….”
“됐다. 알렉, 마차 준비해 놔.”
에드먼은 곧바로 발코니에서 뛰어내렸다.
시종은 눈을 질끈 감았으며 알렉은 다급히 난간 쪽으로 뛰어갔다. 바닥에 착지한 에드먼이 사라지는 것을 본 알렉은 안도하며 연회장을 나왔다.
한편 에드먼은 텅 빈 황녀 궁을 보면서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이 모두 엘리자벳의 계획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랜만이에요, 공작.”
“다프네.”
에드먼은 엘리자벳이 제게 말을 걸든 말든 곧바로 다프네에게 다가갔다.
“잠깐….”
옆에 서 있던 일린은 에드먼이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그 앞을 막아섰다.
“비켜.”
그러나 에드먼과 눈치 마주치자 흠칫 어깨를 떨며 뒤로 주춤거렸다. 에드먼은 일린을 지나쳐 바닥에 주저앉은 다프네의 어깨를 쥐고 일으켜 세웠다.
다프네의 달아오른 뺨을 발견한 에드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가만히….”
작게 읊조린 에드먼은 엘리자벳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금 뭘 하는 겁니까.”
“왜요? 공작 부인과 그냥 얘기를 좀 나눴을 뿐인데.”
안 그래요?
엘리자벳은 미소를 지으며 다프네에게 물었다.
“…그냥 가요.”
다프네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그냥 좀, 쉬고 싶어요.”
다프네는 에드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부탁이에요.”
붉은 눈가와 다르게 잔뜩 굳은 입매가 옅은 미소를 만들어 내느라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에드먼은 다프네의 말을 따르기로 하며 몸을 돌렸다.
“어딜 가는 거예요? 내 용건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에드먼은 엘리자벳의 말을 무시했다. 엘리자벳은 씩씩거리다가 일린에게 소리쳤다.
“멀뚱히 서서 뭐 하는 거야! 당장 잡아!”
일린은 허둥지둥 가까이 다가갔으나 에드먼의 서슬 푸른 시선에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엘리자벳은 입술에 피가 맺을 정도로 잘근잘근 씹다가 외쳤다.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어요!”
에드먼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당신의 약점을 알고 있다고! 멈추라고!”
광인처럼 엉망이 된 모습으로 소리를 지르는 엘리자벳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 포악한 모습에 일린은 악마라도 본 듯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오들오들 떨었다.
그런데도 에드먼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이대로 에드먼을 보낼 수 없던 엘리자벳은 생각나는 대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죽여 버릴 거야! 비록 오늘은 미끼 역할이지만 다음에는 뺨 한쪽으로 끝내지 않을 거라고!”
뚝.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멈춰 선 에드먼은 그대로 엘리자벳을 향해 말했다.
“그냥 넘어가는 건 독살 자작극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부족합니까.”
그와 눈이 마주친 엘리자벳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살기를 느낀 몸이 잔뜩 굳어 움직이지를 않았다.
에드먼은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아악!”
엘리자벳의 고함과 함께 찻잔이 깨지는 요란함을 마지막으로 문이 완전히 닫혔다.
***
공금
“각하!”
황녀 궁 앞에 서 있던 알렉은 에드먼과 다프네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저택으로 돌아간다.”
알렉이 에드먼의 명대로 마차를 가져왔기에 바로 올라탈 수 있었다.
다프네는 언제나처럼 창문에 가까이 앉았고 에드먼은 그 옆에 앉았다. 바로 옆에 쿠션이 푹, 꺼지자 창문 밖을 보고 있던 다프네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에드먼은 반대쪽 쿠션을 들자 안에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응급 처치가 가능한 물품 중에서 연고를 꺼낸 에드먼이 허리를 폈다.
“…됐어요.”
“상처가 덧날 수도 있습니다.”
“됐다고요.”
“다프네.”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탁!
다프네는 다가오는 에드먼의 손을 그대로 쳤다. 에드먼이 들고 있던 연고는 그대로 마차 한구석에 처박혔다. 다프네는 소리친 것과 다르게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왜 가만히 있었냐고 물었죠.”
“…….”
“난 단 한 번이라도 가만히 있지 않았던 적이 없어요.”
다프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전에도, 이 전에도. 처음부터. 난 항상 그대로였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그냥 무시하면 돼요.”
“…….”
“항상 그랬던 것처럼.”
“…후회하고 있습니다.”
지난 5년 동안의 매 순간을, 숨조차 잘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후회?”
다프네는 조소 섞인 웃음을 내뱉었다.
“하지 말아요. 그냥,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아.
에드먼은 다프네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며 깨달았다.
고통은 무뎌질 수 있어도 남는 상처의 크기는 똑같다. 다프네의 고통은 무뎌졌다. 그러나 상처의 크기는 예전과 같다.
그 상처는 흉터를 남기고, 그 흉터 옆에 또다시 새로운 상처가 남는다. 자신이 곁에 있는 동안, 무엇을 하듯 무슨 말을 하듯 다프네는 고통받고 상처 입을 것이다.
“…날 다시 사랑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대의 말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에드먼은 떨리는 두 손을 서로 마주 잡았다.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거면 충분하니까….”
반쯤 내리깐 에드먼의 두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떨렸다. 내뱉지 못한 말을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얼굴 하지 마십시오.’
마치, 미련 없이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얼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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