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재상…! 분명 일이 바빠 오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황제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일이 생각보다 이르게 끝나서 말입니다. 그런데….”
세르기는 흘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파벨 백작을 보았다.
“감히 폐하께 무례를 저지른 이를 선처하려고 한 것입니까, 뮤트 백작님?”
“선처가 아닙니다. 이렇게 뜻 깊은 날에 굳이 피를 봐야겠느냐는 거죠. 나중에 처벌을 내려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니죠.”
세르기는 유레이트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파벨 백작을 여기서 아무런 처벌 없이 풀어 준다면 다른 귀족들도 황비 전하를 우습게 알 텐데요.”
“그 정도로 황실의 권위가 낮아졌단 말입니까.”
진심으로 걱정하듯이 묻는 유레이트의 말에 세르기는 황당하다는 듯 작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무리 세르기가 똑똑하다 해도 이 황실에 더 오래 몸을 담갔던 유레이트를 이기기엔 무리가 있었다.
대화가 끝나자 그들을 따르는 귀족들이 하나둘 말을 덧붙였다.
유레이트를 지지하는 세력은 대부분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그와 일을 몇 번 해 본 귀족들이었으며 세르기의 세력은 대부분이 젊은 신흥 귀족이었다.
“그만, 그만!”
점점 언성이 높아지자 황제가 버럭, 소리쳤다.
“지금 내 앞에서 뭣들 하는 건가!”
황제는 눈에 실핏줄이 터질 만큼 온 힘을 다해 외치고 있었다.
“파벨 백작의 처벌은 나중으로 미룬다! 감옥으로 데려가도록 해라!”
안심하고 있던 파벨 남작은 기사들의 손에 이끌려 감옥으로 운송됐다.
황제의 눈이 잠시 붉게 물들었다가 본래 색으로 돌아갔다. 오직 세르기와 에드먼만이 그것을 발견했다.
“콜록, 콜록!”
황제는 거칠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 한 기침은 시간이 지나도 멈출 줄 몰랐고 결국 마린다와 황제는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소란이 있긴 했지만, 이곳은 수도에 모든 귀족이 한곳에 모인 장소이다. 이런 드문 기회를 놓칠 리 없는 이들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들끼리 연회를 즐겼다.
귀족들이 말 한 번 붙이기 위해 안달 난 사람은 총 세 명이었다.
세르기, 유레이트 그리고 에드먼.
에드먼은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강제 소환장이 내려오고 감옥에도 갇혔으나 황제가 아무렇지 않게 그를 대하자 사람들도 슬쩍 말을 붙이기 위해 다가왔다.
더군다나 두 개의 공작가 중 하나가 황제의 손에 사라진 마당에, 황제 다음으로 가장 높은 직위를 가진 이는 다름 아닌 에드먼이었다.
쉼 없이 밀려오는 사람이 어느 정도 줄어든 때였다.
“각하.”
요한은 에드먼의 뒤로 다가와 무어라 속삭였다.
“다프네, 잠시 알렉과 계십시오.”
에드먼은 알렉을 다프네에게 붙여 준 후 곧바로 자리를 옮겼다.
“외숙부님.”
그 부름에 에드먼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유레이트가 몸을 돌렸다.
“공작님.”
유레이트의 뒤에는 아까 세르기에 맞서 몇 마디 덧붙였던 귀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에드먼에게 인사했다.
유레이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에드먼과 대화를 나눴다.
“황태자 전하와 함께 모은 세력입니다.”
그런 것치곤 매우 적은 숫자였다.
“예, 적죠.”
유레이트는 에드먼의 생각을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반역으로 보이는 행동인 만큼 조심스럽게 움직이긴 했지만… 제안을 한 반 이상이 거절하고 이 숫자도 겨우 모은 것입니다.”
황태자는 남부에 발이 묶였기에 귀족들 리스트를 건네받아서 유레이트가 홀로 귀족들을 설득하며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흑마법 때문일 겁니다.”
“예?”
유레이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흑마법이라니뇨. 갑자기 그게 무슨….”
“블레드 후작이 흑마법을 이용해 귀족들을 포섭하고 있습니다. 흑마법을 건 주술사가 죽어야 풀리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 걸리면 풀려나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구분할 방도가 있습니까?”
“붉은 눈을 조심하십시오, 외숙부님.”
“붉은 눈….”
중얼거리는 유레이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에드먼은 그 미세한 차이를 바로 알아차리고는 목소리를 조용히 깔았다.
“저들 중에 있습니까?”
“…예.”
유레이트는 나직이 얼핏 붉은 기운이 있던 눈동자를 가진 이의 인상착의를 읊었다.
“이야기는 다 끝나셨습니까?”
에드먼이 다가오자 무리는 그를 반겼다. 그들은 에드먼에게 말 한마디라도 덧붙이기 위해 애썼다. 에드먼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치다가 누군가에게 시선이 닿았다.
“이런 일에 동참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각하.”
조용히 있다가 에드먼이 자신을 바라보자 짧게 말을 건네는 남자는 유일하게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저자가 유레이트가 말한 이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나 넘어갈 수밖에 없는 믿음직스러운 태도였다.
“이름이 뭐지?”
남자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생겼다가, 재빨리 자취를 감추었다.
“카말 조루디입니다, 공작님.”
“나와 얘기를 좀 나누겠나.”
“영광입니다.”
그는 입에 발린 말 대신 담백하게 말했다.
에드먼은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머지않아, 조용한 복도에서 단말마로 비명이 터져 나오며 둘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
“그러지 말고 다녀와요.”
다프네는 안절부절못하는 알렉을 향해 말했다.
부단장인 크리스가 이곳에 와 알렉에게 무어라 말하고 간 후 그의 정신은 딴 곳에 팔려 있었다.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아요. 이곳에 사람이 몇 명인데 내게 해를 가할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목이 마르네요. 오는 길에 물 좀 부탁할게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알렉은 이내 나갔다.
다프네는 숨통이 트였기에 숨을 훅, 내뱉었다.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멍하니 눈을 깜빡일 때였다.
“공작 부인?”
뒤를 돌아본 다프네는 시녀의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저는 황녀님의 측근 시녀, 일린입니다. 황녀님께서 공작 부인을 모셔오라 명하셨습니다.”
“…호위를 대동하고 싶은데.”
연회장 안에 있어 봤자 편할 게 없었기에 다프네는 일부러 발코니로 들어왔다. 방심하고 말았다. 알렉이 잠시 자리 비운 틈을 노려 발코니 안까지 들어올 줄은 미처 몰랐다.
“황실에서 호위라니요. 황실 기사들이 있잖습니까.”
일린은 눈을 깜빡이며 다프네의 주위를 살폈다. 다른 이들이 있나 확인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혹 황실 기사들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도 아니라면… 다른 불손한 이유로 호위 대동이 꼭 필요하다거나….”
다프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럴 리가.”
“그럼 지금 당장 저와 황녀님께 가 주셔요.”
일린은 성큼성큼 다가와 다프네의 팔뚝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악력에 저절로 눈살이 찡그려질 정도였기에 다프네는 주춤했다.
“잠시만 이것 좀 놓고…!”
“시간이 없습니다, 부인.”
다프네가 아무리 힘을 줘 봐도 질질 끌려갔다. 다프네는 할 수 없이 머리를 묶고 있던 천을 풀어 간발의 차로 바닥에 떨어트린 후 발코니 밖으로 끌려 나왔다.
“도망칠 생각 하지 마세요.”
냉큼 다프네의 뒤에 선 일린이 뒤에서 낮게 읊조렸다.
“복도로 나가세요.”
다프네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수백 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알렉을 발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는 수 없이 일린의 말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복도를 나오자 하녀는 다시 다프네의 팔뚝을 잡고 빠르게 걸어갔다. 황녀 궁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공작 부인을 데려왔습니다, 황녀님.”
다프네는 일린의 거친 손길에 비틀거리며 겨우 중심을 잡았다.
“오랜만이에요, 공작부인.”
“…황녀님을 뵙습니다.”
엘리자벳은 소파에 앉은 채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앉아요.”
다프네가 주춤거리며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일린이 다프네의 어깨를 쥔 채 아래로 꾹 눌렀다. 다프네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엘리자벳은 그런 다프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잘 어울리네요, 지금 그 모습.”
다프네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엘리자벳이 눈짓하자 일린은 다프네의 뒷머리를 움켜쥐고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얼굴 좀 보여 줘요. 그 귀한 얼굴 보고 싶어서 부른 건데.”
다프네는 입술을 앙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자벳은 다프네의 이런 모습조차 싫었다. 제대로 괴롭히는 것 같지도 않고 속이 제대로 시원해지지도 않았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한 엘리자벳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까이 다가갔다.
짜악!
눈앞에서 불이 번쩍, 튀기는 것과 동시에 고개가 돌아갔다. 엘리자벳은 다프네의 얼굴을 움켜쥔 채 자신을 보게 했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이렇게 평범하고 보잘것없는데. 왜 에드먼이. 엘리자벳은 뒷말을 삼키며 거칠게 다프네의 얼굴을 놓은 후 소파로 돌아갔다.
“그렇게 너무 겁먹진 마요. 당신은 그저 미끼니까. 내 목표는 따로 있어요.”
금방 붉게 부풀어 오르는 뺨을 보니 그나마 꽉 막혔던 속이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엘리자벳은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다. 황제가 애첩을 황비로 만들었다. 그것은 엘리자벳의 자존심이 큰 영향을 끼쳤다. 고작 평민 따위에게 존댓말을 쓰고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모멸감에 몸이 떨렸다.
“흠, 아무래도 공작이 오려면 시간이 좀 남은 것 같고… 지난 얘기 좀 할까요? 가령, 공작이 나와 결혼할 뻔했던 이야기 정도?”
뺨을 움켜쥔 채 고개를 숙인 다프네의 어깨가 잘게 움찔거렸다.
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때였다.
“…바로 오네.”
엘리자벳은 중얼거리며 문가에 나타난 이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공작.”
그곳에 나타난 것은 뛰어온 듯 흐트러진 모습을 한 에드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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