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하루에 걸친 여정 끝에 다프네와 에드먼은 새벽에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부러 선발대로 출발한 벤자민이 열어 둔 뒷문으로 여러 대의 마차가 어둠에 몸을 숨긴 채 은밀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다프네는 도착하자마자 저택으로 들어갔고 에드먼은 주위를 정리했다.
조용한 저택에 불이 하나 켜졌다. 다프네의 방이었다.
에드먼은 걸음을 멈추고 머지않아 다시 불이 꺼지는 방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미간을 좁혔다. 흐릿한 그림자가 다프네의 방에서 나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벤자민의 물음에 에드먼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됐다.”
깊은 새벽이었기에 에드먼은 이내 집무실로 들어가 하루 동안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각하, 수도에 있는 귀족들에게 황제의 명이 내려왔습니다.”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 요한은 헐레벌떡 집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건국제까지 한 달 정도 시간이 충분하게 남아 있음에도 황제는 오늘 갑자기 연회를 주최했다. 에드먼이 수도로 올라온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말이다.
아무리 소수 인원으로 올라왔다고 해도 여기저기 심어져 있는 쥐새끼의 눈은 피해 갈 수 없었다.
눈에 훤한 그들의 속셈이지만 에드먼은 거부하지 않았다.
에드먼은 격식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은 후 마차의 문을 열었다.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한 탓에 창백한 얼굴을 한 다프네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에드먼은 멈칫하는 것도 잠시 조심스레 마차에 올라탔다. 평소처럼 다프네의 반대편 끝에 자리를 잡은 그때였다.
“……!”
위태롭게 흔들리던 다프네의 머리가 옆으로 휙 기울었다.
에드먼은 곧바로 손을 뻗어 다프네의 머리를 받쳤다. 하얀 얼굴의 반 이상이 에드먼의 손에 가려졌다. 다프네의 얼굴과 손 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사륵거렸다.
깊게 잠이 든 것인지 다프네는 좀처럼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눈을 움찔거리다가 다시 규칙적인 숨을 내쉬었다.
에드먼은 머뭇거리다가 다프네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후 머리를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리자 창문을 재빨리 열어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쉿.”
“…아.”
문을 두들기기 직전에 멈춘 요한은 손을 내렸다. 그리고 얼핏 보이는 모습에 상황을 알아차리고 목소리를 작게 줄였다.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도착한 후에 하지. 천천히 출발해. 늦어도 상관없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요한은 마차 앞쪽으로 가 마부에게 에드먼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마차는 부드럽고 천천히 출발했다. 자칫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다면 마차가 움직이는 것을 모를 정도였다.
쌔액쌔액, 마차 안에는 다프네의 옅은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창문이 조금 열린 것인지 살짝 불어오는 바람에 다프네의 머리카락이 춤을 추듯 살랑거렸다.
그에 따라 다프네의 체향이 바람을 타고 에드먼에게까지 다다랐다.
“…….”
에드먼은 저도 모르게 서류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으음.”
다프네는 자신의 뺨을 에드먼의 어깨에 비볐다. 숨을 훅, 들이켜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다프네.”
에드먼은 다프네의 어깨를 쥔 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머지않아 다프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이 떠졌다.
“도착했습니다.”
“…아.”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다프네는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뒤로 뺐다. 둘의 거리가 순식간에 멀어지면서 에드먼의 어깨에 미약하게 남아 있던 온기마저 빠르게 식어 없어졌다.
눈을 떠 보니 자신이 에드먼의 어깨에 기대고 있자 다프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조금 구겨진 드레스를 정리했다.
에드먼은 마차의 문을 열고 먼저 나왔다.
“다프네, 손을….”
다프네를 향해 손을 들었으나 홀로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게 더 빨랐다.
다프네는 허공에 들린 에드먼의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를 지나쳤다. 에드먼은 다프네의 뒷모습을 눈을 쫓으며 뻗었던 손을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에드먼은 다프네를 금방 따라잡고 그 옆에 섰다.
연회가 시작되기 직전인 탓이라 주최되는 궁으로 가기까지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궁의 입구가 보이자 에드먼은 걸음을 멈추고 다프네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
다프네는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보다가 그의 팔뚝에 손을 아주 가볍게 올렸다. 사소한 접촉에도 에드먼의 등허리가 움찔거렸다.
에드먼은 다프네의 걸음에 맞춰 걸었다.
“윈터 공작 내외 드십니다!”
시종은 둘을 보고는 커다래진 눈으로 크게 소리쳤다.
문이 열리고, 수백 명의 시선이 쏟아졌다.
잠시 멈췄던 걸음을 옮기는 것과 동시에 에드먼이 다프네의 팔을 끌어당기면서 둘은 가까이 붙었다.
다프네는 당황하며 그를 쳐다보았으나 에드먼은 오로지 정면을 응시했다. 다프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황제의 자리 바로 아래의 자리를 잡은 다프네는 곧바로 팔을 빼냈다. 에드먼은 언제 그녀를 잡아당겼다는 듯이 빠져나가는 팔을 순순히 놔주었다.
“각하.”
요한은 에드먼의 뒤로 다가왔다. 에드먼은 샴페인을 입가에 댄 채 티 나지 않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해.”
“오늘 황제가 연회를 주최한 이유가 애첩에게 공식적인 직위를 주기 위함입니다.”
에드먼의 미간이 좁혀졌다. 지금까지 수많은 황제가 늘 애첩이나 정부를 두었지만 단 한 번도 공식적인 직위를 하사한 적 없다. 이례적인 일이다.
“저들은 모르는 눈치군.”
고작 애첩 따위가 직위를 받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모인 귀족들이 아님이 분명하다. 저들 역시 이것을 꿈에도 모르는 눈치였다.
“예. 그리고… 황제의 애첩이 백작님께서 말씀하신 사람이 맞았습니다.”
“…그 시녀가 맞다고?”
유레이트는 분명 황제의 애첩이 몇 달 전 자살한 윈터가의 하녀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요한의 입술이 마저 달싹이던 찰나였다. 황제의 등장을 알리는 시종의 커다란 외침에 모두가 허리를 숙였다. 걸음 소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역한 냄새가 풍겼다.
‘시체 냄새?’
이 냄새를 익히 아는 에드먼의 미간이 좁혀졌다.
“모두 고개를 들라.”
쇠약한 목소리에 고개를 든 에드먼은 이내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냄새의 근원지는 황제였다. 황제는 죽은 자의 냄새를 뿜고 있었다.
***
황제의 안색은 거무죽죽했다. 살이 얼마나 빠진 것인지 피부는 축 늘어졌고 손가락은 마치 시체의 것처럼 뻣뻣했다.
“오늘 내가 그대들을 부른 것은….”
그 뒤는 요한이 말한 대로였다.
에둘러 포장했으나 황제가 내뱉은 말의 뜻은 즉 이러했다. 평민 출신 애첩에게 공식적인 직위를 내리겠다.
귀족들은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문이 열리고,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금발이라고 착각할 만한 색소가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누군가 나타났다.
“폐하.”
사르륵, 눈가를 애교스럽게 접으며 다가온 이는 에드먼이 기억하는 그 하녀가 맞았다.
황제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춘 마린다는 에드먼을 흘끔, 보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에드먼을 향한 행동이라는 것을 자각하기 직전에 마린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의 옆에 섰다.
중간 과정은 생략하고 곧바로 마린다의 머리 위로 티라아가 올려졌다. 황후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제1 황비인 마린다가 황궁의 안주인이나 다름없었다.
직위가 낮은 순서부터 하나둘 나와 마린다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들 모두 세 치 혀처럼 굴고 있었으나 굴욕감에 젖은 표정까진 완벽하게 숨길 수 없었다.
한평생 오만하게 살아온 귀족이 고작 평민에게 허리를 숙여야 하니 당연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옵니다, 폐하!”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그때였다. 황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는 것과 동시에 소리쳤다.
“감히 누가 내 말에 토를 다는 것이냐. 당장 나오거라!”
“꺄악!”
황실 기사들이 칼을 빼 들자 귀부인과 영애는 비명을 질렀다.
머지않아 소리를 친 이가 황제의 앞에 끌려와 무릎이 꿇렸다. 고지식한 것으로 유명한 파벨 백작은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고작 평민에게 황비라는 직위를 내리시다니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옵니다!”
“이… 이것이…! 네놈까지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황제는 부들부들 떨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옆에 선 기사단장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검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황제가 크게 휘청거렸다. 한땐 전쟁터를 누비던 황제는 순식간에 허약해져 검도 제대로 들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폐하, 진정하십시오.”
소란 속에서 나타난 유레이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뮤트 백작…! 그대마저 나를 저버리려는 것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 다만 황비 전하를 위한 자리이온데 피 냄새가 풍기면 되겠습니까. 파벨 백작의 처벌은 나중으로 미뤄 두고 연회를 마저 진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제는 화를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콜록, 콜록!”
그러다가 거친 기침을 하며 소매로 입을 틀어막았다.
“에잇!”
황제는 힘겹게 들고 있던 검을 내동댕이치고 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한숨 돌린 그때.
“아니죠, 폐하.”
세르기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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