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다프네는 치솟는 조소를 억눌렀다.
에드먼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믿는다고 했지만, 말과 다르게 마음은 좀처럼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다프네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헛기침을 했다.
“이어서 말해 줘요.”
“…큰일이 있는 건 아닙니다. 데미안을 봤다는 증언도 있고 멀쩡합니다.”
외관상으로는.
에드먼은 일부러 뒷말을 생략했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다프네가 쓸데없는 걱정에 휩싸일 것 같았다.
이 소식을 들은 것은 출발하기 직전이었고 데미안에게 몰래 접근하라는 명을 내렸으니 수도에 도착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없습니다.”
“네?”
“데미안 말입니다. 건강합니다.”
다프네는 눈을 깜빡였다.
“…네.”
그것도 잠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작게 대꾸했다. 반대편 소매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입술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꾹 깨물었다.
에드먼이 예전에는 결단코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할 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났다.
그 대상이 자신인지, 에드먼인지 모른다.
에드먼의 달라진 행동에 저도 모르게 기대를 하게 될까 봐, 다프네는 소매를 움켜쥔 손에 손톱을 세웠다.
팔뚝에서 고통이 느껴지자 가슴이 따끔거리는 고통이 조금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신 차려.’
그동안 수없이 홀로 기대하고 홀로 상처 받은 거로 족하다.
다프네는 한층 가라앉은 얼굴로 옅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그러곤 다시 고개를 들려는 찰나였다.
콰앙!
굉음이 울리자마자 에드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프네를 끌어안고 바닥으로 몸을 숨겼다.
땅에서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큰 굉음이 또다시 콰앙, 울려 퍼졌다.
“마물입니다, 각하!”
밖에서 들리는 외침에 다프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시야가 순식간에 바뀌어 있었다.
“다프네.”
다프네는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모습으로 에드먼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다프네의 양어깨를 붙잡은 채 말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마차에만 계십시오.”
다프네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차가운 바람이 훅, 끼치는 것과 함께 에드먼이 사라졌다.
탁.
문이 닫히자 다프네는 물속에서 빠져나온 듯 몸을 부르르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육이 놀란 탓에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이끌고 창문 앞에 겨우 자리했다.
그와 동시에 에드먼이 그 앞을 지나갔다.
“마차를 지켜라.”
“하오나 각하, 마물의 수가 많습니다.”
“도움은 필요 없다. 뒤로 물러나 있어.”
에드먼은 자신을 말리는 수하를 물리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에 따라 불어오는 바람에 검은 망토가 펄럭거렸다.
전투 도중 마차에 피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걸어간 후에야 에드먼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좁혔다.
성인 남성의 크기 정도 되는 돌을 여러 개 던진 것을 보니 보통 마물이 아니다. 변이 마물일 확률이 높았다.
에드먼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눈보라 너머로 커다란 마물이 숨을 쉭쉭거리며 달려왔다. 크기가 매우 컸지만, 속도는 작은 것들보다 더 재빨랐다.
변이 마물은 에드먼을 발견하고는 새빨간 눈을 깜빡이며 속도를 높였다.
스무 걸음.
열 걸음.
다섯 걸음.
벌컥, 무언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변이 마물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에드먼은 손을 들었다.
“각하!”
뒤에서 들리는 짧은 외침과 동시에 허공에 재가 생겼다. 에드먼은 뻗었던 손을 내리며 정면을 보았다. 크기가 큰 탓인지 재의 양도 상당했다.
에드먼은 눈 위로 쌓인 재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몸을 돌렸다. 언제 나왔는지 모를 다프네와 검은 기사단을 비롯한 이들이 눈을 깜빡이며 에드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먼은 그들을 지나쳐 다프네에게 다가가 자신의 망토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렀다.
“왜 나오셨습니까.”
“…당신.”
다프네는 좀처럼 말을 이어 가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지난 5년 동안 에드먼이 오러를 쓰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 없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됐어요.”
다프네는 어깨에 둘린 망토를 집어 에드먼의 가슴팍에 밀어 넣은 후 마차에 올라탔다. 에드먼은 다프네의 온기가 옅게 남아 있는 망토를 만지작거리며 마차를 빤히 응시했다.
“각하.”
그사이 요한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킨 후 입을 열었다.
“오러를….”
“한계치가 늘었다. 아무래도 설원에서 마물을 처리한 게 도움이 된 듯하다.”
에드먼은 미리 생각했던 말을 늘어놓았다.
“아, 그렇습니까….”
요한은 엉겁결에 대답했다. 그는 에드먼과 함께 전장을 떠돌았던 이기에 그의 한계치를 잘 알았다.
에드먼은 사사로운 곳에 오러를 낭비하지 않는다. 이번 변이 마물이 크긴 했으나 에드먼이라면 오러 없이도 충분히 처리 가능할 정도임이 분명했다.
그 의문을 알아차린 듯 에드먼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오러를 사용하면 금방 끝나는 것을 굳이 힘겨루기 할 필요 없지.”
요한의 입술이 달싹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맞는 말이었기에 반박할 부분이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사사로운 일에 오러를 쓸 필요는….”
“됐다. 그만하고 서둘러. 괜한 곳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에드먼의 말에 벤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에드먼은 마차의 문 앞에서 멈칫했다. 그의 몸에는 적지 않은 마물의 재가 붙어 있어 매캐한 냄새가 났다. 그것을 다 털기엔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다.
에드먼은 고민 끝에 마차에 오르지 않고 말에 올라탔다.
***
“흐음, 그래. 에드먼이 출발했다고?”
바네사는 하녀의 정성스러운 빗질을 받으며 보고를 받았다.
“마물은?”
새로운 변이 마물을 실험 삼아 에드먼에게 보냈다.
“실패했습니다.”
바네사는 어차피 기대조차 안 한 것이기에 그렇구나, 하고 넘겼으나 보고를 하는 수하는 쉼 없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바네사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자 그제야 안심하는 수하의 관자놀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머님.”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신전 안에서 바네사의 문을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애당초 몇 되지 않았다.
익숙한 목소리에 바네사는 거울 속에 비친 이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왔구나, 아들아.”
바네사는 데미안의 몸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의 회색 눈동자에 붉은 기가 돌았다. 바네사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눈동자를 샅샅이 살피고는 만족한 얼굴로 그를 놓았다.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그런 부탁은 얼마든지 하렴.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구나.”
바네사는 다정한 손길로 데미안의 머리를 쓸었다.
“이만 가 보렴.”
데미안은 허리를 숙여 바네사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어머나, 하며 눈을 가늘게 뜬 바네사가 덧붙였다.
“곧 에드먼을 볼 수 있을 거란다. 네 어미도.”
숙인 데미안의 어깨가 흠칫했다.
“제 어머니는 한 분이신걸요.”
“그러니?”
바네사는 미소를 지었다.
“알겠다. 이만 가 봐.”
데미안이 나가고 주술사 한 명이 허리를 굽신굽신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성, 성녀님을 뵙습니다!”
다름 아닌 데미안에게 흑마법을 건 주술사였다.
주술사는 본래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이가 아니다. 평균 아래에 웃도는 실력이기에 자신은 죽을 때까지 그분을 뵙지 못하고, 허드렛일만 하다가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전, 그의 앞으로 누군가 배정된 후부터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주술이 잘 먹히지 않는 신기한 소년은 일주일 내내 흑마법이 통하지 않다가 며칠 전 드디어 성공했다. 주술사는 붉어진 소년의 눈동자를 보고는 환호를 지르며 바네사를 찾아갔다.
“성공했다고?”
바네사는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이다가 주술사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잘했다.”
주술사는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꿈같고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았다.
흑마법에 성공한 주술사가 하는 일은 간단했다. 그가 죽으면 주술도 풀리기 때문에 호위 둘을 대동하고 데미안을 쫓아다닌다. 열 살부터 본격적으로 현장에 뛰어든 후 처음으로 경험하는 편안함이었다.
“이상한 점은 없었니?”
“무슨 이상한 점 말입니까?”
주술사는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가령…. 흑마법이 풀릴 기미가 보인다거나, 그런 거 말이야.”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주술사는 손사래를 쳤다. 스스로 흑마법을 푼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소리였다.
“내 명령은 잘 따르고?”
“예.”
주술사는 흠칫, 어깨를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네사가 시킨 일을 마치 감정 없는 인형처럼 처리하는 데미안의 모습은 잔인한 일을 많이 봐 온 주술사가 보기에도 소름 끼쳤다.
“단 한 번도 실수한 적 없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바네사 역시 데미안이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한다는 것을 이미 보고로 전해 들은 상태다. 하지만 주술사에게 굳이 물어본 것은 왠지 모를 불안감 때문이다.
‘뭔가 이상하단 말이야.’
하지만 그것 외에는 계획이 차례차례 완성되어 가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만 하면 된다. 마침 이 계획의 주인공도 수도로 오고 있으니 말이다.
바네사는 숨길 수 없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에드먼, 기다리렴. 네게 꼭 보여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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