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쿵.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다프네의 것인가, 에드먼의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둘 다인가. 그 누구도 모른다.
둘은 그저 서로를 하염없이 응시했다. 세상에 단둘만 남겨진 것처럼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바라보았다. 영겁 같은 시간이 흘렀다. 먼저 시선을 피한 것은 에드먼이었다.
“아….”
에드먼은 뻑뻑한 눈을 깜빡였다.
갈피를 잡지 못해 불에 덴 듯 시선을 도통 집중하지 못하던 에드먼은 얼마 후 다시금 시선을 맞추었다.
“…압니다.”
알고 있다는 말 한마디가 저렇게 불을 내뱉듯 고통스러운 것인가.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느낌에, 에드먼은 괜히 목에 손톱을 세워 약간의 힘을 주었다. 손톱이 붉은 자국을 냈다.
“알고, 있습니다.”
모르지 않는다.
은연중에 느끼고 있던 것이다. 굳이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목에 놓인 손가락이 곱아들었기에 옅은 떨림이 숨겨졌다. 훅, 들이켠 숨이 텁텁하다.
에드먼은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착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몸을 스치는 바람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가 에드먼의 귓가를 스쳤다.
“난 더 이상 사랑에 눈먼 멍청이가 아니에요, 에드먼.”
하, 에드먼은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속으로 간신히 참아 내야 했다. 이 와중에도 다프네가 내뱉는 이름이 안심되는 자신이 정말 어디가 어떻게 된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날 사랑한다고 했죠.”
다프네는 속삭였다.
“믿어 줄 테니까, 그러니까… 데미안이 있는 곳으로 날 데려가 줘요.”
“그건….”
다프네는 입술을 거칠게 씹는 것과 동시에 몸을 휙 돌렸다. 무게 중심이 뒤로 향하자 마른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
“다가오지 말아요!”
다프네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외쳤다.
“약속해요! 당장! 나를 데미안에게…!”
휘이잉, 거센 바람이 다시금 불어오는 건 그때였다. 다프네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다프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오랜 시간 바람을 쐬고 있던 차가운 몸을 녹이는 따스한 품 안이었다.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에드먼은 무언가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의 가슴팍은 크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고 머리 위로 쏟아지는 숨은 뜨거웠다. 에드먼은 감추지 못한 뜨거운 손으로 다프네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다 그대가 하자는 대로 할 테니까. 그러니까….”
에드먼은 간절히 속삭였다.
“다신 이런 짓 하지 마세요.”
지치고 지친 다프네의 눈꺼풀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쿵, 쿵.
둘의 심장이 비슷한 위치에서 한 치의 빈틈없이 맞닿은 채 뛰었다. 심장은 서로에게 맞추듯 똑같은 속도로 뛰고 있었다.
눈빛, 말투, 말로 상대를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단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다.
쿵, 쿵.
답을 아는 다프네는 애써 눈을 감았다. 부디 에드먼이 늦게 알아차렸으면 했다.
고독하고 외로운 짝사랑의 끝에서 얻는 것은 포기 그리고 단 한 사람을 향해서만 뛰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심장뿐이다.
***
다프네는 그동안 음식을 거부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식사를 시작했다. 며칠 동안 속이 텅 비었던 탓에 그날 먹은 음식은 전부 게워 내야 했지만 다프네는 꿋꿋하게 식사를 이어 갔다.
수도로 올라갈 준비를 마친 사흘 동안 오로지 건강 관리에만 신경을 쓴 덕에 조금 살이 붙어 있었다. 이것이 다행이냐 불행이냐 따지자면 확실히 전자였으나 상황을 들은 에드먼의 표정은 미묘할 뿐이었다.
“아직 예전으로 돌아가려면 멀었으나 건강이 조금씩 회복하고 계시다 합니다.”
벤자민은 뉴벨 남작 부인에게 전달받은 내용을 그대로 에드먼에게 말했다.
“각하. 그리고… 저번에 말씀드리려던 것 말입니다.”
벤자민은 사흘 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타이밍 안 좋게 그때 다프네의 일이 터져 미처 이어 가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 후로도 사흘간 에드먼이 수도로 올라갈 준비를 하면서 매우 바빴기에 당일이 되어서야 겨우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할 시간이 생겼다.
“소공작님이 찾아오셨다고 했잖습니까. 그때 소공작님께서… 바네사 님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뭐?”
에드먼은 눈을 깜빡였다.
바네사.
그 일을 아는 자들이라면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았기에 몇십 년 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오래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에드먼, 난 아버지께 보여드릴 거야.”
그 말을 남기고 떠나는 여자의 뒷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과 동시에 두통이 밀려왔다.
에드먼은 미간을 찡그린 채 이마를 짚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벤자민이 뉴벨 남작 부인을 모셔 오겠다고 말하자 에드먼은 손을 내저었다.
“됐다. 이어서 말해.”
“소공작님께서 바네사 님에 대해 물으셨고 저는 대답했습니다. 한 가지는 빼놓고요. 그건 제 입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판단하였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에드먼은 이어지는 말을 스스로 멈추었다. 바네사의 존재를 그의 아비가 그렇게나 숨기고 싶어 했기에 저택 안에서는 바네사의 흔적이 거의 없다.
전대 공작은 죽는 순간까지 바네사를 데려온 것을 평생의 실수로 여기며 무덤에 그 흔적을 모조리 가져갈 정도였다.
“결국 아시게 될 비밀이었습니다.”
“…데미안은 아직 어려.”
“각하, 소공작님은 이제 절대 어리지 않으십니다.”
에드먼은 이따금 데미안을 어린아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소공작님은 더는 그 빈민촌에서 데려온 네 살 아이가 아니십니다. 어엿한 성년이세요.”
벤자민은 덧붙였다.
“각하께서 이 문제를 잘 해결하시리라 믿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벤자민이 나갔다. 에드먼은 문이 닫히자 서류에서 눈을 뗐다.
‘바네사….’
에드먼은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바네사는 에드먼이 열 살이 되어 가신들에게 소개되던 해, 저택을 나갔다. 그것이 자의인지 아니면 전대 공작의 명령인지 모른다. 바네사는 그저 의미 모를 말을 남긴 채 사라졌다.
그리고 8년 후, 전대 공작이 죽고 윈터 공작이 된 에드먼이 전쟁터로 떠나기 전 한 가지 소식이 전달됐다.
윈터가의 사생아가 있다고.
그렇게 에드먼이 찾아간 곳은 빈민촌이었고 그곳에는 어미 없는 아이가 구걸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회색 눈동자, 에드먼의 기억 속에 바네사와 똑 닮은 얼굴.
바네사를 찾으려 했으나 그녀는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아이는 큰일을 당한 듯 아무런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였고 에드먼은 그 아이를 저택으로 데려왔다.
“각하, 준비를 마쳤습니다.”
에드먼은 상념에 더 깊어지기 전에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
마지막으로 외투를 걸치고 저택을 나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이미 다프네가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에드먼은 멈칫하는 것도 잠시 다프네의 반대편 끝에 앉았다.
“출발하지.”
곧이어 마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다프네와 에드먼은 같은 마차에 올랐지만 출발한 때부터 말 한 번 제대로 섞지 않았다.
“데미안은 현재 신전에 있습니다.”
내내 창문에 있던 다프네의 시선이 에드먼에게 닿았다.
“…신전이요?”
뉴벨 남작 부인에게 들어 데미안이 수도에 있다는 것은 알지만 수도라는 것은 미처 듣지 못한 다프네가 되물었다. 윈터가와 신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데미안 역시 잘 알고 있는 것일 텐데, 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 큰일이라도 당한 건….”
다프네의 생각이 좋지 않은 것에까지 이르러 목소리를 높인 것과 동시에 마차가 돌부리에 걸린 듯 크게 덜컹거렸다. 하필이면 다프네 쪽의 바퀴였던 것인지 몸이 작게 붕 떠오르면서 중심을 잃었다.
“조심…!”
에드먼은 손을 뻗어 다프네의 허리를 감싸 쥐었다. 간신히 천장에 머리를 박는 것을 피한 다프네는 에드먼의 품 안에서 놀란 눈을 깜빡였다.
“…조심 좀 하십시오.”
에드먼은 다프네를 달랑 든 채 원래 자리에 앉혔다. 에드먼이 제자리로 돌아갈 동안 다프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구겨진 옷을 잡아당겼다.
쿵쿵, 아주 잠깐이지만 닿았던 에드먼의 심장 소리는 다프네의 귓가를 어지럽히기에 충분했다.
너무 빠르고, 크게 뛰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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