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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99화 (99/145)

99화

“다프네.”

에드먼은 문을 두들겼다. 그는 좀 더 소리를 높였다.

“다프네.”

방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어가겠습니다.”

에드먼은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다행히 문까지 잠그지 않은 듯 문은 조용히 열렸다.

에드먼은 문을 열며 뒤에 있는 뉴벨 남작 부인을 향해 눈짓했다. 뉴벨 남작 부인은 불안했지만, 그의 말대로 돌아갔다.

에드먼은 한 손에 묽은 수프를 든 채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커튼을 모두 쳐 놓은 탓에 매우 어두웠다.

그러나 에드먼은 기척을 읽으며 손쉽게 다프네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었다.

다프네는 바닥에 앉아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에드먼이 앞에 오고 나서야 그를 돌아보았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빛으로 인해 다프네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가뜩이나 마른 몸은 더욱더 앙상해져 있었다.

“식사를 거부한다고 들었습니다.”

“…데미안은요?”

물 한 모금 먹지 않은 탓에 버석하게 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깨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뭐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물어봐도 얼버무리며 대답을 회피하였고 밖을 나가는 것조차 제한되어 있다.

뉴벨 남작 부인과 기사 둘을 대동하고 나간 밖은 고요했고 적막했다.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유를 물어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분명히 이 일을 지시했을 에드먼을 찾아가려고 해도 바쁘다, 안 된다는 말만 돌아왔다. 그는 의도적으로 다프네를 피하고 있었다.

다프네는 그 후 곧바로 식사를 거부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되던 날이 돼서야 에드먼을 볼 수 있었다.

“다 드신 후에 말하겠습니다.”

“먼저 말해요.”

“다프네.”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다프네는 귀를 틀어막으며 버럭 소리쳤다. 거친 호흡이 헐떡거리면서 어깨가 크게 들썩거렸다.

에드먼이 다프네, 하고 부를 때마다 다프네는 늘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투와 표정, 그 모든 게 다프네는 참기 힘들었다.

“…말해 줘요.”

“그대를 위한 겁니다.”

“난… 난 이런 걸 원한 적 없어요.”

다프네는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다프네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벽과 대화하는 것 같은 갑갑함에 도무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다프네는 숨을 크게 들이셨다가 내뱉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난 당신 때문에 온 겁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당신.”

목이 꽉 막혀 왔다.

“정말로 나를….”

사랑해요?

뒷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는지 아니면 속으로 말한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확인할 수 있는 건 에드먼이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다프네는 침대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중심을 잃은 몸이 비틀거리자 에드먼이 손을 뻗었지만 다프네는 그의 손을 피해 몸을 돌리며 주춤거렸다.

“…….”

“…….”

다프네는 허공에 멈춰 선 에드먼의 손을 혼란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뒤로 물러났다.

“…쉬세요.”

에드먼은 식은 수프를 도로 챙긴 후 방을 나갔다.

다프네는 문이 닫히고 에드먼이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동굴 속에서 했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말도… 안 돼.”

다프네는 주춤거리다가 그대로 침대에 털썩 앉았다.

“…하.”

다프네의 입가에 조소가 맺히는 것과는 다르게 볼을 타고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다프네는 눈물을 닦지 않고 멍하니 내버려 둔 채 눈을 깜빡였다. 5년 동안 간절히 원하고 또 원했던 순간임에도 마음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마음을 대변하듯 조소를 머금은 얼굴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프네는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에드먼은 다프네를 사랑한다.

다프네가 더 이상 그의 사랑을 원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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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발걸음 소리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데미안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시선을 돌렸으나 힘없이 처진 고개는 좀처럼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발걸음은 데미안의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성, 성녀님!”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주술사가 화들짝 놀라며 헐레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언제 오셨습니까. 오시기 전에 기별이라고 좀….”

“아직도 안 됐나 보네.”

바네사는 주술사의 말을 끊고 데미안의 턱을 들어 올렸다.

배려 없는 손짓에 데미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것이… 이상하게 잘 먹히지 않습니다.”

“내가 분명 손을 써 놨는데… 설마 얘인가… 그건 아닌데.”

바네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데미안을 살피다가 고개를 내려놓았다.

“나가 봐.”

“예, 예!”

주술사가 나가자 바네사는 데미안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아들아.”

그 단어에 데미안의 어깨가 흠칫했다.

“견딜수록 너만 힘들어진단다.”

바네사는 데미안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데미안은 바네사의 손을 피하려고 했으나 그녀가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고 얼굴을 들어 올리는 게 더 빨랐다.

바네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렇게 버티지? 그냥 남에게 맡기는 게 얼마나 편한데?”

바네사는 다른 손으로 데미안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넌 참 나를 많이 닮았단다, 아들아.”

“…놓으십시오.”

며칠 동안 양팔이 묶인 채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데미안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 나갔다.

“내가 찾아오는 것도 마지막일 거다. 이 어미가 요즘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바네사는 뒤돌며 주술사에게 손짓했다.

“한 번 더 시도해 봐. 그리고 안 되면….”

바네사는 흘끔, 데미안을 돌아보았다.

“날 부르고.”

“예, 예. 알겠습니다.”

주술사는 허리가 굽어질 듯이 굽혔다. 바네사가 떠나고 주술사는 땅에 닿도록 숙였던 머리를 들어 올렸다. 주술사의 얼굴은 미소가 가득했다.

“하, 내가 무슨 복을 받았길래 성녀님과 이렇게 오래 대화를 나눈 것인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어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주술사를 보며 데미안은 눈을 깜빡였다.

데미안이 정신을 잃고 깨어난 곳은 지하였다. 곳곳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난무하는 지하의 용도는 뻔했다.

주술사는 데미안에게 몇 번이나 흑마법을 시도했으나 이상하게 통하지 않았다.

정신력이 너무 강하거나 근접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이는 간혹 흑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데미안은 자신의 정신력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넌 감사히 여겨라. 그분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매일같이 찾아오시니까. 그게 어디 흔한 일인 줄 알아? 저분이 요즘 얼마나 바쁘신데!”

주술사는 혀를 쯧쯧, 찼다.

“황실도 손안에 넣으셨겠다, 이제 윈터 공작가를 처리할 차례인가.”

주술사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단어에 데미안은 고개를 번뜩 들었다.

“그게, 무슨….”

“아, 깜짝이야!”

주술사는 혼자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에드먼이 말을 하자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너도 검은 머리카락에 회색 눈이네….”

주술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모른다고?’

생각해 보니 주술사는 데미안을 본 순간부터 그랬다. 무언가 아는 게 없어 보이고, 상식을 덜 배운 것처럼 행동한 적이 여러 번이다. 마치 어렸을 때부터 어딘가에 고립되어 큰 것처럼.

데미안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어디 시작해 볼까?”

주술사는 두 눈을 감고 흑마법의 주문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들아, 하는 바네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기에 데미안은 입술을 거세게 깨물었다.

“데미안.”

대신 다프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왠지 고통이 덜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데미안도 대충 상황을 알고 있다. 황제가 어떤 상태인지. 윈터 공작가에게도 피해가 갈 것이라 생각하긴 했으나 그것이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미처 몰랐다.

데미안은 밀려오는 고통에도 입을 꾹 다문 채 단 하나만 생각했다.

‘어머니.’

당신은 이것보다 더 고통스러우셨겠죠. 그러니 견디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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