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뒷덜미에 솜털이 쭈뼛거리며 섰다. 알렉은 소름이 돋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물의 수가 수천이었으니 오러를 사용해 처리했다면 당연히 그만큼 재도 많이 나왔을 것이다.
꼬박 하루가 걸리는 거리에 걸쳐 올 정도로 재가 나왔다는 뜻이었기에 알렉은 마른침을 삼켰다.
알렉은 문득 의아함이 들었다.
‘그런데 왜….’
멀쩡하시지?
일정량을 넘기면 에드먼은 폭주를 하게 된다. 때문에 에드먼은 알아서 조절해 가며 사용했는데, 알렉이 아는 마지노선으로는 그 수많은 마물을 처리하지 못한다.
그러나 에드먼은 모두 처리해서 무사히 돌아왔고 멀쩡했다.
‘그 양이 더 늘어난 건가?’
알렉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달라졌어.’
알렉이 그런 의문을 품은 한편 에드먼은 자신의 텅 빈 손목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에드먼은 자신이 오러를 직접 컨트롤할 수 있는 마지노선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웬만해서는 결단코 그 근처에도 도달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직접 간 그곳에는 알렉의 말대로 수천 마리의 마물이 있었다.
오러 없이 저 마물을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처음에는 마력석을 이용했다. 그러나 그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에드먼은 마력석 복용을 멈추고 오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마물이 하나둘 재로 사라질 때마다 마지노선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에드먼은 곧바로 몸을 숨겼다.
시간은 아직 남았으니 하루에 일정 수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비록 마물은 여전히 많았으나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고, 여드레가 되었다.
고작 하루 만에 몸 상태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으니 한계선에 다다랐고 마물의 수는 눈에 띄게 달라진 게 없었으며 시간은 더 이상 정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촉박해진 에드먼은 자신도 모르게 무리하였고 그 마지노선에 발 하나를 걸쳤다.
그리고 그 순간.
눈을 깜빡이는 것과 동시에 몸 안에 있던 오러가 터져 나왔다.
에드먼은 뒤늦게 오러를 다시 몸 안에 담으려 했으나 검은 아지랑이가 가까이에 있는 마물을 집어삼키는 것이 더 빨랐다.
아주 오랜만에 밖으로 표출된 오러를 제어하기란 쉽지 않았다.
에드먼은 폭주라도 하게 될까 오러를 갈무리하는 데 집중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겨우 진정된 오러를 묶어 둔 후 주위를 살폈다.
“…….”
고작 한 시간 만에 지난 일주일 동안 처리한 수만큼 줄어든 광경이 보였다.
에드먼은 산을 쌓은 재 탓에 탓해진 시야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바닥에는 끊어진 팔찌가 보였고 자신은 멀쩡했다.
그는 천천히 오러를 풀었다. 검은 아지랑이는 다시금 날뛰기 시작했고 자신이 폭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했다. 남은 수천 마리의 마물을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하루였다.
에드먼은 대마법사가 남기고 간 팔찌를 손목에 채웠다. 오러가 억눌러지는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를 어색함에 팔찌를 찬 손목을 매만지던 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에드먼은 대답했다.
“들어와.”
“각하.”
뉴벨 남작 부인이었다.
“마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이르군.”
아직 반나절밖에 흐르지 않았다. 적어도 하루 정도 걸릴 것이라 예상했기에 일렀다.
“몸의 큰 이상은 없으세요. 말도 잘하시고 평소와 다를 게 없으십니다. 그런데….”
뉴벨 남작 부인은 머뭇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현재 상황을 궁금해하셔서 설명해 드렸습니다. 문제는… 소공작님이 어디 있냐 여쭤 보셨는데 당황한 나머지 답을 하지 못했더니….”
“…대충 눈치챈 모양이군.”
“예. 제 불찰입니다.”
뉴벨 남작 부인은 허리를 숙였다.
다프네가 마지막으로 본 데미안은 의식이 없었으니 그의 상태가 궁금했을 게 당연했다.
그러나 뉴벨 남작 부인은 순간 놀란 나머지 횡설수설거리며 말을 돌리고 말았고 다프네가 눈치를 챘다.
“일단 숨길 수 있을 때까지 숨겨.”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몸 상태도 아직 불안정하고, 별로 좋지도 않은 이야기를 전해 봤자 득될 것은 없다.”
“…알겠습니다.”
뉴벨 남작 부인은 이내 물러갔다.
에드먼은 자신의 손을 쥐었다가 폈다. 방금 자신이 한 변명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에드먼은 다프네가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지난 5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자신만을 바라보면서 늘 같은 자리에 있기를 바랐다.
다프네는 고작 몇 달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던 다프네는 최소한 안전했다. 그녀 본인은 숨 막혔을지 몰라도 그건 사실이었다.
욕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에드먼은 그 욕심을 차마 저버릴 수 없었다. 도무지.
***
“소공작님이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어느 마차에 스스로 올라타셨고 추적 중입니다만… 이상하게 마차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틀 후, 데미안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데미안이 어느 고급스러운 마차에 올라탄 후 자취를 감추었다. 검은 기사단의 기사가 고작 마차 하나를 못 따라잡을 리 없으니 다른 방법을 이용해 그들의 눈을 피했을 것이다.
“검은 기사단을 더 보내고 닉의 길드를 통해 정보를 입수해.”
“예, 알겠습니다.”
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품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황태자 전하께서 각하께 전달하라 하신 편지입니다.”
에드먼이 편지를 뜯어 읽어 내리는 사이 요한은 유레이트가 보낸 편지의 내용을 직접 전달했다.
“블레드 후작이 완전히 황실을 장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황태자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아무래도 블레드 후작이 따로 손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황제의 상태는 악화되어 뮤트 백작님께서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화를 내기 일쑤였고 갈수록 애첩을 찾는 횟수가 늘더니 이내 애첩을 황후로 들인다며 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 탓에 베벨록이 공작이 크게 분노하여 황제를 찾아갔다가 지하 감옥에 갇히는 일도 발생했다.
“아무래도 베벨록 공작이 단둘뿐인 공작 중 하나인 만큼 귀족들 사이에서도 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귀족들은 하나둘 불안감에 떨기 시작했다.
황제가 욕심이 많고 정무를 잘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지금까지 쭈욱 황족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일은 눈치가 빠르고 현명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베벨록 공작을 지하 감옥에 가뒀다는 것은 귀족들에게 큰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기둥이라고도 불리는 공작을 그렇게 쉽게 지하 감옥에 가둬 버리니 황제파 귀족파 할 것 없이 모두가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베벨록 공작이 처리되었으니 다음 차례는 저희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각하.”
전쟁할 때 주로 쓰는 방식이 있다. 굳이 수천, 수만 명의 기사들과 싸우지 않고 그들의 우두머리를 처리한다. 그렇다면 남은 기사들은 사기를 잃고 적에게 항복한다. 위시드는 그 방법을 쓰려는 게 분명했다.
에드먼은 칼리토의 편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살아 계시다.”
그 말에 요한은 크게 안도했다.
아무리 실종됐다는 황태자에게 편지가 왔다고 했지만, 그의 부고 소식을 알리는 내용일 확률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숨어다니시며 귀족들을 설득 중이라더군.”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이시군요.”
“…뮤트 백작과 연락을 닿게 해라. 그가 전하께 도움이 될 테니.”
머뭇거리던 귀족들도 유레이트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을 바꿀 것이다. 그만큼 유레이트가 주는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가 자취를 감춘 지 십몇 년이 흘렀어도 언제나 그가 있던 때를 그리워하는 귀족들이 상당하다.
“그리고 신전에서 곧 성녀의 등장을 공표할 것 같습니다.”
“진짜 성녀가 맞았던 거군.”
“예.”
성녀를 떠올리며 에드먼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신전과 블레드 후작의 접촉이 있었습니다.”
“정확히 누구와?”
신전은 현재 대신관과 신관들로 나누어져 있다.
그들의 예상대로 대신관은 성녀의 등장을 반기지 않았고 신전은 두 팔 벌려 뛰어나갔다.
“둘 다입니다. 서로 그것을 모르고 있는 눈치이고요.”
신전은 완전히 세르기의 손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더군다나 황실도 완전히 그에게 넘어가게 생겼으니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었다.
“그리고….”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요한의 말을 끊었다.
평소였다면 보고를 우선시했겠지만 에드먼은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문을 열었다.
“각하….”
뉴벨 남작 부인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에드먼을 바라보았다.
“…오늘도인가.”
“예.”
뉴벨 남작 부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에드먼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가 놓았다.
“…내가 가지.”
다프네가 식사를 거부한 지 벌써 이틀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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