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마님이 사라졌다-96화 (96/145)

96화

대마법사를 둘러싼 소문은 수없이 많다. 그중 가장 근거 있는 것은 대마법사가 다섯 영웅 중 살아 있는 유일한 이라는 것이다.

대마법사는 대전쟁이 끝나고 평화를 되찾아 갈 때쯤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몇 년, 혹은 몇십 년에 한 번씩 그를 목격했다는 증거가 대륙 곳곳에서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한평생 만나기는커녕 소식 한번 듣기 어렵다는 대마법사를 윈터가의 사람은 제법 많이 보는 편이었다.

“어떻게….”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는 대마법사를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닉은 그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제가 수소문으로 찾아 도착한 곳에서 대마법사님이 잠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정말 그저 운이 따라줬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요한은 이 상황이 얼떨떨했지만 일단 예의를 차렸다.

“오랜만입니다, 대마법사님.”

요한이 살아오면서 네 번째로 보는 대마법사는 여전히 젊은 모습 그대로였다.

노인의 백발 같은 흰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대마법사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이들의 인사를 받았다.

“상황은 대충 전해 들었는데.”

지나치게 무미건조하고 일말의 감정이 섞여 들어가지 않은, 마치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마법사는 눈가를 좁혔다.

“공작이 아니라 다른 이의 상태가 더 심각해 보이는구나.”

그의 말에 요한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닉이 대마법사를 찾으러 갔을 당시는 그저 불완전한 그의 힘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대마법사가 다프네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

“대마법사님.”

요한은 그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보여 드릴 분이 있습니다.”

대마법사는 앞장서라는 의미로 턱을 까딱였다.

요한은 그의 앞에서 걸으면서도 흘끔거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대마법사는 늘 어려운 존재였고 생각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때로는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한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 근육을 풀기 위해 일부러 말을 걸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시며 지내셨습니까? 마지막으로 뵌 게 벌써 몇 년 전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흐른 건가….”

대마법사는 중얼거렸다.

“누군가를 찾고 있었네.”

“누구를 말입니까?”

정착하지 않고 계속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는 대마법사가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은 처음 보았기에 저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여기인가?”

대마법사의 다음 말에 집중하느라 다프네의 방을 지나쳤다. 그러나 어떻게 안 것인지 대마법사가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 예. 맞습니다.”

요한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가 문에 손을 대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대마법사가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의 마법이라는 것을 뒤늦게 안 요한이 놀라 굳어 있던 것도 잠시 그를 따라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준 얼음석으로 생체 기능을 잠시 멈춰 놨구나.”

“심장이 멈춘 후에 한 것이라 효과가 미미합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

대마법사는 다프네의 이마 위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언제부터 이랬지?”

“아직 한 달은 안 됐으나 몇 주 됐습니다. 갑자기 쓰러지셨고 심장이 멈추셨으나 신성력이 든 마력석으로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신성력?”

“예. 각하께서는 설산에 묻혀 있는 거대한 마력석을 가지러 가셨고요.”

“그 아이가 직접?”

대마법사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어쨌든 정확한 원인을 모른다는 거군.”

“그게, 실은 성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좀 나아지시나 싶었는데 갑자기 상태가 악화하실 줄은….”

대마법사는 이마에서 손을 떼며 상체를 일으켰다.

“흑마법에 걸렸어.”

“…예?”

“그것도 아주 지독한 이의 깊은 원한이 담긴 저주구나.”

대마법사는 다프네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저택에 들어올 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더니 역시나 흑마법이었다. 오랜만에 접한 흑마법은 그가 본 것들 중에서도 악질이었다. 적어도 십 년은 넘은 원한이 깃든 흑마법이 영혼과 심장을 꽉 붙들고 있다.

얼음석이 없었다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부터 내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여라.”

“말씀하십시오.”

“내가 나오기 전까지 그 누구도 방에 들이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대마법사는 로브를 완전히 벗자 순식간에 허공에서 사라졌다.

“…가능할까요.”

그 물음에 대마법사는 다프네를 보며 말했다.

“가능해.”

그 확신에 찬 말에 요한은 안도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허리를 푹 숙인 요한은 방을 나왔다.

문이 닫히고 철컹, 하며 잠금이 걸렸다. 요한은 굳게 닫힌 방문을 보곤 이내 뒤돌아갔다.

***

“아아!”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아악!”

아까보다 더 크고 고통에 찬 비명이 또 울리자 뉴벨 남작 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못 참겠어요.”

“부인.”

“벌써 이틀째예요!”

뉴벨 남작 부인은 숨을 토해 내듯 소리쳤다.

저 비명이 들리기 시작한 지 이틀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밤낮 할 것 없이 저택을 가득 채웠기에 모두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창백한 얼굴이었다.

“마님이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그러면 어떡해요!”

“대마법사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누구도 들여보내면 안 된다고.”

요한은 침착하게 뉴벨 남작 부인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그녀는 핼쑥해진 얼굴로 외쳤다.

“그렇다고 마님이 고통받으시는 걸 지켜보고만 있으라고요? 난, 난 그렇게는 못 해요.”

뉴벨 남작은 제 부인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괜찮을 거요. 설령 부인의 말대로 마님께서 잘못되셔도 오늘은 각하께서 돌아오시는 날이지 않소.”

“하지만….”

“각하를 믿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가만히 있는 겁니다.”

뉴벨 남작 부인은 결국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돌아오실 거예요. 아무렴요. 꼭 돌아오실 거예요….”

그녀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요.”

뉴벨 남작 부인은 숄을 챙겨 비틀거리며 밖으로 향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자 그제야 정신이 좀 멀쩡해졌다. 뉴벨 남작 부인은 숨을 내뱉었다가 크게 들이마셨다.

어느새 하늘에서는 해가 지고 있었다. 돌아오실 거라고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에드먼이 돌아와야 하기야 돌아올 거라고 했을 뿐, 그녀 역시 초조했다.

“각하….”

부디 돌아와 주세요.

뉴벨 남작 부인은 두 손의 깍지를 끼고 간절히 중얼거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감고 있던 눈을 뜬 뉴벨 남작 부인은 어느 정도 진정되자 돌아서려고 했다.

저 멀리, 검은 형체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각하?”

뉴벨 남작 부인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각하!”

에드먼이라는 것을 확신한 뉴벨 남작 부인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발이 눈에 푹푹 들어가 몸이 휘청이는 것도 개의치 않으며 달려갔다.

“남작 부인.”

“오, 오셨군요. 오셨어요. 역시 돌아오셨어요….”

익숙한 목소리에 뉴벨 남작 부인의 긴장이 확 풀리고 말았다.

에드먼은 가까이 다가오는 뉴벨 남작 부인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피 냄새가 많이 난다. 가까이 오지 마.”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말하려던 찰나였다.

에드먼은 저택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마법사?”

“네, 네. 닉이 대마법사님을 모셔 왔습니다.”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였다.

“아아악!”

크게 울리는 비명에 에드먼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소리지?”

“그것이….”

짧게 들린 그 목소리가 익숙했기에, 에드먼의 심장이 불안감을 느끼고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에드먼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뉴벨 남작 부인은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각하!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각하!”

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뉴벨 남작 부인은 곧바로 저택으로 들어왔으나 에드먼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각하께서 돌아오셨습니까?”

그녀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우르르 사람들이 나왔다.

“각하가 마님께 갔습니다! 빨리 막아야 해요!”

“젠장.”

상황을 파악한 알렉이 작게 욕을 중얼거리며 뛰었다.

“각하!”

온 힘을 다해 뛴 덕에 이제 막 방 앞에 도착한 에드먼과 마주할 수 있었다.

“문 여세요.”

에드먼은 어깨를 거칠게 들썩이며 문을 두들겼다.

“각하, 안 됩니다. 부디 조금만 더 시간을 가지고….”

“아아아!”

알렉의 말을 끊고 바로 문 너머에서 비명이 한 차례 더 울렸다. 알렉은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우지끈,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에드먼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쯧.”

그 안에는 바닥에 앉은 대마법사가 혀를 차며 에드먼을 흘겨보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경고했거늘.”

대마법사는 미련 없이 에드먼을 지나쳤다.

에드먼의 시선은 오직 다프네에게 향해 있었다. 눈을 감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던 다프네의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에드먼?”

잔뜩 쉰 목소리로, 다프네가 에드먼을 불렀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