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요한 님.”
“벤트.”
벤트가 이른 아침부터 찾아오자 요한은 의아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소공작님께서 넘기라 한 서류가 있어서요.”
벤트는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게 웃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벤트는 곧바로 방을 나왔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여기는 것도 잠시, 요한은 벤트가 놓고 간 서류를 집어 들었다.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요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갔다. 요한은 잘게 떨리는 손으로 설렁줄을 거칠게 몇 번 흔들었다.
“부르셨습니까.”
수하의 등장에 요한은 소리쳤다.
“시녀장과 시종장을 불러와, 당장!”
저택은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시녀장과 시종장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다가 난데없이 요한의 부름을 받고 쏜살같이 달려왔다.
“요한 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시녀장은 애써 웃으며 말하고 있었으나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서 있는 이들에 욕을 중얼거렸다.
‘망할. 이 양반들이 왜 다 모여 있는 거야?’
벤트와 벤자민, 뉴벨 남작과 그의 부인까지 있었다.
‘설마….’
퇴직금을 더 주려는 걸까? 시녀장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하기야, 자신의 퇴직금은 한평생을 이 저택에 바친 이에게 주는 금액치고는 너무나 적었다. 비록 그 금액이 약 3년 연봉이 육박했지만 시녀장의 욕심에는 채워지지 않는 수치였다.
‘그럼. 내가 몇십 년 동안 이곳에서 충성을 다했는데.’
행복한 상상에 빠진 시녀장과 달리 시종장의 안색은 창백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시종장은 혼미 백산이었다. 짐을 챙길 겨를도 없이 방을 모조리 뒤졌다.
서류가 사라졌다. 자신과 시녀장의 비리의 증거로 빼돌린 서류가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모조리 사라졌다.
요한은 둘의 앞에 서류 한 뭉텅이를 던졌다.
“확인해 봐라.”
“이것이 무엇이길래….”
자신의 미래를 직감한 시종장은 두 눈을 질끈 감았고 시녀장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한 채 서류를 주섬주섬 챙겨 읽기 시작했다. 시녀장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건….”
다프네의 품위 유지비를 전부 가로채고 상인들이 올 때마다 보석을 산 후 그 값을 모조리 마님의 앞에 단 것까지. 이 외에도 다양하고 자잘한 비리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모, 모함입니다.”
시녀장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벤자민 님은 아시잖아요! 제가 윈터가에 얼마나 오랫동안 일했는지!”
“그 긴 시간 동안 비리를 저질렀을 줄 몰랐네만.”
벤자민은 차가운 얼굴로 시녀장을 외면했다.
“그대들은 분명 마님이 보석을 사들였다고 말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게 무엇이지?”
뉴벨 남작을 물음에 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몸을 덜덜 떨었다.
“당장 끌어내!”
기사들의 손에 시녀장과 시종장은 무력하게 끌려 나갔다.
화가 채 가라앉지 않은 뉴벨 남작은 소리쳤다.
“그리고 뭐? 모두가 마님의 전속 시녀를 자처해? 거짓말도 정도껏 하지.”
“…요.”
이미 암담한 미래를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시녀장은 문득 억울해졌다.
“그럼 당신들과 내가 어디 달라요?”
“…….”
“당신들도 마님을 싫어했잖아! 무관심했으면서 인제 와서 착한 척하기는!”
시녀장은 속에 담아 뒀던 말을 토해 냈다.
“내가 마님에게 한 짓은 관심을 준 것이죠. 당신들은 뭘 했는데? 무시하고 외면하고 무관심하고! 당신들은 내게 이럴 자격이 없어!”
시녀장은 번뜩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자각했다.
“아….”
시녀장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드는 것과 동시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 그러니까. 제가 하려는 말은…!”
시녀장은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문이 닫혔다. 시녀장의 외침이 복도에 한가득 울려 퍼졌다. 그들이 사라졌음에도 방 안에는 그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시녀장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아주 조금의 관심이 있었더라면 알 수 있던 것들이다.
이것을 5년 동안 몰랐다는 건 그만큼 무관심했다는 뜻이었기에, 방 안은 한동안 침묵으로 채워졌다.
여러모로 바쁜 날이었다.
시녀장과 시종장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북부에서 추방한 후에야 그들은 데미안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혼란스럽게 움직이는 가운데 벤트가 입을 열었다.
“소공작님은 사라지신 게 아니라 떠나신 겁니다.”
그의 마지막을 자신이 배웅했다며 벤트가 나섰다.
그래도 손을 놓을 수 없는 노릇이기에 벤트에게 간곡히 부탁하여 목적지가 수도라는 것을 알아낸 후 사람을 보냈다.
그저 데미안의 소식을 전해 듣기 위함으로 보낸 것이었다.
요한은 사람을 보내고 유레이트에게 데미안을 보았거나 소식을 들으면 알려 달라는 내용을 담아 편지를 보냈다.
일주일.
에드먼이 말한 기간까지 일주일이 남은 시점이었다.
***
ㅎㅂㄹㄱ.공금
데미안은 수도로 올라오자마자 보게 될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늦게 바네사를 만나게 되었다.
“열흘 만이구나. 잘 지냈니?”
홀로 북부를 건너 수도로 올라온 데미안의 얼굴은 매우 거칠어져 있었다.
“…북부로 내려온 이유가 뭡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다. 사생아였으나 윈터가의 핏줄이 귀하니 남자로 키워졌다가 새로 태어난 아이에 의해 버림받은 바네사.
그녀가 윈터가에서 가지고 있을 감정은 단 하나였다.
복수.
데미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바네사의 미소가 짙어졌다.
“네 머릿속에는 이미 결론이 난 것 같은데. 아닌가?”
그 말에 데미안의 어깨가 흠칫했다.
“근데 아니니깐 걱정 마렴.”
바네사는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복수 같은 하찮은 게 아니야.”
그럼 무엇이냐고 물으려던 찰나였다.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바네사는 밖을 향해 턱짓했다.
데미안은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하지 않니? 이런 마차는 또 어떻게 타고 있는지 말이야.”
바네사와 데미안이 타고 온 마차는 공작가에 준하는 수준의 화려한 마차였다.
마차에서 내린 데미안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신전?’
마차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신전이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나와 있던 고위 신관 다섯이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허리를 푹 숙였다.
“오셨습니까, 성녀님.”
신관의 말에 데미안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나 목에서 무언가 따끔거리는 게 느껴지는 것이 더 빨랐다.
“떠나기 전 내가 한 말이 있지.”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한 가지 비밀을 말해 주마.”
데미안은 시야가 흐릿해지고 몸에 힘이 빠지자 눈을 더 부릅떴다.
“넌 내 완벽한 피조물이란다.”
바네사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와 똑 닮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내 아들아.”
데미안은 끝내 정신을 잃었다.
***
“아흐레째입니다.”
에드먼이 떠난 지 아흐레라는 시간이 지났다.
“…열흘이 지난 후라고 하셨으니 이틀은 돼야 합니다.”
“무슨 일이라고 생기신 거라면 차라리 하루라고 먼저 가는 게 낫지 않습니까.”
알렉의 주장은 이러했으나 요한은 안 된다면 막아섰다.
“그건 각하를 향한 믿음을 의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알렉 경.”
“믿음보다 각하가 더 중요합니다!”
알렉은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제 의견에 찬성하는 분 없습니까?”
“…저요.”
손을 든 이는 뉴벨 남작 부인이었다.
“마님의 상태가… 좋지 않아요. 얼음석의 효력이 곧 바닥을 드러낼 것 같아요.”
아무리 많은 양이어도 작은 마력석으로는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다.
계속 시도해 보았지만 다프네의 몸이 마력석에 있는 신성력을 밀어내기만 했다. 그렇게 낭비된 마력석이 수십 개였기에 뉴벨 남작 부인의 얼굴 위로 초조함이 깃들었다.
“알렉 경의 말대로 지금이라도 사람을 보내서 각하를 도와야 해요.”
“부인.”
뉴벨 남작은 제 부인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떨리는 어깨를 토닥였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시간만 흘러갔다. 해가 지고, 밤이 될 무렵이었다. 그들이 모여 있던 방이 벌컥 열렸다.
로브를 뒤집어쓴 두 명의 사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누구냐.”
알렉은 제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이상한 점은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음에도 둘의 로브는 눈이 녹은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접니다.”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로브를 벗었다.
“대마법사님을 모셔 왔습니다.”
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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