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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94화 (94/145)

94화

홀로 남은 방 안에서 벤자민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데미안이 나가고 타온 차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어떻게 알게 되신 걸까.’

비록 마지막 남은 것은 자신이 감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여 남게 두었다.

벤자민은 차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어색하게 내려다보았다. 옷매무새를 확인하기 위해 매일 아침 거울을 보지만 이렇게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오랜만인 것 같았다.

주름진 얼굴과 흰 수염과 머리카락. 자신은 많이 늙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충성을 다한 윈터가의 집사, 벤자민.

벤자민은 이 저택에서 일어난 수많은 비밀을 직접 보고 듣고 느꼈다. 벤자민은 충직한 집사였고 입이 무거웠다. 그가 노년의 집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본 것을 입에 담지 않고 들은 것을 보려 하지 않았으며 느낀 것을 무시했다.

“이제부터 내 아들, 데미안이다.”

네다섯 살 정도 되는 아이가 처음 저택에 왔던 때가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그려지는데, 어느덧 십 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벤자민은 식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이제는 숨길 수 없는 것인가.’

언젠간 말해야 할 비밀이었다. 벤자민은 애써 자신을 스스로 다독이며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데미안은 방으로 돌아왔다.

“그분은 전 윈터 공작님의 사생아셨습니다.”

벤자민은 데미안의 말에 전혀 놀라는 기색 없이 마치 때가 왔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하룻밤에 실수로 생긴 아이였으나 당시 전대 공작님은 아이가 절실했습니다. 결혼 8년 차에도 아이가 들어서지 않으셨지요. 그분을 사내로 키우셨습니다. 5년 후 각하께서 태어나셨고 바네사 님은 어딘가로 떠나셨습니다. 그게 답니다.”

덤덤하게 읊조린 말을 끝으로 벤자민의 말이 종지부를 찍었다.

벤자민 역시 그 후의 행적을 모른다 덧붙였다. 그는 바네사가 죽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녀를 살리고 싶다면 오늘 밤, 저택을 나오렴.

짧은 문구 아래 ‘바네사가.’라는 글귀가 보였다. 까마귀가 전달한 편지의 내용이었다.

그녀, 라는 단어는 다프네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바네사는 다프네의 현재 상태에 대해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신다고 해도 확신할 수 없어.’

마력석은 그저 생명을 연장하는 도구일 뿐, 몸을 완전히 회복시키지 못한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데미안은 몸을 일으켜 외투를 꺼내 입었다.

고요한 저택에서 데미안의 발걸음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데미안이 향한 곳은 시종장의 방이었다. 기름칠을 아끼지 않은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잠에 흠뻑 취한 시종장을 지나쳐 책상 아래 서랍을 천장을 더듬자 두툼한 서류가 만져졌다.

데미안은 달빛에 의지하여 서류를 읽었다. 시종장과 시녀장이 그동안 저지른 비리가 빼곡히 적혀 있는 서류였다.

데미안은 그것을 챙겨 벤트의 방에 두었다. 벤트는 똑똑하니 별다른 쪽지를 남기지 않아도 그의 뜻대로 움직여 줄 것이다.

이제 정말 끝이다.

“…….”

그러나 저택을 떠나려는 데미안을 붙잡은 것은 달빛에 반짝이는 작은 호수였다.

데미안은 호수에 가까이 가 외투를 벗었다.

검을 빼 들어 충격을 가하자 두꺼운 얼음이 쩌적, 하고 갈라지면서 호수 표면을 덮고 있던 얼음이 순식간에 분리되었다.

데미안은 망설임 없이 호수로 뛰어들었다.

풍덩.

귀를 때리는 차가운 물살을 가로질러 데미안은 저 깊은 아래로 헤엄쳤다. 꽁꽁 얼어 있던 물은 당연히 차가웠고 순식간에 손과 발의 감각이 무뎌졌다. 그러나 데미안은 멈추지 않았다.

더, 더, 더.

데미안은 몇 분이 흐른 후에야 표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참았던 숨을 터트린 데미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 팔을 뻗었다.

그의 손에는 로켓이 있었다. 데미안은 차가운 손으로 로켓을 열었다.

“…….”

다프네의 초상화가 멀쩡히 있었다. 데미안은 속으로 안도하며 로켓을 꽉 쥐었다.

그가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털고 외투를 걸치던 때였다.

“소공작님.”

갑작스레 들려오는 소리에 몸을 돌리자 익숙한 이가 보였다.

“…왜 나왔어.”

데미안은 마저 외투를 입으며 말했다.

벤트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가 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가 막아도 소공작님은 가시겠죠.”

“…….”

그의 말이 맞다.

데미안은 만약 벤트가 도중에 일어나 자신을 붙잡더라도 그대로 떠났을 것이다.

“제가 소공작님과 함께한 시간이 몇 년인데요.”

벤트는 작은 짐가방을 꺼냈다.

그의 예상대로 데미안은 달랑 몸 하나 들고 나가려는 셈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론 이걸 드리기 위해 왔어요.”

벤트가 마지막에 내민 것은 검이었다. 다프네가 주었던 그 검.

“내가 분명….”

“네네, 버리라고 하셨죠. 하지만 어떻게 버릴 수 있겠어요.”

마님이 소공작님께 주신 건데.

벤트는 데미안의 손에 억지로 검을 쥐여 주었다.

“그리고 이 검과 펜을 만든 사람 있잖습니까. 그냥 어느 시골 마을에 대장장이였습니다.”

“…뭐?”

달빛 아래 검은 섬세하게 빛났다. 도무지 무명 대장장이의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보니까 윈터가에서 후원하는 이 중 한 명이더군요. 마님께서 그걸 아시고 방문해서 만든 것 같습니다. 어찌나 말로 꼼꼼하게 설명하시던지, 대장장이가 검을 만들 때 자연스레 소공작님의 모습을 연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어떤 대장장이에게 갔더라도 분명 명작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검이 잘게 떨렸다.

데미안은 흐린 눈으로 검을 내려다보았다.

“…소공작님, 마님께 들렀다 가세요.”

“…….”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마님은.”

벤트는 데미안의 등을 떠밀었다.

데미안은 며칠 동안 열지 못했던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문이 열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다프네와 가까워졌다.

“…어머니.”

마침내, 데미안은 다프네의 앞에 섰다.

다프네의 앞에 섰지만,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데미안은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을 생각 없이 내뱉었다.

“…당신이 사라지는 게 소원이라는 말, 거짓이었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맡긴 당신이 그 말을 들었을 때 왜 웃었는가. 차라리 욕을 하고 뺨을 때리고 화를 냈다면.

당신이 왜 그때 웃었는지 아직도 갈피를 찾기 힘들었다.

그런 사람이다, 당신은.

어렵고, 속마음을 모르고… 한순간 미련 없이 훌쩍 떠나 버릴 것 같은 사람.

“그간 내뱉은 말 모두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모진 말을 할 때면, 다프네는 해명을 하려 했다.

그때마다 사실 데미안은 만족했다.

당신이 그런 반응을 보일 때마다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안도했다. 그래서 더 모질게 대했다.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사실은 당신이 단 한 순간이라도 진심으로 미웠던 적 없다.

작은 손에 상처가 나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따온 꽃을 다프네가 바닥에 던졌을 때도, 옷자락을 쥔 손이 내쳐졌을 때도.

절벽으로 떨어질 때 내 손을 잡은 당신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저는 겁쟁이였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버리고 그런 수모를 겪은 것입니까.

데미안은 입 안에 맴도는 말을 끝내 내뱉지 못했다.

그 대신 데미안은 굳은 결심이 깃든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제가 어머니를 붙잡겠습니다.”

어머니가 몸을 내던져 나를 붙잡았을 때처럼.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잡겠다 다짐했다.

데미안은 무릎을 꿇고 자신보다 더 차가운 다프네의 손을 쥐었다. 조금이라도 온기를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두 손으로 그 차디찬 손을 감쌌다.

데미안은 차마 입을 맞출 수 없다는 듯 다프네의 손등에 이마를 댔다.

다시 다프네의 손을 가지런히 모은 데미안은 온실에서 따온 들꽃 한 무더기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기다려 주세요, 어머니.”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것을 나중으로 아껴 두었다.

다프네가 깨어나면 그때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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