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벤트의 일상은 단조롭다. 이른 시간 눈을 뜬 벤트는 몸을 씻고 옷을 입고 데미안의 집무실로 출근을 한다.
벤트는 성실하고 일을 꽤 잘하는 수하였고, 데미안은 일 처리가 빠른 상사였다. 그렇기에 벤트는 자신이 맡은 일에 큰 불만 없이 데미안과 몇 년 동안 같이 일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벤트는 집무실에 들어가기 전 한숨을 내쉰다. 문고리를 내려다보는 벤트의 눈가가 흐릿해졌다.
벤트는 문을 열었다. 텅 빈 집무실을 보며 벤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던 찰나였다.
문이 열리고 젖은 머리카락의 데미안이 들어왔다.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잠깐 몸 좀 풀었다.”
“…안 주무셨습니까?”
벤트는 거뭇거뭇한 눈 밑을 발견하고 물었다. 데미안은 자리에 앉은 후 대답했다.
“잠이 안 와서.”
벤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벌써 이틀째입니다.”
데미안이 잠은커녕 밤을 새워 가며 서류를 본 지 이틀째다. 벤트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데미안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자신을 한계치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저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기에 벤트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데미안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렇게 급한 서류가 있는 게 아닌데도 다 끌어와 밤새도록 서류를 본 것도, 몸이 부서져라 혼자 검을 휘두른 것도. 전부 생각을 비우기 위함이었다.
데미안은 멍하니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반갑구나, 데미안. 난 바네사란다.”
데미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여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그를 괴롭히는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데미안은 한숨을 삼키는 것도 잠시, 창밖을 빤히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공작님?”
그의 부름에도 데미안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택의 지붕 위에 올라온 데미안은 정면을 응시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폭설이 이틀 전 마침내 끝이 나면서 저택은 텅 비게 되었고 원래도 조용한 저택은 고요해졌다.
머지않아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데미안이 바라보던 곳에서 전령새가 날아왔다.
때에 맞춰 팔을 들어 올리자 전령새는 날개를 접으며 착지했다. 데미안은 품에서 새 모이를 꺼내 전령새에게 준 후 발에 묶인 편지를 풀었다.
오랜만이야, 소공작. 그쪽 상황은 대충 알고 있네만 소공작이 이 정보를 찾…
쓸데없는 말을 뛰어넘긴 데미안은 뒷장으로 돌렸다. 그제야 그가 원하던 것이 전부 쓰여 있었다. 한 문단, 한 문장, 한 글자를 읽어 내릴수록 데미안의 얼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프네가 이곳에서 겪은 일들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곰팡이가 핀 상한 음식. 아무도 처리하지 않는 빨랫감. 무시, 하대, 경멸.
데미안의 눈이 잘게 떨리며 감겼다. 그의 손에서 편지는 와락 구겨졌다.
‘왜….’
왜 진작 말하지 않은 거지? 그랬다면, 그랬다면….
‘내가 과연 그 말을 믿었을까?’
데미안은 확신했다. 다프네가 이 말을 했더라면 자신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새로이 관심이 끄는 방법이냐며 조롱했을 테지.
그도 이렇게 잘 아는데, 다프네라고 어땠을까. 다프네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고.
화가 났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럴 자격이 없다.
데미안은 전령새를 돌려보내고 몸을 일으켜 뛰어내렸다.
그가 멈춘 곳은 다프네가 있는 방 앞이었다. 데미안의 손이 문고리 위에서 달싹였다.
도무지 다프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끝없는 늪에 빠져들듯 숨이 조여와 질식해 버릴 것 같았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문고리가 땀으로 축축해져 미끄러웠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데미안은 나쁜 짓을 하다 걸린 것처럼 황급히 자리를 떴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후에야 데미안은 안도할 수 있었다. 데미안은 욱신거리는 심장에 미간을 찡그리며 숨을 헐떡였다. 셔츠가 그의 손안에서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구겨졌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진정한 데미안은 창백한 얼굴로 숨을 내뱉었다. 며칠 전부터 극도로 흥분하거나 긴장하면 심장에서 피어오르는 고통이 그를 괴롭혔다.
데미안은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며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갑자기 몸을 휙 돌렸다. 활짝 열린 창문턱에 있는 까마귀가 있었다.
‘언제부터?’
정신없이 방에 들어왔던지라 창문이 열려 있는 것도, 까마귀가 있는 것도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까아!
까마귀는 입에 물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고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떠났다.
데미안은 까마귀의 뒷모습을 보다가 종이를 집어 올렸다.
“후우.”
요한은 마침표를 찍은 후 편지를 밀봉했다.
유레이트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주로 황실에 관한 것들이었다. 결국 단 한 가지를 말하고 있었다.
‘황실이 망하고 있다.’
아니, 이미 망했을지 모른다.
황제는 침전에 틀어박혀 애첩의 꼭두각시가 되어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황제의 판단력은 흐려질 대로 흐려졌으며 세르기가 황실을 완전히 장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 희망인 황태자는 남부에 발이 묶여 수도로 올라오지도 못했다.
황실은 세르기의 사람들로 이미 가득 찼으며 그에게 반기를 표하는 귀족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거나, 하루아침에 그의 사람이 되고 있었다.
중립파 귀족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신전에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묵묵부답.
무슨 속셈인지 몰라도 세르기의 목표는 단순히 황실을 장악하는 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르기는 황실에 집중하느라 북부에 전혀 관심을 주고 있지 않았다.
요한은 한 치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현재 상황에 또다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들기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요한.”
벤자민이었다.
“저번에 성벽 쪽에서 데려온 노예 상인들이 깨어났습니다.”
요한은 벤자민을 따라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노예 상인들이 갇혀 있는 철장을 검집으로 내리치자 비명이 들려왔다.
“살, 살려 주십시오, 나으리!”
두 명의 노예 상인은 철장에 달라붙어 빌었다. 그들은 마치 귀신이라도 마주한 듯 새하얀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요한이 물었다.
“왜 이러는 겁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깨어날 때부터 이러더군요.”
요한은 미간을 좁히며 노예 상인들을 향해 말했다.
“일단 진정하게. 그대들은 지금 안전해.”
“하, 하지만… 괴물이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릅니다….”
노예 상인 중 덩치가 큰 이가 벌벌 떨었다.
“괴물? 마물을 말하는 것이냐.”
“다릅니다, 달라요!”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사람이 마물을 다룹니다.”
요한과 벤자민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마물을 다루는 사람은 단 하나다.
주술사.
주술사가 북부에 있다. 주술사는 일반 사람과 다를 게 없었기에 더욱 위험한 존재이다.
“자세히 설명해 보아라.”
요한은 품 안에서 돈 꾸러미를 꺼내 철장 바로 앞에 던졌다.
방금까지 덜덜 떨고 있던 노예 상인들은 묵직한 돈 꾸러미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쯤 북부의 추위를 아는 저희도 사정이 있어서 건너는 중이었습니다.”
돈 앞에서는 겁도 사라졌다.
“웬 여자가 나타났고 저희는 여자를 잡… 아니, 도와주려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의 뒤로 마물이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그때의 공포감이 떠올랐는지 노예 상인의 몸이 벌벌 떨렸다.
“그 여자의 상태는? 얼굴이나 의상착의에 대해 설명해라.”
“워낙 눈보라가 심하게 쳐서 얼굴을 볼 겨를이 없었습니다요.”
요한은 그들을 내려다보다가 돈 꾸러미를 하나 더 던졌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이 중 하나가 잽싸게 돈 꾸러미를 사로채더니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눈 색까지는 볼 수 없었으나 머리색은 분명히 검은색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더는 알아낼 정보가 없었기에 요한과 벤자민은 미련 없이 뒤돌았다.
“일단 기사단을 풀까요?”
“하지만 잠복하고 있다면 오히려 당할지도 모릅니다.”
벤자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주술사가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그럼 상황을 지켜보는 거로 하죠.”
빠르게 결론이 나왔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기에 벤자민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앞으로 에드먼이 말한 기간까지 8일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벤자민은 그 짧은 시간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벤자민.”
방으로 들어온 벤자민은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소공작님.”
이내 데미안이라는 것을 보고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데미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앉아 계세요. 차라도 내오겠습니다.”
“됐다. 오래 있을 생각으로 온 거 아니야.”
데미안은 차를 가지러 가기 위해 나가려는 벤자민을 세웠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바네사.”
갑작스레 데미안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벤자민의 어깨가 흠칫했다.
“그대는 분명 누구인지 알고 있어.”
“소공작님.”
“내게 숨길 생각 하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
“…….”
“이 여자, 정체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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