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하녀는 나름대로 억울했다. 하녀들 사이에서 안젤라의 의견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며 변명했지만, 북부의 하녀들은 자만심에 물들어 있었다. 한평생 그들이 봐온 귀족이라고는 에드먼과 윈터가의 방계 친척 그리고 가신들이다.
북부에서 일하는 이들이 워낙 적다 보니 고작 하녀들에게도 잘 보이려 노력하는 귀족들이 적잖게 있었다. 하녀들은 자만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귀족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허무맹랑한 생각까지 하면서.
그런 그녀들의 앞에 아주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홀로 뚝 떨어졌다. 귀족이며 공작 부인의 직위를 가졌으나 남편에게 애정 한 톨 받지 못하는 마님.
하녀들은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안젤라의 괴롭힘에 동참했다. 마님과 각하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하리라 생각했으니까. 그러니 하녀들은 해고 통지가 내려왔을 때 차라리 기뻤다.
“으으, 추워.”
하녀는 옷 사이로 파고드는 시린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서 가자.”
빨랫감을 든 하녀들은 이내 주제를 돌려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멀어졌다.
데미안은 한참이 지났음에도 나무 뒤에 서 있었다. 가벼웠던 머리가 물에 젖은 솜보다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데미안은 눈을 깜빡이자 그의 속눈썹 위로 내려앉은 눈이 떨어졌다. 동시에 입술 사이로 얄팍한 숨이 터져 나오면서 뿌연 입김이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꽤 오랫동안 눈도 깜빡이지도, 숨을 쉬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미안은 눈 사이에 파묻혀 차갑게 굳은 발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가 도착한 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데미안은 그리 작지 않은 면적의 편지지 위를 빠르게 채워 나갔다.
머지않아 편지를 완성하고는 전령새를 불러 발에 편지를 묶어 날려 보냈다.
“소공작님? 오셨으면 저를 부르시지 그랬어요.”
그사이 목욕을 마친 벤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모습으로 집무실 안을 들어왔다. 전령새를 불러오느라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린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데미안은 창문을 닫았다.
“벤트.”
“…네. 말씀하세요.”
벤트는 의아함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대련이 끝난 데미안은 홀가분해 보였고 이 한 몸 바친 계획이 성공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고작 한 시간 뒤에 다시 만난 데미안은 어딘가 모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 물으려던 찰나 데미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저택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이를 데려와.”
“소공작님, 저희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시종장과 시녀장은 갑작스러운 데미안의 호출에 황급히 달려왔다. 자잘한 일로 각자 부름을 받은 적은 있어도 그들을 동시에 부른 것은 처음이다.
“너희들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둘은 고개를 숙인 상태로 빠르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시종장과 시녀장은 몇십 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고 만약 한 사람이 벼랑에 몰라면 다른 이가 도와주었다. 그런 공생 관계로 이 윈터가의 시종장, 시녀장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이다.
데미안이 물어볼 것이 있다는 말을 한 순간부터 그 어떤 물음에도 답하지 않기로 한 둘은 머리를 더 조아렸다.
“시종장, 어머니께서 주로 하시던 일이 무엇이냐.”
“…마님이요?”
시종장은 예상외의 질문에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래.”
“어, 마님께서는….”
그는 순간 목덜미가 섬뜩해졌다. 여기서 사실대로 잘 모른다 답하면 주인을 제대로 모시지 않은 게 된다. 어차피 데미안 역시 다프네에게 관심이 없었으니 거짓말을 하든 그가 알 방도는 없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마님께서는 소공작님도 아시다시피 사치를 즐기셨습니다. 상인들이 오는 날이면 제일 먼저 나와 보석과 드레스를 모조리 가져가셨고 그것을 지불하는 건 저희의 몫이었습니다.”
데미안의 시선이 시녀장으로 옮겨 갔다. 시녀장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시종장의 말이 맞습니다. 되도록 소공작님과 각하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저희의 선에서 정리하였지만… 이렇게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은 정말 제 주인을 지켜 주고 싶었다는 듯이, 시녀장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한가.”
데미안은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듯 집요하게 질문을 이어 가지 않았다.
시종장과 시녀장은 무서울 게 없었다. 그들이 아는 마님은 지난 5년 동안 무슨 일을 당하든 입만 꾹 다문 채 스스로 오해를 산다. 고작 이런 거짓말을 한다고 더 떨어질 신뢰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마님이시다.
“어머니에게 왜 전속 시녀가 없었느냐.”
시녀장이 답할 차례였다. 시녀장은 그것일 데미안이 어떻게 알았는지 의아했으나 손 안 대고 코 풀기 정도로 쉽게 술술 답했다.
“처음에 모두가 마님의 전속 시녀로 나섰습니다. 하지만 아이들 모두가 일주일 이상 버티지 못했습니다. 마님께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명을 내리시고 수행하지 못하면 벌을 내리셨습니다. 저희가 일부러 전속 시녀를 붙이지 않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차라리 제게 벌을 내리십시오, 소공작님.”
데미안은 바닥에 바짝 엎드린 시녀장을 보다가 손을 내저었다.
“…됐다. 이미 지난 일에 뭐하러 벌을 내려. 돌아가.”
둘이 잔뜩 긴장했던 것에 비해 시시하게 물러갔다.
데미안은 시종장과 시녀장이 머물렀던 자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안나라고 했던가.’
데미안은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이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사라진 것을 제일 먼저 알고 그들에게 전한 하녀.
시종장과 시녀장이 한 말은 안나가 했던 말과 정반대였다. 안나가 말하는 다프네는 들꽃을 보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 누구도 그녀의 전속 시녀를 자처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어딘가로 향했다.
도착한 방의 문을 열자 자욱한 먼지가 그를 가장 먼저 반겼다.
데미안은 다프네가 지난 5년 동안 지내던 방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스스로 발을 디딘 것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기에 어색하기만 한 공간이었다.
데미안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데미안은 서랍과 옷장을 모조리 열어 안을 확인했다.
“…사치를 즐긴다고.”
그 안에는 귀한 것이라곤 없었다.
질 낮은 양피지와 두 동강 난 부분이 칭칭 감긴 낡은 깃펜. 이미 텅 빈 마력석. 얇고 해진 드레스 두 벌. 가장 깔끔하지만 이미 유행이 지난 촌스러운 드레스.
데미안은 시선이 유행이 지난 드레스에 고정됐다.
그는 저 드레스를 잘 알았다. 토벌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다프네는 항상 저 옷을 입고 있었다.
오래된 드레스를 반복적으로 입는다는 것을 깨달은 어느 날은 동정심 유발은 이미 너무 시도한 것이라 시시하니 다른 방도를 찾아보라며 조롱했었다.
그것이 다프네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인지도 모르고.
조롱 섞인 데미안의 말에 다프네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력하마.”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머니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했던 걸까, 어머니는.
데미안은 다프네의 마음을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감히, 무슨 자격으로. 내가.
“…아.”
비좁은 목구멍 사이로 간신히 작은 목소리가 터져 나온 순간, 데미안은 눈에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데미안은 후드득 떨어지는 물줄기를 마치 남이 흘리는 눈물인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았다.
톡톡, 눈물이 낡고 오래된 카펫 위로 짙은 자국을 만들어 냈다.
데미안은 그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려보냈다. 다프네가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그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물음을 입 안에서 되뇌고 또 되뇌었다.
어머니, 도대체 당신은 무슨 삶을 사셨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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