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에드먼은 데미안이 내뱉은 말의 숨겨진 뜻을 알지 못하였다.
“가령 말하지 않은 비밀… 같은 거 말입니다.”
그는 데미안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데미안은 에드먼이 입술을 달싹이기도 전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생각 없이 여쭤본 것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데미안.”
그의 이름을 부르던 찰나였다.
“각하! 어디 계십니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여럿이었다. 모두가 다급히 에드먼을 찾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뛰어다니던 요한과 그대로 마주쳤다.
“각하!”
“무슨 소란이냐.”
조급한 그의 모습에 에드먼 역시 빠르게 물었다.
“마, 마님께서….”
요한은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거렸다.
“숨을 쉬지 않으십니다.”
쿵.
몸의 어딘가가 진창에 처박힌 것 같았다. 에드먼은 다프네의 방으로 가는 와중에도 몸이 몇 번이나 꼬꾸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그는 멀쩡히 잘 가고 있음에도 몸은 무너졌다.
방 앞에 선 에드먼은 그 안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움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 뭐 하시는 겁니까.”
뒤따라온 데미안은 우두커니 서 있는 에드먼을 지나쳐 문을 열었다.
아아.
에드먼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이들 사이로 다프네가 보였다. 온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 입가에 피와 붉게 물들어 간 새하얀 옷.
그때와 같다.
다프네가 스스로 자신의 허벅지에 중상을 입혔던 그날.
그대로 다프네가 자신을 떠나 버릴 것 같았던 그날.
“각하.”
에드먼은 가만히 서 있던 사이 상황이 끝난 것인지 피도 제대로 닦지 못한 뉴벨 남작 부인이 다가왔다.
“제가 발견했을 때 마님은 각혈하신 후였습니다.”
뉴벨 남작 부인은 피로 물든 자신의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갔다.
“때는 이미 늦었고… 심장 압박을 가했으나 멈춘 심장은 도무지 다시 뛰지 않습니다.”
그녀는 모두지 자신의 입으로 다프네의 사망을 알릴 수 없었다.
에드먼은 침대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간 다프네에게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에드먼이 그렇게 귀를 기울였던 작은 심장 소리는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마님은….”
“그만.”
에드먼은 힘겹게 말을 꺼내는 뉴벨 남작 부인의 말을 끊었다.
“말, 하지 않아도 된다.”
“각하.”
“얼음석을 가져와.”
에드먼은 요한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얼음석을 가져왔다.
얼음석이란 생명을 얼려 신체 활동을 멈추게 한다. 죽은 사람에게도, 죽기 직전의 사람에게도 시간을 벌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귀했다. 에드먼 역시 아주 오래전 대마법사에게 받은 것이었다.
에드먼은 곧바로 얼음석을 다프네의 명치에 올려놓고 마력을 조금 흘려보냈다.
쩌적, 하는 소리를 내며 깨진 얼음석은 곧바로 다프네의 몸을 얼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시간을 벌어다 주기엔 충분할 것이다.
“내가 가겠다.”
에드먼은 다프네의 손을 붙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갑지만, 이전에도 온기 하나 없던지라 큰 차이가 없었다.
“내가 마력석을 가져오겠다.”
그제야 에드먼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챈 이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각하.”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뉴벨 남작이었다. 제 부인을 부축하고 있던 뉴벨 남작은 말을 이었다.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남작, 그대는 남아.”
에드먼은 다프네의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차갑다.
가슴이 뜨거워지다 못해 터져 버릴 것처럼 차갑다.
에드먼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간소하게 준비를 끝내 놔.”
그들은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예, 하고 대답한 후 빠르게 준비를 끝낼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준비된 말에 올라타는 에드먼을 바라만 보다가 입을 열었다.
“각하.”
“요한.”
하지만 에드먼은 기다렸다는 듯이 요한의 말을 끊었다.
“내가 만약 열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거든 사람을 보내라. 하지만 그 지역 안으로 절대 들어오게 하지 마.”
“…….”
“믿겠다.”
“…맡기십시오.”
금방이라도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에드먼을 보며 요한이 할 수 있는 말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에드먼은 곧바로 말의 옆구리를 찼다.
‘다프네, 그대는 내 곁에 있어야 해.’
욕을 하고 소리를 질러도 상관없다. 증오해도 상관없다.
내 곁에 숨을 쉬고 내 곁에서 욕을 하고, 내 곁에서 소리를 지르기를.
나는 당신을 놓아줄 준비가 되지 않았다.
***
그다음 날, 요한은 곧바로 유레이트와 사람을 통해 남은 이야기를 하기로 한 후 돌려보냈다.
물론 유레이트는 끝까지 에드먼과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쫓겨난 것을 보이기 위해 굳은 얼굴로 마차에 올랐다.
요한은 떠나가는 마차의 창문으로 걱정스럽게 저택으로 쳐다보는 유레이트를 보며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시작이다.
에드먼은 일단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을 모두 자택으로 돌려보냈다. 휴가를 빙자한 해고였다.
그러나 사용인들은 두둑한 퇴직금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자택으로 순순히 돌아갔다. 대부분이 돌아갔고 집과 거리가 꽤 있는 이들은 눈보라가 잠잠해지는 내일이나 내일모레 떠날 채비를 마쳤다.
요한은 자리로 돌아가 유레이트가 남긴 편지를 보았다.
그곳에는 유레이트의 계획이 쓰여 있었다.
상황을 전해 들은 유레이트는 수도로 올라오기 어려운 요한을 배려해 얼음석과 마님과 똑같은 증상을 가진 사례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이제 요한이 할 일은 에드먼이 오기 전까지 윈터가를 지키는 것이었다.
“소공작님.”
“왜.”
“며칠 만에 휴식입니까. 그냥 쉬세요.”
“시끄러워.”
데미안은 벤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보냈다.
벤트는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데미안이 종일 쉬지 않고 서류를 보는 까닭을 알 것 같기도 했다.
데미안은 마치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한 것처럼 일어나서 지금까지 서류만 보았다. 식사도 대충 해결하고 서류에 코를 박을 듯한 데미안을 보며 벤트는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대련할까요.”
서류에만 고정되어 있던 데미안의 시선이 벤트에게 향했다.
“그 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벤트는 벌써 밀려오는 후회 탓에 그 물음에 제대로 답을 할 수 없었다. 대신 간신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역시나 벤트는 후회했다.
날씨가 춥다며 대련장을 10바퀴 돌았을 때 이미 다리가 후들거렸다. 체력이 꽉 차 있을 때도 데미안을 상대하기 벅찼는데 이미 반 이상을 잃었으니 결과는 뻔했다.
“못해요!”
“쯧.”
데미안은 평소보다 더 빨리 나가떨어진 벤트를 보며 혀를 찼다.
“여전하네.”
벤트는 숨을 헉헉거리느라 제대로 말도 못 했다. 소공작님의 실력은 더 느신 것 같다는 말에 데미안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네 체력이 더 볼품없어진 거겠지.”
아니라며 버럭 화낼 힘도 없는 벤트는 네발로 기어서 들어갔다.
벤트가 무리해서 대련한 이유를 아는 데미안은 한층 가벼워진 마음이었다. 기왕 나온 김에 몸을 더 풀고 갈 생각이었던 데미안은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한참 동안 땀을 뺀 데미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무거워진 만큼 머리에 든 잡생각이 줄어든 기분이었다.
검을 정리하던 데미안은 문득 들리는 새소리에 고개를 빼 들었다. 대련장 구석에 있는 나무 아래에는 작은 새끼 새가 버둥거리고 있었다.
날개를 다친 새는 든 데미안은 나뭇가지 사이에 만들어진 새 둥지를 발견했다. 데미안은 둥지와 새끼 새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이 새끼 새는 어차피 죽을 것이다. 보통 이 시기까지 남아 있는 동물이 없다. 발육이 더뎌 형제들처럼 어미를 따라 날아가지 못해 여기 남아 있다.
새끼 새는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온기를 찾아 데미안의 손바닥에 몸을 비비적거렸다.
텅 빈 둥지와 버려진 새끼 새.
데미안은 마치 그 모습이 자신의 상황 같다고 생각했다.
“이 저택을 떠나게 될 줄은 몰랐어.”
데미안이 번뜩 정신을 차린 것은 하녀들의 말소리 때문이다.
“나도. 그래도 퇴직금이 넉넉하니깐 좋다.”
폭설로 인해 발이 묶인 하녀들이었다.
“사실 난 조금 걱정됐어. 공작님과 마님의 사이가 좋아졌을 줄 누가 알았겠어?”
북부로 돌아온 날, 다프네를 품에 안고 온 에드먼을 보며 사용인들은 둘 사이가 좋아진 것이라 여겼다.
“사실 그냥 쫓겨날 줄 알았다니까. 솔직히 우리도 마님을 괴롭혔잖아.”
몸을 돌리던 데미안은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얘는. 우리가 언제 괴롭혔어? 그냥… 그냥 모르는 척하고 조금 동참한 것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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