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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90화 (90/145)

90화

벤자민은 에드먼의 명을 잊지 않고 지난 사흘간 베스의 곁에서 떠나지 않다시피 했다. 저택을 소개해 준다는 이유로 온종일 같이 있을 때도 있었다.

사흘간 베스는 얌전히 지냈다. 어디를 가도 꼬박꼬박 말을 남기고 갔고 시간 안에 돌아오고 꼭 하녀도 동행했다. 동행한 하녀에게 물어도 이상한 점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이 흘러가니 벤자민의 긴장감은 느슨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사라지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것은 명백히 자신의 실수였기에 벤자민은 허리를 숙였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유레이트와 같이 북부로 내려온 황실 기사였다. 에드먼과 유레이트는 빠르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백작님, 괜찮….”

“이 조건으로는 협상이 불가능합니다!”

유레이트는 기사의 말을 끊고 소리쳤다.

“힘들게 북부로 내려온 이에게 배려 하나 없군요. 내일 마저 이야기하죠.”

유레이트는 문을 거칠게 열었다. 바로 문 앞에 있던 기사는 에드먼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상황을 파악했는지 화난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유레이트의 뒤를 따랐다.

에드먼은 사라지는 기사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황실 기사들의 눈을 피해 내부부터 뒤져라.”

지금 밖으로 사람을 내보냈다가는 괜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황제는 유레이트와 에드먼의 사이를 감시하기 위해 황실 기사까지 붙인 상황이다.

“예, 알겠습니다.”

벤자민은 다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

‘내가 뭘 하는 거지?’

데미안은 눈보라 사이를 걸으며 멍하니 생각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고 돌아가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데미안은 이미 멀어져 보이지 않는 저택과 베스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데미안이 내린 결론은 베스를 따라가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는 마력석 두 개를 소지하고 있었고 이 정도면 마물 세 마리 정도는 혼자 처리할 수 있다.

이상한 점은 베스와 사이에 둔 일정한 간격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시선을 떼면 그대로 눈보라 속에 사라질 것같이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베스의 뒷모습은 처음과 똑같았다. 걸음을 늦춰도, 속도를 높여도 간격은 달라지지 않았다.

데미안은 마치 귀신에게 홀린 것 같은 기분에 일부러 더 빠르게 걸었다. 눈은 종아리의 반까지 쌓여 있고 눈보라는 그칠 기미조차 없었기에 숨이 조금 가빠질 정도였다.

그런데도 베스와의 간격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데미안이 원래 속도로 줄이기 위해 걸음을 늦추던 그때였다. 데미안은 방금까지 앞에 있던 베스를 그대로 놓치고 말았다.

‘어딜 간 거지?’

데미안은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새하얀 눈밖에 없었다.

조용히 주변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날카로운 바람 소리만 들릴 뿐 사람의 인기척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데미안을 일단 자신이 향하던 방향으로 무작정 걸어갔다.

머지않아 데미안은 현재 자신이 있는 곳에 뒷길, 즉 윈터 공작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녀?’

그리고 데미안은 한 무덤 사이로 들어가는 베스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말로만 무덤이지, 실제로는 비석 하나만 세워져 있고 시신이 안치된 곳은 그 비석 아래 지하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문은 윈터 공작의 직위를 가진 이만 가능하며 아무나 열 수 있는 게 아니다.

혼란스러웠지만 본능적으로 저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데미안은 곧바로 뛰어가 문이 닫히기 전 간신히 그 안에 몸을 넣을 수 있었다.

쾅, 하며 문이 닫히고 귀를 때리던 칼바람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역시 들어보기만 했을 뿐 안에 들어오기는 처음이었기에 머뭇거렸다. 데미안은 생각보다 긴 복도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복도를 지나자 가득 쌓여 있는 보석에 데미안은 잠시 멈칫했다. 지하에는 시신이 안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물건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일 줄이야.

데미안은 초상화를 발견하고 벽에 있는 횃불을 빼내어 가까이 가져다 댔다. 검은 머리카락에 회색 눈을 가진 전대 공작 내외가 있었고 그 옆에는 세 살 정도 된 듯한 어린아이가 있었다.

데미안은 그 어린아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저 아이는 아버지이어야 할 텐데….

‘왜 얼굴이 다르지?’

데미안은 혼란스러움에 고개를 뒤로 빼는 것도 잠시 바로 옆에 있는 초상화를 발견했다. 아이는 훌쩍 자라 여섯 살이 되어 있었다.

데미안은 또다시 옆으로 이동했다. 전대 공작 내외는 나이가 더 들었으나 아이는 어려졌다. 다시 세 살로 돌아간 듯한 아이는 그제야 데미안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버지.”

에드먼이다.

그 후 옆으로 쭉 늘어진 초상화는 모두 에드먼이었다.

앞서 두 점의 초상화에 나왔던 정체 모를 아이에 대한 의구심만 남긴 채로.

데미안은 보석이 가득 놓인 상자 위에 낡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오래된 일기장이었다.

전대 공작이 죽기 전 치매에 걸렸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아마 그때 의사의 권유대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의 일기의 내용은 대부분이 과거에 대한 후회였다.

바네사를 데려온 것은 내 인생 최대의 실수다.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던 데미안이 멈췄다.

조금만 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렸다면 에드먼은 완벽한 아이였을 것이다. 아니, 차라리 그 계집아이가 사내였다면 몇백 년 만에 윈터가의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났다며 떵떵거릴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밖에서 난 아이였어도 말이다.

데미안의 머릿속에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

“한 번도 의아한 적 없었니?”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데미안은 몸을 휙 돌렸다.

어둠 속에서 성녀, 아니 여자가 가만히 서 있었다.

“에드먼이 정말 네 아버지가 맞냐고 의문이 든 적이 없었냐는 말이야.”

“…….”

데미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인사하마.”

그녀는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며 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백금발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새까만 머리카락과 회색 눈동자. 제일 처음에 있던 초상화 두 개에서 나온 아이와 똑같은 얼굴.

“반갑구나, 데미안. 난 바네사란다.”

바네사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

크리스는 고개를 내저었고 에드먼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성녀를 찾는 도중 데미안 역시 저택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황실 기사를 신경 쓰지도 않고 주위를 뒤졌으나 조금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집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해가 완전히 지면 낮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추위가 밀려온다. 지금 이 시기는 밖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얼어 죽는 때이다.

데미안이 가지고 있는 마력석은 두 개. 긴 북부의 밤을 견디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똑똑.

한껏 긴장감이 고조된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유레이트였다. 그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황실 기사는 잠들었습니다.”

빠져나오기 위해 손을 쓴 모양이다.

“소공작님께서도 사라지셨다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흔적은 좀 발견됐습니까?”

크리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리는 눈의 양이 더 늘어 흔적을 찾는 게 어렵습니다. 게다가 곧 해가 지는지라….”

“난감한 상황이군요.”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데미안이 조금이라도 빨리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성벽 주변에 사람들을 보내 놔.”

“알겠습니다.”

에드먼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모여 있던 이들이 돌아갔다.

에드먼은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순간, 저택 내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느낌에 에드먼은 미간을 좁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미안의 것이 분명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낯설다.

에드먼은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데미안의 기운이 점점 강해질수록 에드먼의 걸음이 빨라졌다.

에드먼은 그대로 방의 문을 열었고 동시에 차가운 바람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데미안.”

방 안에는 데미안이 있었다.

“아버지.”

데미안의 머리와 어깨 위에는 아직 채 녹지 않은 눈이 있었다.

에드먼을 부르는 데미안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낮았다.

“어딜 다녀왔느냐.”

“그저 잠깐… 바람을 쐬었습니다.”

데미안이 고개를 들어 올리자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타고 들어와 그들의 사이를 마구 어지럽혔다.

“성녀가 사라졌다. 행방을 알고 있느냐.”

“돌아가야 한다고 하시어 중간 지점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

“…그래, 그럼 됐다.”

데미안은 돌아서려는 에드먼을 붙잡았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

“말해라.”

둘의 눈이 마주쳤다.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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