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벤트.”
“네.”
“…….”
“소공작님?”
“…….”
“소공작님, 말씀하세요.”
벤트는 불러 놓고 대답이 없는 데미안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데미안은 최근 계속 그랬다. 불렀기에 대답했더니만 생각에 잠겨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흐읍! 커흡!”
벤트는 일부러 데미안이 상념에서 깨어날 정도로 크게 헛기침을 했다. 데미안은 언제 생각에 빠졌냐는 듯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서류를 보았다.
“소공작님,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이 있기는.”
데미안은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벤트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되도록 모르는 척 넘어가고 싶었지만, 벤트는 무려 사흘 동안, 이 상황이 반복되자 도무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지 말고 제게만 말씀해 보세요, 네?”
벤트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 모습에 데미안은 잠시 망설였다. 사흘 동안 혼자 고민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았고 데미안도 마침 답답하던 찰나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다른 이에게 털어놓기엔 꺼려지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데미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없다니까.”
벤트는 입을 삐죽 내밀고 서류를 마저 정리했다.
데미안이 입을 연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근데 말이야.”
“네.”
“이 세상에서 검은 머리에 회색 눈을 가진 이는 윈터가의 직계만 해당되는 걸까?”
“네?”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너도 그런 생각 안 해 봤어?”
“어….”
벤트는 눈을 굴렸다.
그렇고 보니 그랬다.
검은 머리에 회색 눈이 윈터 공작가의 직계에만 나타나는 특징이라 알려졌지만, 대륙에서 단 한 명 정도는 있을지 모른다.
“글쎄요.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요? 근데 못 들어봤어요.”
검은 머리나 회색 눈이 흔한 것이 아니지만 이따금 회색 눈을 가진 이가 머리를 검게 염색하고는 윈터가의 직계로 사칭을 한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렇단 말이지….”
벤트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데미안은 곱씹었다.
“그럼….”
윈터가에서 두 명의 직계가 태어났을 확률은?
“네?”
벤트의 반문에 데미안은 고개를 휙 들었다.
“…내가 입 밖으로 말했어?”
“네. 자신이 직계라도 주장하는 이들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진짜인 적이 없다고 해요.”
만약 다른 가문에서 자신이 이 가문의 직계다, 하고 주장한다면 이것저것 인정해야 할 절차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윈터가에서 확인하는 것은 단 두 가지다.
머리색과 눈 색의 사실 여부다.
그 정도로 검은 머리와 회식 눈은 흔하지 않았고 ‘오직 윈터가에서만’ 나오는 것이 몇백 년 동안 인증되면서 이 조합은 윈터가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아.”
벤트는 불현듯 생각난 것에 작게 탄성을 질렀다.
“그러고 보니 몇 개월 전에 소공작님의 친모에 대해 조사를 하던 도중 어떤 말을 듣긴 했습니다. 터무니없는 말이긴 한데… 각하께 혈육이 한 명 있으시다는 겁니다.”
“뭐?”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 데미안은 미간을 찡그렸다.
“자세히 말해 봐.”
“저도 얼핏 들은 것이라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 전대 공작님께서는 각하를 늦은 나이에 얻으셨지 않습니까. 마음이 급해지신 전대 공작님이 밖에서 아이를 낳아 데려오셨는데 각하께서 태어나셨다… 뭐, 이런 내용입니다.”
벤트는 횡설수설하며 논점을 흐렸다.
“뭐, 전대 공작님께서 워낙 혈통을 중요시하셨단 걸 사람들이 알고 지어낸 얘기에 불과하겠죠. 하하하.”
벤트는 데미안이 진지해지자 눈치를 살피며 우스꽝스러운 웃음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말이 끝났음에도 데미안은 생각에 잠겨 있었고 벤트는 잠시간의 정적 후 몸을 돌렸다.
“갑자기 배가 아프네요. 제가 한 말은 다 잊어 주세요! 아시겠죠?”
벤트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집무실을 후다닥 빠져나갔다.
‘…설마.’
벤트가 나가고도 골똘히 생각하던 데미안은 결론을 내린 후 고개를 내저었다.
데미안도 전대 공작의 혈통을 향한 집착을 익히 들어왔기에 충분히 그런 소문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서류를 볼 게 남았기에 벤트를 불러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데미안은 문득 창가로 다가갔다. 누군가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주시하던 그때, 그 인영이 몸을 돌았다.
성녀와 눈이 마주친 데미안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따라와.
성녀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에 데미안은 홀린 듯 집무실을 나와 생긴 지 얼마 안 된 발걸음을 따라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작님.”
문을 열고 등장한 이에 에드먼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치솟았다.
“언제부터 폐하의 명을 받들기 시작한 겁니까, 백작님.”
“편하게 외숙부라 부르십시오.”
황제가 보낸 협상가는 다름 아닌 에드먼 친모의 오라버니인 유레이트였다.
가문의 유서가 깊고 대대로 사업가 집안인지라 백작가이지만 황실에서도 사돈을 맺고 싶어 하는 뮤트 백작가는 에드먼의 친모가 사망한 후 조용히 사라졌다.
그 행적을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들었다.
무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유레이트가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단 하나였다.
“폐하가 이상하다는 첩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본 폐하는 그 첩보대로… 제정신이 아니시더군요.”
“폐하께서 외숙부님을 협상가로 곱게 보내셨을 리 없을 텐데요.”
“폐하께서 제게 의지를 많이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유레이트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가졌으며 잠깐이지만 재상의 자리를 맡았을 때 황제의 환심을 가득 받았다.
하지만 그때의 황제와 지금의 황제가 다르다는 것을 아는 에드먼의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챈 유레이트가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다이아 광산 몇 개도 선물로 드렸습니다.”
“하.”
황제의 판단력이 흐려질 대로 흐려진 것이 분명했다. 고작 다이아 광산 몇 개에 협상가로 유레이트를 보낼 정도이니.
“블레드 후작이지요.”
“…그렇습니다.”
유레이트는 짧은 시간 안에 황실의 상황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상황을 수습할 수 있을 정도입니까?”
에드먼은 고개를 내저었다.
“신전과 흑마법까지 연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내 수하 중 한 명이 흑마법에 당한 상태입니다.”
“흑마법이라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했기에 유레이트의 주름진 얼굴에 근심이 늘어 갔다.
“내가 돌아와야 합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외숙부님만이 블레드 후작과 맞서 싸우실 수 있습니다.”
세르기는 황제의 환심을 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과 다르게 유레이트는 황제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를 함께했다. 황실을 거의 장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세르기를 견제할 만한 인물은 유레이트가 유일했다.
“블레드 후작과 새로 생긴 애첩의 관계도 이어져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 애첩이 공작님의 저택에서 일하던 하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정보는 들은 적 없습니다.”
에드먼은 요한을 돌아보았다. 요한은 당황한 채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이내 그것에 대한 조사를 위해 밖으로 나갔다.
“애첩에 대한 정보가 누군가에 의해 막혀 있기에 솔직히 말하면 공작님께서 블레드 후작과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줄 알았습니다.”
유레이트는 싱긋 웃었다.
“그럼 내가 진작 도와줬을 텐데요.”
“…외숙부님.”
누군가 들으면 기합을 할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평온한 얼굴로 내뱉은 유레이트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때 내가 한 제안은 변하지 않습니다, 조카님.”
유레이트가 근 20년 동안 그 누구에게도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건 아니다.
에드먼이 전쟁터에서 돌아왔을 때, 유레이트가 찾아왔다. 유레이트는 제 귀한 동생이 세상에 남기고 간 에드먼을 많이 만나지 못했으나 늘 다정하게 대했고 에드먼 역시 그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유레이트가 물었다.
“황제가 되실 생각이 있습니까.”
유레이트가 이런 식의 농담을 즐기는 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에드먼은 그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에드먼의 증언 하나만으로도 유레이트는 반역자로 낙인찍힐 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의 심정을 도무지 알 수 없던 에드먼은 고개를 내저었고 유레이트는 알겠다는 말과 함께 다시 사라졌다.
그게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아, 공작 부인께서는 잘 지내시는지요. 멀리서 보고 한 번도 뵙지 못한지라.”
유레이트의 입에서 다프네가 나오자 에드먼은 멈칫했다.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에드먼은 화제를 돌렸다.
“성녀가 이 저택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성녀… 말입니까?”
유레이트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역시 이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예. 자세한 건 일단 몸을 좀 녹이시고 쉬신 후 내일 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아직 시간은 남으니까요.”
“각하!”
문을 벌컥 열고 벤자민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협상가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아는 벤자민이 할 실수가 아니었다.
벤자민은 협상가의 정체를 보고는 놀란 얼굴로 급하게 허리를 숙인 후 곧바로 에드먼의 귓가에 작게 말을 전했다.
“…뭐?”
성녀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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