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짧은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후 썸머는 돌아갔다.
데미안은 아직 그 자리에 남아 눈이 흩날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수업이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좀처럼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바로 뒤에서 들리는 낯선 인기척에 데미안은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며 몸을 돌렸다.
“첫인사가 과격하네요.”
성녀가 있었다. 그녀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 없이 싱긋 웃었다. 데미안은 성녀라는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검을 거뒀다.
“처음 인사드리네요. 안녕하세요, 소공작님.”
“…처음 뵙습니다, 성녀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데미안의 말에 여자는 손사래를 쳤다.
“성녀님이라뇨. 편하게 베스라고 불러 주세요.”
“죄송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데미안은 확실하게 선을 그으며 물러났다.
“혹시 길을 잃으신 거라면 하녀를 불러와 드리겠습니다.”
의미 모를 표정으로 데미안을 보던 베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집사님의 시간을 너무 잡아먹는 것 같아 혼자 둘러보겠다고 한 참이었어요.”
“그렇습니까. 전 수업이 있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데미안은 베스가 입술을 달싹이기도 전에 자리를 옮겼다.
베스는 그런 데미안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빤히 쳐다보았다.
‘이상하다.’
성녀를 피해 들어온 데미안은 왠지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혼자 밖에 둘 순 없었기에 하녀 한 명을 불러서 성녀가 있는 곳으로 보낸 후 수업에 들어갔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소공작님.”
뉴벨 남작은 수업이 끝나자 정리를 시작했다. 누군가 다급히 문을 두들긴 건 그때였다.
“수업 중에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막 끝난 참이라 괜찮네만, 무슨 일인가.”
뉴벨 남작의 물음에 시종은 허리를 숙였다.
“그것이… 베스 님이 사라지셨습니다.”
“베스?”
데미안과 뉴벨 남작의 눈이 마주쳤다.
뉴벨 남작은 성녀의 본명을 알지 못하지만 상황상 베스가 성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라지다니? 내가 분명 하녀를 보냈다.”
“그 하녀가 갔을 땐 아무도 없었기에 저택으로 돌아가신 줄 알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데미안과 뉴벨 남작은 곧장 에드먼을 찾아갔다.
진작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에드먼은 사람들을 풀어 성녀를 찾고 있었다.
“아버지.”
“성녀를 마지막으로 본 게 너라고 들었다.”
“맞습니다. 수업을 가야 했기에 하녀를 내보냈는데 그사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하.”
에드먼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픈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만약 성녀에게 문제라도 생기면 추후 성녀를 찾을 신전이 온갖 트집을 잡아 댈 게 분명하다.
에드먼은 곧바로 알렉에게 명했다.
“일단 성벽 쪽을 수색해.”
저택 안은 안전하지만 결계가 쳐져 있더라도 성벽은 이따금 마물이 출몰하는 곳이다.
“저도 돕겠습니다.”
검은 기사단이 성벽으로 향했다.
데미안은 제일 먼저 베스를 만났던 곳을 찾아갔다. 발자국은 이미 새로이 내린 눈이 뒤덮었기에 별 소득 없이 돌아섰다.
정차 없이 움직이던 걸음이 멈춘 것은 꽁꽁 언 호수 앞이었다. 얼음 위에도 눈이 쌓여 호수 안은 보이지 않았으나 데미안은 도통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내 인기척을 느낀 데미안은 고개를 돌렸다. 조금 움직이자 온실이 보였다.
데미안은 그 안에 누군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주시했다. 온실 안은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썸머는 이미 돌아갔기에 온실 안에 들어갈 사람은 없었다.
“……!”
의아함에 온실로 들어선 데미안이 마치 벽에 가로막힌 듯 우뚝 멈춰 선 것은 그때였다.
“소공작님?”
“…여기는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아, 그런가요? 무례를 저질렀네요.”
“괜찮… 습니다. 다들 성녀님을 찾고 계십니다.”
“세상에, 말하는 걸 깜빡했네요. 전 이만 갈게요.”
데미안은 멀어져 가는 베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베스는 방금까지 로브를 벗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과 같은 흑발과 회안을 드러낸 채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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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가 아무에게도 말을 남기지 않고 온실로 간 것으로, 실종은 단순한 해프닝이 되었다.
“저 하나 때문에 많은 분들이 그만… 정말 죄송해요.”
에드먼은 집무실까지 찾아와 사과를 건네는 성녀의 모습에 한숨을 삼켰다.
“됐습니다.”
에드먼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성녀라는 존재가 워낙 신경이 쓰이는 탓인지 어제부터 두통이 유난히도 심해졌다.
궐련 통을 더듬던 에드먼은 아직 성녀가 집무실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주먹을 꽉 쥐며 참았다.
“바쁘니 이만 돌….”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뻗어 오는 손을 낚아챘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에드먼은 성녀의 손목을 붙잡은 채 물었다.
“네? 아, 그게 두통이 너무 심해 보여서 제가 도움이라도 드릴까… 해서요….”
성녀는 차가운 에드먼의 시선에 어깨를 움츠러트렸다.
한편 에드먼은 적잖게 당황한 상태였다. 아무리 두통이 심하다지만 성녀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사과의 의미로 두통을 조금….”
“아버지, 여쭤볼 것이….”
문이 벌컥 열렸다.
에드먼과 데미안은 눈이 마주쳤다. 에드먼은 지금 자신이 성녀와 어떻게 보이는지 자각하고는 서둘러 붙잡은 손목을 놓았다.
“아, 소공작님.”
성녀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허리를 푹 숙였다.
“저는 그럼 가 보겠습니다, 공작님. 다음에는 꼭 허락해 주세요.”
성녀가 나가자 데미안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문이 열려 있어 저도 모르게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변명하려 했으나 데미안이 말을 이어 가는 게 더 빨랐다.
“여기 서류 있습니다. 저는 그럼 이만….”
데미안은 서류를 내려놓고 곧바로 방을 빠져나갔다. 에드먼은 데미안을 따라 나가 해명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잠시 잊고 있던 두통이 다시금 밀려왔기에 미간을 좁히며 다급히 궐련을 꺼냈다.
시간이 지나가 두통이 가라앉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는 벌써 세 개비째 궐련을 피우고 있었다. 방 안은 어느새 뿌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각하, 요한입니다.”
“들어와.”
에드먼은 피우다 만 궐련을 비벼 끄고 창문을 열었다. 시린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면서 연기가 밖으로 나갔다.
요한은 들어오자마자 느껴지는 한기에 멈칫하는 것도 잠시 에드먼의 뒤로 다가왔다.
“말해.”
에드먼은 하얗게 덮인 세상을 바라보았다.
“성녀님을 찾기 위해 나간 외벽 근처에서 마물에게 당한 듯한 노예 상인들을 발견했습니다. 아무래도 성녀님이 도망쳐 나온 곳인 것 같습니다.”
“생존자는?”
“숨이 간신히 붙어 있긴 하지만 아슬아슬합니다.”
“성녀에게는 말하지 말고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라.”
요한은 에드먼에게 가까이 다가가 편지를 건넸다.
“조금 전 전령으로 날아온 것입니다.”
편지에 찍힌 황제의 직인을 발견한 에드먼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협상할 이를 보낼 테니 그를 호위하여 북부로 데려갈 사람을 보내 달라는군.”
“협상 말입니까?”
선전 포고가 적혀 있는 것까지 예상했던 요한은 눈을 깜빡였다.
“전혀 생각지 못한 부분입니다.”
먼저 협상을 하자는 것은 허리를 숙인 것과 다름없다. 협상은 질 싸움을 피하는 방법 중 하나라며 황제가 극도로 멸시하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 전쟁통을 누비고 다니던 황제는 협상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다. 약한 것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협상을 위해 온 이들의 목을 베어 황궁에 걸어 놓기 일쑤였다.
비록 지금은 늙고 병들었으나 그 성격은 유해지기는커녕 쇠약해진 것을 숨기려 더 날카로워졌다.
그런 황제가 협상이라니.
“적어도 이런 대치 상황보단 나을 테지.”
편지에 적힌 시간은 사흘 뒤였다.
“시간에 맞춰 크리스와 검은 기사단 몇을 더 붙여 보내라.”
“예, 알겠습니다.”
요한의 보고가 끝났음에도 에드먼은 물러가라는 말 대신 창틀을 반복적으로 두들겼다.
요한의 입이 달싹거리던 찰나 에드먼이 먼저 말을 꺼냈다.
“다프네는?”
“다른 보고는 들어오지 않고 있는 걸 보면 상태가 유지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홀로 남은 에드먼은 뺨을 스치는 칼바람을 가만히 맞으며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억눌렀다.
그리고 시간은 어느덧 빠르게 흘러 사흘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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