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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87화 (87/145)

87화

“분명합니다.”

하녀는 몸을 잘게 떨었다.

“안쪽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에 들어가 보니 마님께서 일어나 계셨습니다.”

“근데 왜 그대로지?”

“그건… 저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하녀의 주장은 이러했다.

방 안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어가자 다프네가 멀쩡히 상체를 일으킨 상태였다고 한다. 아무나 불러오라는 말에 방을 나왔고 그 앞에서 벤자민을 만났다.

벤자민에게 말을 전하자 그는 서둘러 에드먼에게 향했고 에드먼과 벤자민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본 것은 평소처럼 두 눈을 굳게 감은 다프네였다.

“분명 깨어 계셨습니다.”

하녀는 에드먼의 차가운 시선에 손을 덜덜 떨었다.

“각하, 이 하녀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왜 깨어나서 말까지 한 사람이 고작 몇 분 사이에 다시 정신을 잃었지?”

“그것은….”

“무슨 일이에요?”

문가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그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닫는 것을 잊은 문 사이로 몸을 집어넣었다.

“소란스럽길래….”

“성녀.”

에드먼은 곧바로 여자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다프네가 깨어났다가 다시 정신을 잃었다.”

“아.”

여자는 이 상황이 왜 벌어졌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원래 다 그럽니다. 워낙 상태가 안 좋았던지라 점점 건강을 회복할 거예요.”

에드먼은 다프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안색이 창백했고, 심장은 느리고 작게 뛰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 말고는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벤자민, 사람들을 불러와라.”

“어떻게 됐습니까.”

벤자민을 통해 상황 설명을 들었던 이들은 긴장한 채 에드먼의 입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직 다른 이상은 없다.”

“그럼… 성녀가 정말 맞습니까?”

“맞다.”

성녀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도 놀라운데 그 성녀가 마님을 치료했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신탁의 내용을 발표하지 않은 것일까요.”

신탁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녀의 특징만 적혀 있을 것이다.

신성력은 죽은 사람도 살릴 정도의 치유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장 착취를 많이 당한다. 이 때문에 신탁이 내려오면 신전은 매우 바쁘게 움직인다. 어느 상황에 닥쳐 있는지 모를 성녀를 찾기 위해서 혈안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통은 신탁의 내용을 발표하여 성녀를 찾아 데려온 이에겐 막대한 상금을 내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요한이 접수한 정보에 의하면 신탁이 내려온 것은 적어도 한 달 전. 성녀가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은 일주일 전이다.

충분히 신전에서 신탁의 내용을 공개하고도 남았을 시기였다.

“아무래도 신전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신탁이 내려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요한은 뜻하지 않게 신전 내부를 깊게 파고들었다.

“대신관의 쿠데타가 의심됩니다.”

“몇십 년 동안 권력을 장악해 오다가 난데없이 나타난 이에게 돌려줘야 하니 그럴 수밖에.”

알렉은 혀를 찼다. 대신관은 신성력이 방대하였으나 지나치게 재물을 밝혔다. 그런 이가 순순히 제 것이라 여기고 있는 권력을 나눌 리 없었다.

“황제 쪽은?”

황제는 에드먼이 북부로 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여러 차례 황실 기사단을 북부로 보냈다. 그러나 북부의 겨울이 시작되면서 도저히 앞을 뚫을 수 없는 눈보라가 내리기 시작했다. 길에 눈이 밝은 상인들조차 드나들 수 없을 정도이기에 이맘때가 되면 저택은 고립된 것과 다름없다.

“계속 시도를 하다가 어젯밤 철수했습니다.”

북부에서 태어나 한평생 생활한 이들도 지금 즈음에는 되도록 밖을 나가지 않는 마당에, 이런 추위를 겪어 본 적도 없을 수도의 기사단이 눈보라를 뚫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방도를 찾은 건 아니고 황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에드먼은 한 박자 뒤에 물었다.

“황제의 명이었나?”

그 물음에 요한은 멈칫하더니 들고 있던 보고서를 열었다.

미처 놓친 부분이었다.

“…아닙니다. 블레드 후작의 명이었습니다.”

세르기가 황실을 장악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는 어느새 황실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리는 정도까지 손을 뻗은 것이다.

문제는 세르기의 목적이 단순히 실세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숨겨진 무언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벤자민.”

에드먼은 일이 끝나고 돌아가는 이들 사이에서 벤자민을 불러 세웠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여자를 주시해.”

“예?”

벤자민은 저도 모르게 에드먼의 말에 반문했다.

이내 에드먼이 말하는 여자가 성녀라는 것을 알아챈 벤자민은 피어오르는 의구심을 감출 수 없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성녀라는 것도 증명됐고 마님까지 고쳤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분명 살기 위해 북부를 건넜다고 했지. 하지만 발이나 손에 동상이 없었다.”

에드먼은 여자를 유심히 살폈다. 북부에 사는 이들이 고질병처럼 달고 다니는 동상을 북부를 건넌 이에게 없을 리 없다. 더군다나 손에 박인 굳은살은 혹독한 노동으로 생긴 것이 아니었다.

“설령 진짜 성녀라 한들 좋은 뜻을 가지고 접근한 건 아닐 테지.”

“…어리석었습니다.”

벤자민은 마님을 구할 수 있다는 것에 정신이 팔려 그런 자잘한 것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여자가 떠나기 전까지 네가 곁에서 감시해라.”

“예, 알겠습니다.”

벤자민이 나가고 에드먼은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미간을 찡그리며 서류를 내렸다.

성녀라는 그 여자는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다. 에드먼은 기억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도리어 돌아온 것은 흔적 대신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었다.

에드먼은 옅은 신음을 흘리며 다급히 궐련을 입에 물었다. 방 안에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니 두통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앞으로 4일. 고작 4일이다.

에드먼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궐련을 깊게 빨아 마셨다.

***

데미안의 하루는 똑같이 흘러갔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소공작님.”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대답을 대신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수업으로 넘어가기 전까진 시간이 어정쩡하게 남았기에 에드먼은 벤트와 대련을 할 참이었다.

“…지금 저게 무슨 광경이지?”

벤트와 복도를 거닐던 데미안은 걸음을 멈추었다.

벤자민이 있었다. 그러니까, 벤자민과 성녀가 있었다. 벤자민은 성녀에게 저택에 관해 설명을 해 주는 듯 보였고 둘 사이는 만난 지 고작 하루밖에 안 된 이들치고는 가까워 보였다.

“아, 집사님이 저택을 소개해 드린답니다.”

“성녀의 부탁이었나?”

“각하의 명이 있으셨다는데요?”

아버지가?

데미안은 미간을 좁혔다. 불쾌한 감정이 진득하게 달라붙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휙 돌렸다.

“벤트, 나와 대련….”

“어이쿠! 집사님이 부탁하신 중요한 것을 잊었네요!”

벤트는 눈치 빠르게 데미안이 하려는 말을 알아차리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모습에 헛웃음을 내뱉은 데미안은 하는 수 없이 홀로 돌아가려던 찰나 뉴벨 남작 부인과 마주쳤다.

“아, 소공작님.”

뉴벨 남작 부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나?”

“마님의 상태가 매우 좋아지셨어요.”

이제 막 다프네의 방에서 나온 뉴벨 남작 부인은 에드먼에게 전달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중 만난 데미안에게 제일 먼저 소식을 전하게 되었다.

“혈색도 좋아지셨어요. 이 회복력이면 분명 머지않아 깨어나실 수 있을 거예요.”

성녀의 힘은 놀라웠다. 마력석이 없다면 당장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다프네는 고작 하루 만에 엄청난 회복력을 보였다.

“아, 제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네요. 저 먼저 가겠습니다, 소공작님.”

“…그래.”

멍하니 있던 데미안은 뉴벨 남작 부인이 지나친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은 허공을 응시했다.

‘어머니가 곧 깨어난다고?’

불쑥, 알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기쁨도 분노도 아닌 묘한 감정이었다. 문득 가슴이 답답해진 데미안은 외투 하나만 걸친 채 무작정 밖을 나왔다.

밖이라고 해 봤자 저택만 나왔을 뿐 갈 곳은 한정되었다. 데미안은 조금의 눈도 막아 주지 못하는 앙상한 나무 아래에서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뼛속까지 한기가 서릴 정도로 추운 날씨에 노출되자 머리가 몽롱해졌다.

“소공작님?”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데미안은 고개를 돌렸다.

“썸머.”

“돌아오셨군요!”

썸머는 들고 있던 삽을 내려놓고는 환하게 웃으며 데미안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이 서로를 가볍게 포옹할 때 썸머가 작게 속삭였다.

“마님은 좀 괜찮으십니까?”

현재 썸머는 정원사로 일하고 있지만, 한땐 검은 기사단에서 대장장이로 일하였고 아직 기사단에 몸을 담고 있었기에 저택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태가 좋아지셨다.”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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