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자세히 설명해라.”
성녀는 긴 시간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성녀의 탄생을 기다리던 이들 역시 돌아선 지 오래다. 정령사처럼 성녀로 자연스레 사라진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데도 신전이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대신관의 영향이 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이들이 자신이 성녀라고 주장하며 나타났다. 하지만 그들 중 진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지금은 대신관이 성녀의 역할을 하고 있으나 본래 성녀는 그 존재만으로도 큰 역할을 맡고 있다. 이 때문에 황제는 성녀가 주장한 이가 나올 때마다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더군다나 현재 황제는 에드먼이 성녀라고 주장한 이를 저택으로 들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둘을 한통속이라 여길 것이 분명했다.
비록 거센 눈보라 탓에 그 누구도 북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지만 조심해서 나쁜 건 없었다.
“자신이 성녀이고 이곳에서 나쁜 기운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마님의 상태를 읊기 시작하더니 자신이 치료할 수 있다면서… 그리고 현재 수도에서 새로운 성녀의 등장을 알리는 신탁이 내려왔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벤자민의 마지막 말은 여자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실어 주었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데미안은 에드먼이 고민하는 기색이 보이자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
“아버지, 믿어 봐서 나쁜 건 없습니다. 게다가 어머니를 구할 유일한 방도를 실행하기 힘든 상황이잖습니까.”
에드먼은 다프네를 돌아보았다. 두 눈이 굳게 닫혀 있는 다프네의 심장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한없이 숨을 죽여야 한다.
에드먼은 업무를 보는 시간을 제외하고 대부분을 다프네의 곁에서 지낸다. 다프네의 심장이 당장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서, 곁에 있어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아버지.”
데미안의 재촉에 에드먼은 고개를 돌렸다.
“그 여자, 데려와.”
여자는 왜소한 체격에 낡은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공작님!”
여자는 잔뜩 긴장한 채 허리를 푹 숙였다.
“들어라.”
“앉으시면 됩니다.”
“아, 네!”
어정쩡하게 서 있던 여자는 벤자민의 말에 허둥지둥 소파에 앉았다.
“내 수하에게 한 말을 그대로 해 봐라.”
“아, 네네! 그것이… 이곳에서 안 좋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제가 아직 미숙하지만, 그래도 이 기운은 저주가 확실합니다.”
“분명 살릴 수 있다 했다고.”
“저주가 강력하긴 해도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해라.”
에드먼은 로브 아래 감춰진 여자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그게, 정확한 건 상태를 제 눈으로 봐야 하는 거고 흑마법이라는 게 워낙 알려진 게 없다 보니….”
“잘못되면 죽을 각오는 해야 할 거다.”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지만 벤자민은 에드먼을 막을 수 없었다. 그만큼 그가 절박하다는 뜻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여자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곳을 어떻게 찾아온 거지?”
지금 밖은 세찬 눈보라가 내리고 있다. 날씨뿐만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다. 아무리 혹독한 추위여도 마물들은 돌아다녔기에 북부를 여자 혼자 다니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여자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친 듯이 도망쳤습니다. 잡히면 그대로 죽을 목숨이었으니까요.”
신성력을 가진, 힘없는 사람이 악질적인 이들에게 노예로 잡혀 끔찍한 삶을 사는 건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여자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에드먼은 여자를 훑는 것도 잠시 고개를 돌리고 벤자민을 보았다.
“가져와.”
벤자민은 들고 있던 것은 여자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 마력석에 신성력을 넣어 주시면 됩니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마력석을 두 손으로 쥐었다. 머지않아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넘실거리는 신성력은 텅 빈 마력석으로 흘러 들어갔다.
곧이어 여자가 마력석을 내려놓았을 땐 탁했던 것이 옅은 빛을 내고 있었다. 정말 이 안에 신성력을 채워 넣은 것이었다.
“표식은 어디 있지?”
신성력은 증명되었으니 표식을 보일 차례였다. 표식은 성녀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므로 지금까지 자신이 성녀라고 주장하던 이들은 이 단계에서 발각되었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로브를 걷었다. 그러자 백금발의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드먼의 시선은 여자의 이마에 박혀 있었다. 표식은 신성력과 같은 밝은색으로 영롱한 빛을 내고 있었다.
“다행히 표식은 늦게 나타났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멀쩡히 살아 있는 이유예요.”
여자는 이내 로브를 다시 이마로 끌어내려 표식을 감추었다. 남에게 보이는 것이 익숙지 않은 듯했다.
“…맞는 것 같습니다.”
성녀가 맞다. 성녀라는 것이 확정되었으니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일어나.”
여자는 조용히 에드먼의 뒤를 따랐다.
에드먼은 다프네가 잠든 방으로 들어갔다.
“내 아내다.”
“…상상 이상이에요.”
여자는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다프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탓!
“함부로 손대지 마라.”
“주의하겠습니다.”
에드먼은 낚아챘던 여자의 가는 손목을 바로 놨다.
“솔직히 말하면 부인께서는 산 사람이 아니십니다. 이미 영혼은 흑마법에 당했으나 억지로 잡아 두고 있는 느낌입니다.”
“살릴 만한가.”
“이 정도일 거라고 예상은 못 했지만… 가능은 할 것 같습니다.”
여자는 굽혔던 허리를 폈다.
“나가 주세요.”
“그대가 성녀라고 해도 난 믿을 수 없다. 내가 보는 앞에서 해.”
“…좋아요.”
여자는 에드먼이 나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무릎을 굽혔다.
“손을 잡아야 합니다. 이건 괜찮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에드먼은 방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벤자민이 서 있었다.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지 안에 아무도 들이지 마.”
“알겠습니다.”
돌아온 에드먼은 침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여자는 에드먼의 행동을 주시하다가 가지런히 모인 다프네의 두 손을 쥐었다. 이내 여자의 몸 전체에서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빛을 내며 공중으로 떠올랐고 하얀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에드먼은 아주 작은 소리를 내며 뛰고 있는 다프네의 심장에 집중했다. 박동이 약했으나 심장은 큰 이상 없이 계속 뛰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여자는 지친 얼굴로 다프네의 몸에서 손을 뗐다.
“이제, 이제 됐어요….”
에드먼은 곧바로 다프네에게 다가갔다. 안색이나 심장 박동은 아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다음날부터 좋아질 거예요.”
여자는 지친 목소리로 에드먼의 의구심을 풀어 주었다.
“대가를 말해라.”
“네…?”
순진하게 깜빡이는 눈을 보며 에드먼은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해 줬다 생각할 만큼 순진하다 생각하는 건가.”
“그게, 무슨….”
여자는 말을 더듬으며 에드먼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이내 옅은 한숨과 함께 아까와는 다른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제가 요구할 대가는….”
***
“맞습니다.”
요한은 말을 이어 갔다.
“몇 주 전 신전에서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내용은 곧 새로운 성녀의 등장을 암시하는 것이고요.”
요한은 한 번은 자신이 직접, 두 번째로는 칼리토의 손을 빌려 총 두 번의 걸쳐 소문을 쫓았다. 그 결과는 하나였다.
“그 여자는 성녀가 맞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고작 하루 만에 알아 온 것이었기에 요한은 피곤함에 젖어 있었다.
“성녀가 어떤 대가를 요구했습니까?”
그녀를 본 적 없는 요한은 도저히 성녀가 요구할 대가를 어림잡지 못했다.
“…딱 나흘간 저택에서 지내게 해달라더군.”
예상외에 요구였기에 요한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게 답니까?”
“다야.”
적어도 물질적인 요구라 생각했던 요한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 군요.”
그때,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각, 각하!”
벤자민은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마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어두운 방에서 여자는 눈을 떴다. 복도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움에 귀를 기울이자 급하게 어딘가로 향하는 듯했다.
얼핏 들리는 대화의 내용을 들은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세찬 눈보라에도 여자는 눈 하나 찡그리지 않고 저택의 광경을 훑어보았다. 정원부터 시작해서 쭈욱.
딱딱한 표정의 여자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여자는 이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의 눈동자가 순간 회색으로 빛났다가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드디어 돌아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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