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윈터가의 시종장은 근래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다름 아닌, 윈터가의 사람들이 아무런 기별도 없이 북부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북부가 척박하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지만 시종장은 상인들과 교류를 많이 하는지라 소문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각하께서 마님과 이혼하고 황녀님과 결혼한다는 소문을.
처음에는 쉽게 시종장도 믿지 않았지만 워낙 상인의 말이 상세했기에 머지않아 그것을 인정했다.
그 후 시종장이 제일 처음으로 하려고 한 일은 황녀가 북부로 왔을 때 흡족할 수 있도록 마님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었다.
‘큰일 날 뻔했어.’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나 시종장은 그때만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마터면 소문만 믿고 마님의 흔적을 지울 뻔했다. 시종장이 이토록 소문이 거짓이었음을 확신하는 이유는, 에드먼이 황녀가 아닌 다프네와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시종장은 며칠 동안 지워지지 않는 의아함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마님의 방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작 부인의 방.
수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소피아가 있지 않더라도 늘 비어 있던 공작 부인의 방은 마님이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부터 시작하여 모든 게 이상하다.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얼어붙은 저택의 분위기.
시종장은 문득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기에 시종장은 조심스럽게 방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문에 귀를 갖다 대고 숨을 죽여 보았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저택을 돌아다니면서 마님을 한 번도 뵌 적 없으니 분명 방에 계신 게 틀림없는데 어떠한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왠지 모를 느낌에 시종장은 문을 두들겼다.
“마님, 잠시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시종장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허락하신 줄 알고 들어가… 아악!”
그러나 동시에 문이 휙, 열리면서 시종장은 그것을 버틸 힘도 없이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각, 각하.”
시종장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에드먼을 보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저 그것이… 마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얼마나 급한 일이길래 허락도 없이 들어오려고 한 거지?”
시종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에드먼의 집요한 질문도 그렇지만 몇 주 사이 살이 빠지면서 인상이 더 날카로워진 그의 얼굴이 시종장을 더 옥죄어 왔다.
“그, 그게… 그러니까….”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고 말이 더듬더듬 튀어 나갔다.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에드먼의 눈빛에 시종장은 눈을 깜빡였다.
에드먼이 시종장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각하.”
에드먼이 시선을 돌리자 갑작스레 풀린 긴장감에 시종장은 서둘러 숨을 들이켰다. 시종장은 때를 놓치지 않고 허리를 숙였다.
“저, 저는 그럼 이만….”
에드먼은 헐레벌떡 멀어지는 시종장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모든 일을 뉴벨 남작 부인이 맡아 주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용인들은 다프네의 현재 상태를 알 방도가 없었다. 애당초 이곳 사람들이 다프네에게 큰 관심이 없었으나 에드먼은 뉴벨 남작 부인 덕이라 생각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요한의 물음에 에드먼은 방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 가느다란 숨소리를 제외하고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는 안을 보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문을 닫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왜 찾아왔지?”
“알렉 경이 돌아왔습니다.”
일주일 전, 알렉은 저택에 무사히 도착하자마자 마력석이 있다는 설산으로 향했다.
연락이 닿을 방법이 없었기에 그들은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오늘에야 알렉이 무사히 돌아왔다.
워낙 설산이 혹독한지라 알렉은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수고했다.”
“아닙니다.”
알렉은 옷을 제대로 갈아입을 틈도 없이 곧바로 에드먼을 찾아왔다.
“…그 말이 맞습니다.”
에드먼은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숨죽이며 알렉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다른 이들 역시 안도감을 내비쳤다.
“설산에는 엄청난 크기의 마력석이 있습니다. 적어도 성인 남자 하나 한 명 정도의 크기가 됩니다.”
마력석을 만드는 원리는 간단하다. 마나, 마력, 신성력을 담을 수 있는 특이한 돌이 있는데 그것에다가 힘을 주입시키면 된다.
마력석의 크기와 힘의 크기는 비례하고, 한 번 사용한 것은 다시 쓸 수 없으므로 매우 귀하다. 보통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크기가 작고, 성인의 주먹만 한 것은 아주 큰 편에 속한다. 한데 성인 남자 한 명 정도의 크기라니. 상상도 못 할 방대한 양의 힘을 담을 수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 크기면 지금 마님의 상태로는… 적어도 몇 년은 거뜬히 버티실 수 있을 거예요.”
그 안에 다프네를 깨울 방법을 찾으면 된다.
일주일 동안 전전긍긍하여 알렉 못지않게 안색이 창백해진 뉴벨 남작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알렉은 망설였다. 자신이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 지금도 긴가민가했다. 그 정도로 섬뜩하고 기이한 장면이었다. 알렉은 침을 삼킨 후 입을 열었다.
“마물들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요한은 긴장을 풀며 안경을 치켜 올렸다.
“설산은 마물의 본거지라 알려진 곳이니 당연히 상당한 양의 마물이 있겠지요.”
“저도 그 정도는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을 떠올린 알렉은 오싹해진 등골에 식은땀을 흘러내렸다.
“마물들이 마력석 주위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수백, 아니 수천 마리가 마력석을 중심으로 빙 둘러싼 그 모습은 마치.
“…마력석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일 먼저 입을 뗀 것은 요한이었다.
“불가능합니다. 마물이 무리 지어 생활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최대 백 마리입니다.”
“적어도 수천 마리입니다.”
알렉은 퀭한 눈가를 꾹꾹 눌렀다.
“분명합니다.”
드디어 방도를 찾았는데 너무나도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
뉴벨 남작 부인은 비틀거리며 남작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벤자민, 잠시 부인을.”
벤자민은 뉴벨 남작 부인을 부축하며 방을 나갔다. 뉴벨 남작은 문이 닫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남작님.”
요한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은 많이 늙었지만, 저도 소드마스터입니다. 알렉은 검은 기사단장이고, 각하께서는 공작가를 지키셔야 합니다.”
뉴벨 남작이 언급하는 이유는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불가능합니다. 검은 기사단 전체가 달려들어도 불가능한 것인데 남작님 홀로 어찌….”
“자살할 생각인가.”
에드먼은 요한의 말을 끊었다.
마력 각성자의 자살은 다르다. 자신의 힘을 한계치로 끌어올린 후 한 번에 표출한다. 그러면 인간의 육체는 그 힘을 버티지 못하고 폭발하게 되고 그것을 ‘자살’이라 부른다.
“…예.”
“남작님! 그건….”
“자네는 조용히 하게.”
“…….”
“각하, 부디 제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뉴벨 남작은 요한의 만류에도 꿋꿋하게 에드먼을 바라보았다.
“…보류한다.”
“각하.”
뉴벨 남작이 그를 불렀으나 에드먼이 문을 박차고 나가는 것이 더 빨랐다.
***
“아버지.”
데미안의 부름에 다프네의 얼굴에 박혀 있던 시선이 돌아갔다.
“몸은 좀 괜찮으냐.”
“예.”
지나친 마력석 복용으로 데미안은 혼절했으나 반나절 만에 회복하였다.
“어머니를 살릴 방도가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다.”
“남작 부인이 말하더군요. 어머니의 상태는 처음 보는 것이라고.”
데미안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대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데미안.”
에드먼의 미간이 좁혀졌다. 데미안은 하얗게 질린 다프네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머니는 어쩌다가 저렇게 되신 겁니까.”
데미안은 감히 그 누구도 물어보지 못했던 물음을 꺼냈다.
그 말에 에드먼은 기억을 더듬었다. 몸에 힘이 빠지면서 쓰러지고. 맞닿은 입술과 비릿한 피. 다프네는 마치 힘이 다한 듯 쓰러졌다.
“다프네는….”
에드먼의 입술이 달싹거리던 순간이었다.
“각하!”
벤자민이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 여기 계셨군요.”
벤자민은 거친 숨을 고를 시간도 없다는 듯 서둘러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마님을 살릴 수 있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에드먼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신을 성녀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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