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차가운 숨이 터져 나왔다. 데미안은 옷 사이로 파고드는 익숙한 칼바람을 맞으며 마차의 창문을 두들겼다.
머지않아 뉴벨 남작 부인이 창문을 열었다.
“어머니의 상태는 어떤가.”
“다행히 아까보단 나아지셨습니다.”
단 몇 시간 사이에 뉴벨 남작 부인은 핼쑥해졌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홀로 다프네를 보살펴야 했으니 지쳐 있을 게 당연했다.
“이제 북부에 도착했으니 반나절만 가면 도착할 거다. 조금만 더 고생해라.”
“이게 제 일인 걸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소공작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뉴벨 남작 부인은 데미안에게 모든 걸 실토한 후로 그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녀가 묻는 말의 뜻을 이해한 데미안은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데미안은 뉴벨 남작 부인이 다른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말했다.
“바람이 차.”
“…예.”
뉴벨 남작 부인은 창문을 닫았다.
데미안은 앞만 바라보았다.
“속력을 높여라!”
아무리 마차 안이라고 해도 북부의 추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 다프네의 몸 상태는 금이 잔뜩 간 유리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천천히 오랫동안 마차에 머무는 것보다 일찍 도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그렇게 속력을 높여서 움직이던 데미안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알렉의 옆으로 말을 몰았다.
“알렉, 마물이 나타날 시기가 아닌 게 분명할 테지.”
“예. 마물 토벌을 끝낸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고 곧 혹독한 날씨가 될 테니 겨우 살아남은 마물들도 몸을 사리고 있을 겁니다.”
“느낌이 좋지 않아.”
“정찰을 돌고 올까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어.”
알렉은 곧바로 인원을 추려 정찰을 보냈다. 그런데도 데미안의 불안감을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몸집을 부풀어 갔다. 그것을 눈치챈 알렉은 더 많은 인원을 정찰 보내려고 했다.
“잠깐.”
데미안은 손을 들어 올렸다. 모두가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휘이잉.
귀를 따갑게 때리는 칼바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곧이어 아주 작지만 희미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데미안이 눈을 번쩍 뜨는 것과 동시에 알렉이 소리쳤다.
“마물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의 마물이 엄청난 속도로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당장 달려!”
마차를 이끌던 기사는 재빨리 방향을 튼 후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마물들은 바로 뒤에서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데미안은 말에 올라탄 채 품 안에서 마력석을 꺼내 깨트렸다. 익숙한 불쾌한 기운이 몸 안에 흡수되자 데미안은 가까이 다가온 마물의 몸통을 두 조각으로 나누었다.
그렇게 가까운 마물들만 처리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알렉은 점점 더 빠르게 가까워지는 마물을 보며 말을 멈추었다. 어느덧 세 번째 마력석을 깬 데미안도 그에 따라 말을 멈추었다.
“알렉, 지금 뭐 하는 거야.”
“소공작님, 이대로 가다간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알렉은 말에서 내려 검을 뺐다. 다른 검은 기사들은 이미 싸울 준비를 마친 후였다.
“소공작님께서는 마차를 지키십시오. 더 이상 마력석을 사용하면 몸에 무리가 가실 겁니다. 저희는 뒤를 지키겠습니다.”
“알렉.”
“어서 가십시오.”
알렉은 데미안을 등졌다.
“어서요!”
데미안은 결국 그들을 두고 말의 옆구리를 세차게 걷어찼다. 남은 이들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마물을 보며 몸을 풀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날뛰어 봅시다.”
“다들 다치지 않게 조심해라!”
“걱정하지 마십쇼, 단장님!”
에드먼은 산전수전 모두 겪어 본 그들은 이런 상황도 쉽사리 겪어 보았다.
코앞까지 온 마물을 보며 기합 소리와 함께 달려들려는 순간.
“……?”
순식간에 마물들이 사라졌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잠시 알렉은 기이한 느낌에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마물은 그들을 뛰어넘고 있었다.
허망하게 뒷모습을 바라보던 알렉은 번뜩 무언가를 깨달았다.
“…마차.”
저쪽으로 간 것은 단 하나다.
“당장 뒤를 쫓아라!”
마물의 목표는 마차였다.
***
북부 지리에 능한 기사 덕에 데미안은 성의 근처까지 갈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안정되자 마차의 속도가 느려졌다.
“괜찮나?”
“예, 예. 다친 곳도 없고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뉴벨 남작 부인은 조금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기야 상황 설명을 해 줄 틈이 없었기에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갑자기 마차가 미친 듯이 달린 것이었다.
“마물이 나타났었다.”
“마, 마물이라뇨?”
“알렉을 비롯한 기사들이 막았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때 마차가 멈췄다.
“소공작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마부석으로 향하자 기사가 갈림길 앞에 선 상태였다.
“어디로 갈까요.”
한쪽 길은 빠른 길이지만 윈터 가의 가주들의 묫자리가 있는 곳이었고 다른 쪽은 좀 돌아가는 길이었다. 데미안의 고민은 짧았다.
“…빠른 길로 간다.”
길을 정한 마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구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마님, 마님?”
다급히 다프네를 부르는 뉴벨 남작 부인의 목소리에 데미안은 곧바로 마차의 문을 열었다. 다프네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된 채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왜 이러는 거냐.”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마님께서….”
그때, 데미안의 목덜미로 스산한 바람이 스쳤다. 솜털이 바짝 세워지고 자신도 모르게 허리가 빳빳해졌다. 데미안은 조심스레 마차의 계단에서 내려왔다. 이상함을 눈치챈 뉴벨 남작 부인은 숨을 죽였다.
마물 하나가 있었다. 마물은 커다란 코를 하늘을 향해 치켜올린 채 킁킁거렸다. 냄새를 맡는 듯한 행동에 데미안은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떨어졌다.
데미안과 마부석에 앉은 기사는 빠르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것을 알아차린 뉴벨 남작 부인은 고래를 세차게 저었다.
“가!”
데미안이 마차의 문을 닫자 마차가 빠른 속도로 출발했다. 그와 동시에 마물이 고개를 휙 돌려 정확히 데미안을 응시했다.
데미안은 검을 빼내 드는 것과 동시에 품 안에서 마력석을 꺼내 깨트렸다. 마력이 데미안의 몸 안에 스며들었다. 연속으로 네 번이나 복용한 적은 없었기에 숨이 조금 벅차올랐다. 데미안은 숨을 천천히 고르며 마물과 대치했다.
눈이라고 부르기에도 기괴한 무언가 도르륵, 굴러갔다. 데미안을 비스듬하게 스쳐 가는 시선이었다. 데미안은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점점 작아지는 마차가 보였다. 데미안은 마물에게 목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물이 움직이는 순간, 데미안은 마차를 향해 뛰어갔다.
“더 빨리 움직여!”
하지만 마물의 속도를 달리기로 이길 수 없었다. 데미안은 허공에 날아오르는 마물을 향해 검에 마력을 담아 날렸다.
꾸엑!
마물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지르며 떨어졌다. 아직 꿈틀거리는 마물의 몸통에서 검을 뽑아낸 데미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상하게 앞이 흐릿해졌다. 마력석을 연속으로 복용한 부작용이었다. 데미안은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가득 채워진 마물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쯤이면 마차가 성을 무사히 통과했을 것이다.
데미안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비틀거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미약하지만 몸 안에 남아 있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소공작님!”
작게 들리는 목소리를 보아하니 알렉과 다른 기사들이 오고 있는 모양이다. 데미안은 검을 세워 땅을 짚어 일어났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그때.
“수고했다.”
머리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워낙 짧은 순간이었기에 데미안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의 앞에 익숙한 누군가의 뒷모습이 있었다.
“…아버지?”
데미안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머지않아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수많은 마물은 재가 되어 바람이 실려 날아갔다. 데미안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이제 쉬어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데미안은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