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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81화 (81/145)

81화

“황녀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세르기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물었다.

성녀는 깊게 눌러쓴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꼭꼭 숨겨져 있던 탐스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굵은 곡선을 그리며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성녀는 이내 옅은 숨을 내쉬며 가면 역시 벗어 버렸다.

“왜요? 무슨 말을 했나 겁나요?”

검은 머리카락에 회색 눈. 윈터 가문의 특징을 그대로 타고난 성녀를 바라보았다. 그도 저것을 처음 봤을 때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런저런 추측도 해 보았지만 뭐 하나 근거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르기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곧 중요한 시기가 온다는 것을 성녀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조심해서 나쁜 건 없지요.”

“그 아이가 생각보다 잘해 주어서 계획이 빨라졌죠.”

그 아이는 다름 아닌 마린다를 뜻하는 말이었다.

세르기는 문득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의아함을 내비쳤다.

“그런데 어떻게 마린다를 살리셨습니까. 분명 즉사했다고 들었는데요.”

“후작.”

성녀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세상에는 당신이 모르는 것들이 더 많답니다.”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어투에 세르기의 표정이 굳었다.

성녀는 숨기는 게 많았다. 그래서 세르기는 성녀에게 묻고 싶은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왜 윈터 공작이 제단에 손을 대자마자 쓰러진 것인지. 왜 제단에서 손을 떼지 못한 것인지. 어떻게 검은 머리카락에 회색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이것 외에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세르기는 굳이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세르기는 실험만큼이나 궁금증을 해결해 나가는 것을 좋아했고 성녀는 매우 흥미로웠으니까.

‘재미있어.’

이 흥미가 언제 떨어질지 몰라도 세르기는 지금 이것을 즐기기로 했다. 성녀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잠시 굳었던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때, 성녀는 다소 뜬금없는 물음을 던졌다.

“후작, 그대는 흑마법에 대해 얼마나 알죠?”

세르기가 처음 흑마법을 접한 것은 교류가 잦았던 한 자작 가문의 영식의 연회 자리에서였다.

당시 9살이었던 세르기는 주인의 명에 따라 인형처럼 움직이는 모습에 매료되었지만 머지않아 황제가 세뇌 마법을 흑마법으로 구분하면서 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세르기는 흑마법을 잊고 있었지만 대신관과 거래를 통해 세뇌 마법을 접하게 된다.

세르기는 쉽게 말해 천재였다. 그는 남들이 못하는 걸 해냈고 외모와 재력, 집안이 모두 평균 이상이었기에 그는 원하는 것을 쉽게 가졌기에 인생의 무료함을 일찍부터 느끼게 되었다.

이른 나이에 찾아온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세르기는 위험하고 평범하지 않은 것이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인체 실험으로 이어졌고 때마침 대신관이 원하는 것이었다.

세르기는 놀라운 발상을 해냈는데 바로 사람의 몸에 신성력을 주입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실제로 그것을 실행하고 성공시켜 대신관과 거래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마다 체질에 따라 성공 확률이 달라지기 때문에 실험은 도박에 가까웠다. 100명을 실험해야 10명이 겨우 나올 정도였다.

처음에는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빈민가에서 사람을 구해 왔으나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서 빈민가 사람들이 몸을 사리자 다음은 노예 시장이었다.

사람들의 보는 눈이 있는 탓에 노예 시장도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는데 마침 그때 대신관이 도움을 주었다. 바로 세뇌 마법에 능한 주술사들을 보낸 것이다.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게 주기적으로 측근들을 교체하던 세르기는 괜한 인력 낭비를 멈출 수 있었다. 세뇌 마법이 있다면 평생 비밀이 누설될 걱정 없이 똑같은 측근들을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익숙한 것이긴 하죠.”

“그럼 다섯 영웅 중 ‘미지의 존재’에 대해 아세요?”

성녀의 질문은 어딘가 모르게 주제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세르기는 의아하긴 했으나 고개를 내저었다.

“워낙 알려진 정보가 없는 인물이 아닙니까. 실제로 존재했던지도 모르는 인물이고.”

기록도, 알려진 것도 없다 보니 그런 존재가 있긴 했냐는 말이 꼭 입방아에 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네 영웅들은 모두 후손을 남겼고 그 증거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정령사는 비록 몇십 년 전 대가 끊겼지만 다른 세 영웅의 후손들을 버젓이 살아남았다. 대를 이었다는 증거가 없는 ‘미지의 존재’에 대해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성녀가 직접 기록한 것을 보면 ‘미지의 존재’는 평범한 인간이었다고 해요.”

“평범한 인간 말입니까?”

“네.”

다섯 영웅 중 하나가 평범한 인간이라니 세르기는 미간을 좁혔다.

“마나도, 마력도, 신성력도 전혀 통하지 않는.”

“그런….”

“그래서 미지의 존재는 네 영웅의 방패막으로 쓰였답니다.”

마나도, 마력도, 신성력도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은 무적이라는 것도 되지만 곧 좋은 인간 방패가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 그 ‘미지의 존재’는….”

“기록에 의하면 정말 방패로 만들기 위한 실험을 했다는데….”

세르기는 눈을 반짝였다. 살아 있는 인간을 방패로 만들다니, 이런 실험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기에 세르기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글쎄요. 그 부분은 찢어져 있어서 나도 모르는데.”

성녀는 무신경하게 답하며 머리를 쓸어내렸다. 때마침 마차가 멈췄고 성녀는 세르기를 지나쳐 마차에서 내렸다. 언제 도착한 것인지 신전 앞이었다.

세르기는 성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성녀의 기록장이 따로 있다는 건가.’

어쩌면 살아 있는 생물을 물건으로 만들 방법을 찾을지 모른다. 세르기가 학구열에 불타 성녀의 기록장을 구할 방도를 차근차근 정리하던 와중이었다.

“후작, 때론 너무 많은 사실을 알고 있는 게 독이 될 때가 있어요.”

마치 그의 생각을 꿰뚫은 듯한 경고의 말에 세르기가 흠칫 굳었다.

“윈터 공작가를 칠 준비 하세요.”

성녀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신전에 들어온 성녀는 달라붙는 신관들을 물리고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의 깊은 곳으로 향하는 성녀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오자 성녀는 마차에 내리기 전 눌러썼던 로브와 가면을 벗었다.

‘그 표정 정말 웃겼는데.’

황녀의 놀란 얼굴을 떠올린 성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렇게 닮았나.’

황녀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굴었다.

성녀는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확실히 닮았다. 빌어먹게도 진한 윈터 가의 핏줄 탓에 어릴 적부터 갇혀 지내 왔다.

‘아는 눈치는 아니던데.’

예상했던 대로 에드먼은 데미안에게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부터 친모가 정체가 무엇인지.

성녀는 이내 걸음을 멈추고 길게 내려온 넝쿨을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어두운 동굴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습한 곳을 조금 지나자 낡은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음? 없네?”

성녀는 텅 빈 제단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빠져나간 모양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의 목표는 달성했고 이제 에드먼은 관심 밖이었다.

“어디 한번 볼까?”

성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제단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

“…없어.”

분명 ‘미지의 존재’의 힘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제단은 텅 비어 있었다.

***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방금 진료를 끝내고 온 뉴벨 남작 부인은 어두운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맥도 느려지셨고 기도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그녀가 방금 진찰한 사람은 다름 아닌 다프네였다.

다프네가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났으나 깨어나기는커녕 점점 건강이 악화되고 있다. 급하게 신성력이 든 마력석을 구했으나 질이 낮아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하루에 마력석 두 개 정도면 상태가 호전하던 다프네의 몸은 점점 많은 양의 마력석이 필요하게 되었다. 지금으로서는 마력석을 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이대로 계속 대량의 마력석을 한꺼번에 모은다면 곧 황제가 눈치 챌 것입니다.”

뉴벨 남작 부인이 나가자 요한은 곧바로 말을 꺼냈다.

“더군다나 황제는 현재 각하께 강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황제가 눈치채도 상관없다.”

요한의 말에 에드먼은 멍하니 대꾸했다.

“다프네를 살릴 방도가 생각나지 않아.”

“각하, 마님이 언제 깨어나실지도 모르는 마당에 너무 위험한 일을 강행하고 계시는 겁니다.”

“요한.”

“각하, 다른 방도가 있습니다.”

내내 허공에 두었던 에드먼의 시선이 요한에게로 옮겨졌다.

“다른 방도라니?”

“우연히 듣게 된 방도인데… 별로 추천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말해라.”

“너무 위험하고 모험적입니다.”

“말해.”

에드먼의 단호한 태도에 말을 먼저 꺼낸 이는 요한임에도 그는 잠시 망설였다.

“북부 설산에 커다란 마력석이 묻혀 있다고 합니다. 그 마력석은 대전쟁 당시 영웅들이 활용했던 마력석으로 방대한 신성력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확실한 정보인가.”

“확실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 저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에드먼은 이내 침묵했다. 요한의 말대로 이것은 지나치게 위험하고 모험적이다. 언제나 흰 눈으로 뒤덮인 설산은 마물들의 소굴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북부로 간다면 다프네를 데리고 가야 할 텐데 그렇게 된다면 마력석을 구하는 것이 더 어려워질 테고 자칫하다가는 다프네를 잃을 수도 있다.

‘현재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에드먼은 요한의 말을 되짚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북부로 간다.”

다프네를 살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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