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소공작님.”
갑작스레 들리는 소리에 데미안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를 벤자민이 서 있었다.
“문을 여러 번 두들겼는데…”
“아, 일에 집중하느라.”
데미안은 잠시 눈을 뗐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잠은 주무셨습니까?”
“잤다.”
“언제요?”
서류를 읽어 내리며 대답하던 데미안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언제 잤는지 기억이 흐릿했다.
벤자민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따듯한 차를 내려놓았다.
“일을 훌륭하게 처리하시는 건 정말 좋습니다. 하지만 몸이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시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데미안은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머금었다. 잔소리를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잘 아는 벤자민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데미안이 갑자기 잠도 자지 않고 서류를 보기 시작한 것은 마님의 자살 소식을 알게 된 후부터라는 것을 듣게 된 벤자민이 며칠 동안 그저 이 상황이 되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있다간 데미안은 정말 쓰러질 것이다. 벤자민은 쌓여 있는 서류를 챙기기 시작했다.
“남은 서류는 잠을 푹 주무신 오후에 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요한과 제가 검토하고 있겠습니다.”
어디서 그런 속도가 나온 것인지 벤자민은 빠르게 집무실을 나갔다. 순식간에 서류를 챙겨서 사라졌고 데미안은 뒤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이내 털썩 앉았다.
문득 본 손은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벤자민의 말대로 데미안의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온종일 의자에 앉아 서류를 보고 밤을 새우는 일까지 벌어지자 몸에서 이상 신호를 보내왔다.
데미안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에드먼 마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노력하지 않으면 황실이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벤자민의 부탁대로 조금이라도 잠을 청하기 위해 두 눈을 감아 보았다. 그러자 어두운 시야 너머로 누군가의 모습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
오늘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듯 두 다리가 기이하게 뒤틀린 모습의 다프네였다.
다프네는 피에 젖은 옷을 질질 끌고 데미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데미안이 잠을 이룰 수 없는 이유는, 꿈에서 다양한 죽음을 맞이한 채 나타나는 다프네 탓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다프네는 속삭였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내가 죽었어!”
다프네의 마른 손가락이 데미안의 목을 움켜쥔 순간, 그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벤자민이 나타났다.
벤자민이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데미안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돌아오셨습니다.”
에드먼이 사라지고 일주일 후, 데미안이 깨어난 지는 사흘 만에 에드먼이 돌아왔다.
품 안에 숨도 쉬지 않고, 심장도 뛰지 않는 다프네를 안고.
***
문이 열렸다.
문밖에 서 있던 이들이 일제히 밖으로 나온 뉴벨 남작 부인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부인.”
벤자민이 제일 먼저 물었다.
“마님은… 마님은 괜찮으십니까?”
그렇게 묻는 벤자민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봤다. 마님의 표정이 시체처럼 창백하고 몸은 잔뜩 굳어 있다는 것을.
“…숨이 멈추셨습니다.”
아. 벤자민은 눈을 감았다.
다프네를 방 안에 내려놓고 나온 순간부터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앉았던 에드먼이 뉴벨 남작 부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에드먼은 다프네가 올곧게 누워 있는 침대로 향했다.
“다프네.”
에드먼은 손을 뻗어 다프네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었다. 평소보다 더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은 윤기 하나 흐르지 않았다. 시체의 머리카락처럼.
“정말입니까.”
어느새 방 안으로 들어온 데미안이 물었다.
“정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겁니까.”
“…죽지 않았다.”
데미안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다프네의 얼굴은 창백했으며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몸은 뻣뻣했고 아무런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프네는 죽었다.
데미안은 그저 하염없이 다프네를 응시하는 에드먼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아버지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어머니가 이렇게 되실 동안 아버지는…!”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 분노를 도로 삼켰다.
에드먼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모른다. 내가 뭘 했는지.”
에드먼은 마치 고장 난 것 같았다.
밖에 있던 벤자민과 요한, 알렉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각하, 정보 길드장에게 받은 마력석이 있지 않습니까.”
에드먼은 고개를 번뜩 들었다. 첫 번째 성녀는 심장이 멈춘 죽은 사람조차 살려 냈다는 기록이 있다. 에드먼은 허둥지둥 품 안에서 두 개의 마력석을 꺼내 다프네의 가슴께에 올렸다.
그리고 약간의 힘을 주자 마력석이 밝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빛은 다프네의 몸 안으로 흡수되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에드먼은 빛을 잃은 신성력을 내팽개치고 다른 마력석을 똑같이 다프네의 가슴께 올렸다. 남은 하나는 어깨의 상처를 치료해야 하는데도 에드먼은 손놀림은 거침없었다.
이내 또다시 터져 나온 빛이 다프네의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지독히도 조용한 적막이 흘렀다.
“…방금.”
에드먼은 다프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심장이 뛰었다.”
그 말에 뉴벨 남작 부인은 달려와 다프네의 손목을 쥐었다. 두 눈을 꾹 감고 손목 위에 올린 두 손가락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한참 후, 뉴벨 남작 부인은 눈을 번쩍 떴다.
“…뜁니다.”
분명 멈춰 있던 다프네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주 희미하고 약하지만, 심장이 뛰어요. 하지만 너무 흐릿해서… 언제 다시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맥을 짚고 한참이 흐른 후에야 느껴질 정도로 희미한 박동을 에드먼이 어떻게 들은 것인지 몰라도 다프네의 상태는 아직 위태로웠다.
“아무래도 신성력이 들어간 마력석이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
harbaragi_syk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리는 엘리자벳의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일린임을 본 엘리자벳은 상대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만요.”
“천천히 볼일 보고 오세요.”
엘리자벳이 방을 나오자 일린이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내가 방해하지 말라고 한 거 잊었어? 이게 얼마나 힘들게 잡은 건데….”
“윈터 공작이 돌아왔습니다.”
“…정말?”
눈매를 일그러트리던 엘리자벳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하지만… 둘을 살해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엘리자벳은 애당초 자신이 내린 첫 명령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일린의 충성심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었기에 실패했다는 말에도 크게 실망한 기색이 없었다.
“우리가 배후에 있다는 것을 들키지만 않으면 돼.”
“혹시 몰라 살수의 시체를 치우기 위해 갔는데… 조금 이상했습니다.”
“뭐가?”
“재가 한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엘리자벳은 미간을 좁혔다.
“난 또 뭐라고.”
엘리자벳은 손을 휘저으며 뒤돌았다.
“그런 쓸모없는 걸 왜 내게 말해?”
일린은 그 숲에는 재가 자연적으로 생길 수 없다며 설명하려고 했으나 엘리자벳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빨랐다.
‘하여튼 멍청해.’
일린과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레이스의 깔끔하고 완벽한 일 처리가 그리워졌다. 지금이라도 버리고 다른 이로 교체할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 그럴 여유가 없었다.
“무슨 일 있나요?”
방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왔다.
“아니에요. 제가 기다리게 했네요, 성녀님.”
하관만 드러낸 흰 가면을 쓴 성녀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맨 처음에는 기괴한 가면에 시선을 잡혀 몰랐지만 조금 드러난 하관으로 보아하니 성녀는 꽤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어딘가 익숙하단 말이야.’
하관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않자 성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 아니요. 굉장히 아름다우실 것 같은데 왜 가면을 쓰고 계시는지 의아해서요. 별거 아니랍니다.”
엘리자벳은 대충 다음 주제로 넘어가려고 했다.
성녀가 황궁에 들어오는 때를 맞춰서 우연히 만난 척 티타임을 유도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돈과 공을 들였는지 모른다.
하루빨리 성녀와 친분을 쌓을 계획인 엘리자벳에게 가면 따윈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흐음, 궁금해요?”
그러나 성녀는 의외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황녀님께만 보여드리는 거예요.”
성녀는 미소를 지으며 가면을 들어 올렸다.
***
“뭐라고요?”
수하에게 말을 전해 들은 세르기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황녀님께서 성녀님과 함께 궁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
하여튼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는 황녀의 행동에 세르기는 한숨을 내뱉었다.
근 며칠 동안 성녀와 연락이 닿지 않다가 오늘 황궁에 들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연히 자신을 찾아오리라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던 세르기는 황녀의 궁으로 향했다.
“여기 계셨군요.”
“아, 블레드 후작.”
성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황녀님, 오늘 정말 즐거웠답니다. 다음에 또 만나요.”
“…네.”
엘리자벳은 어딘가 모르게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상황을 보던 세르기는 성녀가 나오자마자 경고했다.
“황녀나 황태자는 건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어머, 그냥 비밀 하나를 말해 줬더니 저리 된 거예요.”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린 성녀는 닫힌 문을 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한편 방에 홀로 남게 된 엘리자벳은 기억을 더듬었다.
‘방금… 뭐였지?’
성녀는 가면을 벗었다. 엘리자벳은 자신의 예상대로 성녀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성녀가 로브까지 벗자 검은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렸다. 회색 눈동자를 담은 눈이 초승달처럼 곱게 휘었다. 성녀는 놀랍도록 에드먼과 닮아 있었다.
‘아니, 아니야.’
에드먼이 아니라 데미안이다.
하지만 한눈에 봐도 성녀는 데미안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
그것은 즉… 소공작이 성녀를 닮은 것이었다. 마치 모자지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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