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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79화 (79/145)

79화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짙어지던 칼리토는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 이런 건 나중으로 미루고.”

한순간에 표정을 바꾼 칼리토가 말을 이어갔다.

“지금 주시하고 있는 인물은 황제의 애첩이다. 내가 알아본 결과 현재 쓰는 린다라는 이름은 가명이며 진짜 이름은 마린다야.”

“마린다….”

왠지 모르게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그래. 윈터 공작가에서 한평생 일해 온 하녀가 맞아.”

“그럴 리가요.”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요한이 끼어들었다.

“그 하녀는 자살했습니다.”

그 말에 이번에는 칼리토가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조사한 것은 정확한 정보다.”

확신을 가진 칼리토의 어투에 데미안이 의아함을 느꼈다.

그것을 알아챈 칼리토는 별게 아니라는 듯 넌지시 말했다.

“아, 내가 정보 길드의 길드장이야. 대륙 내에서 내 손을 거쳐 가지 않는 정보가 없기 때문에 이 정보는 정확해.”

“…또 숨기시는 게 있습니까?”

“생각나면 바로 말해 주지.”

칼리토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데미안은 한숨을 삼키며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목이 부러져 즉사한 것을 제가 두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흑마법도 아니고 죽은 사람이 다시 되살아 나는 건 불가능합니다.”

시체를 직접 목격했다는 요한의 말에 칼리토는 다시 한번 조사해 보겠다 덧붙였다.

“일단 동일 인물인지 아닌지 사실 여부는 나중에 따지고, 이 애첩은 수상한 점이 많아.”

먼저 첫 번째, 누가 황제에게 바친 것도 아니고 황실에서 일한 적도 없음에도 단번에 애첩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종종 환각을 보고 이상 증세를 보이던 황제의 상태가 그 여자를 애첩으로 들인 후 더욱더 심각해졌다.

베벨록 공작이 자신의 딸을 황후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직접 발 닦개가 되어 황실을 주시하고 있는 와중에 아무런 뒷배도 권력도 없는 애첩이 황제의 사랑 하나도 황실을 버티고 있을 리 없다.

분명 그 애첩의 뒤를 봐주는 이가 존재했다.

칼리토는 진작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그리고 깊게 그 뒤를 조사해보았다.

“그게 누구입니까?”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칼리토가 심어놓은 첩자는 얼마 전 전갈을 보내왔다. 비공식적으로 치러질 뻔한 에드먼과 엘리자벳의 결혼식에서 나타난 이의 정체를.

“신전이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성녀였다.

***

“다행히 몸 상태가 정말 좋아요.”

뉴벨 남작 부인은 안도했다. 데미안의 몸을 살펴본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조금 살이 빠졌을 뿐 일상생활은 평소처럼 유지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데미안은 진찰을 위해 풀었던 셔츠의 단추를 채우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듣기론 마나 충돌이 꽤 컸다고 들었는데 내가 어떻게 깨어난 것이지?”

단순한 물음이었으나 뉴벨 남작 부인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부인?”

“아….”

뉴벨 남작 부인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는 데미안의 시선을 휙 피했다.

“글,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정말 운이 좋았던 거죠.”

운이라….

뉴벨 남작 부인의 행동이 다소 이상했지만, 그녀의 말은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저 모두가 뉴벨 남작 부인처럼 운이 좋았다고 답했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

“아닙니다. 그럼 쉬세요.”

뉴벨 남작 부인은 허둥지둥 방을 나갔다.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데미안은 한숨을 삼켰다.

에드먼이 없는 저택은 데미안이 관리해야 한다. 모든 선택지가 데미안의 손으로 넘어올 것이다.

‘잘해야 해.’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까지.

보이지 않는 책임감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

잠든 사이 일어난 이들을 받아들일 시간도 없이 갑자기 생긴 황태자라는 협력자의 등장은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데미안은 아직도 칼리토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데미안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자세히 들을 순 없었지만, 데미안은 지금 윈터 공작가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대폭 줄어든 사용인과 강화된 경비가 그 증거였다.

‘…어머니가 떠난 이유가 아버지의 재혼 때문인가.’

이혼 후 바로 미련 없이 떠났을 다프네가 떠올랐다. 떠났을 때 다프네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토록 바라던 것을 이룬 셈이니 후련한 얼굴이었을 것이다. 나 같은 건 생각도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 그러니 떠난 거겠지.

데미안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다프네로 이어지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연무장을 향했다.

아직 이른 새벽이었기 때문에 조용한 연무장에서 그는 홀로 검을 휘둘렀다. 숨이 가빠오면서 다프네를 향해 뻗어 가는 생각이 점점 흐릿해지다가 머지않아 사라졌다.

한참 후, 데미안은 떠오르는 해를 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셔츠를 끌어 올려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 내던 데미안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사용인 두 명이 짐을 든 채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데미안을 발견하지 못한 사용인들은 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들은 게 있는데 말이야.”

얼핏 들리는 말소리와 함께 사용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아차 싶어서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찰나였다.

“마님 말이야.”

“마님? 마님이 왜?”

“마님이 약혼식을 망치기 위해 약혼식 날 각하를 찾아가 눈앞에서 자살하셨대.”

“뭐? 자살?”

데미안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목소리 좀 줄여. 나도 지나가다가 우연히 엿들은 거란 말이야.”

“아, 미안. 근데 그게 사실이야?”

“그렇다니까? 분명 내가 제대로 들었어.”

“그럼 각하께서 실종되신 게 아니라 볼일을 보시러 떠나신 게 맞는 거네? 각하가 자살한 마님을 찾으러 갈 일도 없고 말이야.”

“그런 거지, 뭐. 너 이거 진짜 비밀이다?”

“당연하지. 나 입 무거운 거 알잖아.”

사용인의 대화 소리가 멀어지다가 사라졌다. 그런데도 데미안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데미안은 머릿속을 조잡하게 떠다니는 단어를 하나씩 주워 담았다.

마님의 자살.

“…아.”

데미안은 눈을 깜빡였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숨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미안은 거친 숨을 쉬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숨을 들이켜고 있음에도 부족한 산소를 채우기 위해 몸이 잘게 떨렸다.

‘그럴 리 없는데.’

어머니가, 자살을?

데미안은 더듬더듬 생각을 이어 갔다.

왜? 도대체 왜?

데미안은 비틀거리며 옆에 나무를 짚었다.

‘…확인해 봐야겠어.’

데미안은 곧바로 요한을 찾아갔다. 요한 역시 서류를 보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깨어 있었다.

“소공작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게 사실이냐.”

데미안의 물음에 요한은 올 것이 왔다는 듯한 담담한 표정이었다. 끝까지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예상보다 일렀다.

요한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왜 숨긴 거지?”

데미안은 의외로 침착하게 되물었다.

“…이제 막 깨어나신 소공작님께 하기에는 그다지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요.”

“시체는? 사인은 무엇이냐.”

“말씀드렸다시피 각하는 마님을 찾으러 가셨습니다. 마님은 분명 멀쩡히 돌아오실 겁니다.”

묘한 확신이 있는 어투에 데미안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돌아섰다.

마음이 복잡했다. 하필 다프네에게 한 마지막 말이 모진 말이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문득 다프네가 했던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녀는 친모의 유품을 숨겼다. 데미안은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그때 두통이 따라왔다. 데미안은 방으로 향하던 것을 틀어 뉴벨 남작 부인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부인. 머리가 아파서 그런데 두통약이 있다면….”

챙그랑, 하는 날카로운 소리에 데미안은 문을 벌컥 열었다.

“소, 소공작님.”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들어오지 마세요!”

뉴벨 남작 부인은 다급히 소리쳤지만 데미안은 보고 말았다.

“…그게 무엇이지?”

뉴벨 남작 부인이 깨트린 것은 작은 병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건 결단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왜 피가 든 병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코를 찌르는 이 비릿한 냄새는 피가 틀림없었다. 그저 다른 용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데미안은 달랐다.

“어제 내 방에서 저것과 똑같은 약병을 발견했다. 내용물도 같은 것이겠지.”

“소공작님….”

“진실을 말해.”

뉴벨 남작 부인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허리를 들어 올렸다.

불안에 떨던 뉴벨 남작 부인은 머지않아 고개를 들었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믿어 주셔야 합니다.”

뉴벨 남작 부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것은 마님의 피입니다.”

자신의 방으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제 방으로 돌아온 데미안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마님의 피입니다. 저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마님은 이것을 소공작님께 먹여 달라는 부탁을 하신 채 떠나셨습니다. 처음에는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각하께서도 없고 소공작님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니 결국 피를… 먹였습니다. 놀랍게도 몸 상태는 빠르게 호전되었고 고작 사흘 만에 소공작님께서는 깨어나셨습니다.”

그녀가 이런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데미안은 잘 알았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뇌리에 남는 것은 다프네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하룻밤 동안 뽑아낸 피의 양이었다. 뉴벨 남작 부인의 방 한구석에 아직 한가득 남은 피를 본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가슴이 점점 옥죄어 오는 것을 빼면 그다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제 소원이요? 당신이 사라지는 겁니다.”

데미안은 잊은 기억 속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랬다. 이 상황은 과거의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것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죽음까진 바란 적 없다.

‘내가 과연 없었을까.’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어머니의 죽음을?

데미안은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다프네의 죽음을 바란 적 없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그는 다프네가 살아있다는 요한의 말을 믿고 싶었다. 다프네가 살아있으면 했다.

다프네를 만난다면 데미안은 말할 것이다. 왜 자신을 살렸냐는 물음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차가운 태도로 대해도 괜찮고 모진 말을 하며 손을 내쳐도 되니까 돌아오라고. 그때 한 말은 모두 거짓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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