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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78화 (78/145)

78화

“블레드 후작.”

갑작스러운 세르기의 등장에 에드먼은 곧바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전 도움을 주러 온 겁니다.”

세르기는 가까이 다가왔다.

“누이가 이곳으로 온 이유를 아십니까?”

뜬금없는 물음에 에드먼이 미간을 좁히자 세르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하기야 누이가 공작님께 말했을 리 없죠.”

세르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에드먼과 데미안을 향한 다프네의 마음은 대충 눈치채고 있었으나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성녀의 계획대로 다프네가 움직였으나 신전은 포기할 줄 알았다. 그러나 다프네는 끝내 찾아냈다.

굳이 이것들을 에드먼에게 말할 생각이 추호에도 없는 세르기는 뒷말을 삼킨 채 싱긋 웃었다.

“누이는 소공작을 살리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세르기가 술술 다 말하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다프네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한편 에드먼은 세르기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프네의 떨리는 눈동자가 마치 진실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에드먼은 물었다.

“내가 그대의 말을 어떻게 믿지?”

“제가 설마 조카를 해치기라도 하겠습니까.”

에드먼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세르기는 제단을 가리켰다.

“저 제단 위에 소공작의 목숨을 구할 약이 있습니다.”

함정이다.

다프네는 입을 뻐끔거렸다. 너무나도 눈에 보이는 함정이다. 그것을 에드먼이 모를 리 없었기에 다프네는 황급히 그를 돌아보았다.

에드먼은 그 제단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에드먼.’

다프네는 그를 불렀다. 이상하게 몸뿐만 아니라 성대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겨우 입술만 뻐끔거렸다.

그러나 어떻게 안 것인지 에드먼은 고개를 돌렸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저 제단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다프네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으나 실상은 머리카락만 겨우 움직일 정도였다.

‘안 돼요.’

입 모양을 발견하지 못한 에드먼은 세르기를 향한 경계를 놓지 않은 채 다프네를 내려놓았다. 다프네는 손에 힘을 주었지만, 손가락이 겨우 까닥일 정도였다.

제단에 미리 가 있는 세르기가 에드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무래도 공작께서 직접 확인하시는 게 낫겠죠.”

에드먼이 제단으로 가까워질수록 다프네의 불안감이 더욱이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에드먼이 제단 앞에 선 순간, 세르기가 손을 뻗었다.

에드먼이 재빨리 몸을 피해 급소가 많은 상체를 뒤로 뺐으나 세르기의 목적은 그곳이 아니었다. 세르기는 에드먼의 손을 붙잡아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무슨….”

상황을 파악한 에드먼은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세르기의 손아귀에서 힘을 주었다. 그러나 접착제가 달라붙은 듯 에드먼의 손바닥은 제단 위에 달라붙은 채 움직이지도 않았다.

“제 역할은 여기가 끝입니다.”

세르기는 에드먼의 손이 제단 위에 붙은 것을 확인하고는 손을 뗐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뒷일은 그분의 몫이신지라.”

세르기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후 곧바로 사라졌다.

에드먼은 세르기가 다프네에게 해코지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을 모두 본 후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앞이 흐릿해졌다. 에드먼은 재빨리 허리춤을 더듬었다. 그러나 잡혀야 할 검이 텅 비어 있었다.

에드먼은 그제야 다프네를 급하게 찾으러 나가느라 동굴 안에 검을 두고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사에게 검은 두 번째 목숨과도 같다. 그것을 신경 쓸 겨를도 뛰쳐나왔던 것이었다.

어떻게든 다른 방도를 찾기 위해 몸에 힘을 푼 순간, 입술에 무언가 닿았다.

에드먼은 다프네가 바로 앞까지 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다프네가 입을 맞췄다는 것도 그제야 자각했다.

이내 비릿한 무언가가 입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사고 회로가 느려진 에드먼은 한참 후에야 그것이 피라는 것을 인지했다.

그와 동시에 제단에 붙어 있던 에드먼의 손에 떼어지고 속수무책으로 사라지던 힘이 다시금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위에 있는 다프네의 무게가 점점 내려앉았다.

“이건 저번에 날 살려 준 대가에요.”

속삭인 다프네는 이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다프네?”

다프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쿵, 쿵 뛰는 심상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에드먼은 잘게 떨리는 손을 다프네의 코 밑으로 가져다 댔다.

그 어떤 숨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도.

***

ㅎㅂㄹㄱ

“소공작님!”

소식을 전해 들은 요한은 헐레벌떡 뛰어와 문을 벌컥 열었다.

방 안에는 데미안이 있었다.

그러니까, 침대에 누워 두 눈이 꼭 감겨 있던 데미안이 아니라 두 발로 서 있고 눈을 뜬 데미안이.

“요한.”

데미안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요한은 그제야 멈췄던 몸을 움직였다.

“다행입니다.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요한의 목소리는 볼품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탓에 조금 마른 것을 빼고는 평소와 같은 데미안의 모습에 요한은 안도했다.

“아버지는?”

데미안의 물음에 요한은 감격에 젖은 감정을 뒤로 한 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소공작님께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요한은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는 소공작님께서 잠들어 계실 동안 일어난 것들입니다.”

요한은 이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

한꺼번에 수많은 이야기를 전해 들은 데미안은 요한의 말이 끝나자 그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하셨고 황녀님과 결혼하려 하셨으며 어머니가 실종됐다고?”

“예.”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가 찾으러 가셨기에 지금 요한 네가 임시 공작이고?”

“예. 하지만 소공작님께서 깨어나셨으니 몸을 회복하신 후에 권한을 소공작님께 돌려 드리겠습니다.”

요한은 일부러 다프네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것을 숨겼다. 그것을 제외하고도 데미안은 충분히 당황한 상태였다.

그저 조금 긴 잠에서 깬 것 같은데 그사이 수많은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현재 소공작님의 앞으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예. 워낙 만나기 힘든지라 지금밖에 시간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예사 인물이 아닐 터이다.

“만나 주실 수 있을는지요.”

“가지.”

요한은 데미안을 이끌고 어느 방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이네, 소공작.”

데미안은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잠시 요한을 돌아보았다. 요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가 말하는 손님이 황태자가 맞다는 것을 알게 된 데미안은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전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비록 자세한 내막을 전달받지 못했지만 적어도 현재 황실과 윈터가 사이로 얼음장 같은 기류가 흐른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황태자가 아무런 시종 없이 윈터가를 찾아온 이 상황이 이상했다.

“몸은 좀 괜찮나?”

“…괜찮습니다.”

데미안은 칼리토의 말에 답하면서도 경계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난 그대들의 편이야.”

뜬금없는 칼리토의 말에 데미안은 미간을 좁혔다. 제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칼리토는 덧붙였다.

“자세히 말하자면 나는 황실을 적대하고 있네.”

“…전하께서는 황태자이십니다.”

“글쎄.”

칼리토는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나는 단 한 번도 내 몸에 흐르는 괴물의 피를 인정한 적 없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상체를 끌어당겼다.

“황실은 그대들이 생각하고 아는 것 이상으로 썩어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또 아무도 모르게 묻히겠지.”

담담히 칼리토의 말을 듣고 있던 데미안이 물었다.

“제가 어떻게 전하의 말을 믿겠습니까?”

막말로 이것이 속임수일지도 모른다.

“뭐, 좋아.”

칼리토는 데미안의 반응을 예상한 것인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누군가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나타난 순간까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데미안의 손이 움찔거렸다.

칼리토는 데미안을 향해 서류를 쭉 밀었다.

“이게 뭡니까.”

“내 모든 약점이야.”

칼리토는 자신의 약점을 직접 내민 사람답지 않게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몸을 깊게 묻었다.

서류에는 칼리토의 약점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불법 노예 시장을 열고 금지된 약물로 마약 파티를 열고 심지어 하녀를 임신시키고 태아와 함께 죽였다는 내용이 있었다.

“아, 그 하녀 이야기는 내가 한 게 아니야. 호위도 붙여 주었고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서 아이를 키우며 잘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어쨌거나 마지막 하녀의 이야기를 제외하면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모든 약점이 고위급 귀족들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다.

칼리토의 약점이 밝혀지면 가장 먼저 목숨줄이 위태로워질 이들이.

“만약 내가 정 그리 의심되면 이것을 언론에 터트려.”

“이것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그건 그대의 선택지야.”

칼리토는 여기까지가 최선이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데미안은 서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한참 후 입을 뗐다.

“전하의 최종 목적지는 어떻게 됩니까?”

생각했던 말이 아니었던지라 칼리토는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잠깐 침묵했다.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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