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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77화 (77/145)

77화

어스름한 새벽이 내려앉은 시간. 해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 고요한 새벽의 소리에 요한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눈 아래 짙게 내려앉은 다크써클과 푸석푸석한 피부. 요한은 며칠 사이 눈에 띄게 살이 빠져 있었다.

하루걸러 밤을 새우니 몸이 상할 수밖에 없었으나 요한은 근 며칠 동안 가장 정신이 멀쩡했다.

“후.”

드디어 마지막 서류의 검토를 마친 요한은 옅은 한숨과 함께 펜을 내려놓았다.

요한은 뻐근한 목을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니를 거르는 일이 반복되니 순간 머리가 핑 돌았기에 요한은 급히 책상을 짚고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그런 그의 시선에 창밖이 보였다. 해가 뜨기 전 조용한 새벽하늘을 요한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드먼이 떠난 지도 어느덧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비공식으로 치러진 결혼식에 에드먼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황녀와 에드먼의 얘기를 하느라 바빴고 황실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황실은 여전히 아무런 입장도 발표하지 않았다. 윈터 공작가가 굽히고 들어오길 바라며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만 요한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굽히고 들어간다고 쳐도 황실에서 어떤 대응을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에드먼은 결혼식뿐만 아니라 약혼식도 제대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황제가 둘의 결혼을 포기했을 수도 있다.

굽히고 들어가자마자 결혼이 파투 났다고 발표하여 윈터 공작가가 난처한 상황으로 돌아갈 수 있다.

숨 막히는 눈치 싸움이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에드먼이 사라진 것을 황실이 알게 된다면 요한이 우려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아무리 현재 요한이 에드먼을 대신하여 공작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는 진짜 공작이 아니다.

황실이 이를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할 가능성이 작지 않았기에 요한은 하루하루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 데미안은 깨어날 기미조차 없다.

막막한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려 하자 요한은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돌아오시겠다 하셨으니까.’

에드먼은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하는 사람은 더욱이 아니고.

요한은 에드먼을 믿었다. 그간 쌓아 온 신뢰는 고작 사흘 만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었다.

요한은 이내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도착한 곳은 에드먼의 집무실이었다.

요한은 에드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문을 두들긴 후에 안으로 들어섰다.

사흘 동안 처리한 서류를 가져다 놓기 위함이었는데 잔뜩 어질러진 책상 탓에 놓을 곳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요한은 일단 가져온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만 만들기 위해 책상을 정리했다.

집무실에는 사용인이 들어오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책상은 단 사흘 만에 먼지가 조금 쌓인 상태였다.

책상을 정리하던 요한은 문득 서류 더미 아래 깔린 것을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요한은 조심스럽게 서류를 헤집어 손을 뻗었다.

“…….”

빈 액자였다. 요한은 이 액자에 어떤 것이 끼워져 있었는지 잘 안다.

‘…마님의 초상화가 끼워져 있던 것인데.’

이게 왜 여기 있지? 하는 의아함과 함께 이곳이 에드먼의 집무실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에드먼이 북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요한은 삐걱거리듯 액자를 내려놓았다.

“나는 다프네를 찾으러 갈 거다.”

요한은 서류를 내려놓고 황급히 에드먼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마치 에드먼의 꼭꼭 숨겨진 마음을 들여다본 기분이었다. 요한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설마 각하께서는 마님을….’

요한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순간 모든 퍼즐이 맞춰진 듯한 느낌에 요한은 어깨를 떨었다.

어쩌면 에드먼이 황녀와 결혼하려는 이유도 다프네를 황궁에서 꺼내기 위함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한은 문득 기억 한 조각을 끄집어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에드먼과 다프네의 결혼식이 있기 전이었다. 결혼식에 걸 초상화를 위해 둘은 만났고 에드먼은 생각보다 이르게 나왔다.

그는 자신의 붉어진 얼굴을 자각하지 못한 듯 도망치듯 빠르게 방을 나왔다. 다 닫히지 않은 문 너머로 다프네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요한은 그때 느낀 위화감이 뭔지 지금에서야 알아차렸다.

왜 진작 이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일까. 어쩌면 나는… 그것을 눈치챘음에도 외면했던 것은 아닐까.

요한은 혼란스러움에 사로잡혀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요한.”

갑작스러운 부름에 요한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남작님.”

뉴벨 남작은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대를 찾아온 사람이 있어.”

“그게 누구입니까?”

“조용히 따라오게.”

뉴벨 남작은 요한의 물음에 답하는 것 대신 계속 주변을 흘끔거리며 그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빠르게 걸어가던 뉴벨 남작은 어느 방 앞에 멈춰서더니 말했다.

“내게 신성력이 담긴 마력석을 두 개 넘겨줬던 정보 길드장을 기억하겠지.”

“예. 기억합니다.”

“…그가 찾아왔네.”

“예?”

난데없는 길드장의 방문에 요한이 당황스러워하는 찰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방 안에 있는 이를 발견한 요한의 눈이 한없이 커다래졌다.

“…황태자 전하.”

그곳에 있는 것은 칼리토였다.

뉴벨 남작 부인은 어딘가 모르게 부산스러운 저택 분위기에 굽혔던 허리를 폈다.

평소와 같은 저택이었기에 뉴벨 남작 부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병에 남은 피를 마저 데미안의 입안으로 떨궜다.

“내일 봬요, 소공작님.”

오늘도 돌아오는 대답 없는 인사말을 건넨 뉴벨 남작 부인이 문을 닫고 얼마 후.

움찔.

데미안의 손이 움직였다.

***

톡.

톡.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에드먼은 눈을 느리게 떴다. 흐릿한 시야로 어두운 동굴 천장이 들어왔다.

무심코 기억을 되짚던 에드먼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밤새 숨과 살을 섞었던 기억이 적나라하게 눈앞에서 펼쳐졌다.

정말 오랜만에 잠을 푹 잔 에드먼은 눈을 감으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옆자리를 더듬었다.

그러나 익숙한 살결 대신 차갑게 식은 바닥이 만져졌다.

에드먼은 눈을 번쩍 떴다. 밤새 그의 옆자리를 지키던 체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에드먼은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텅 빈 자리 위에 놓인 휘갈겨 쓴 쪽지 하나였다.

돌아가요.

“…다프네.”

***

순간 들리는 목소리에 다프네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우거진 밀림일 뿐 사람의 흔적 따윈 보이지 않았다.

하필이면 에드먼의 환청을 들었기에 다프네의 기분이 묘해졌다.

‘…이제 정말 끝이야.’

어제는 단지 한순간의 실수가 아니다. 다프네는 지난 밤, 끊고 싶어도 끊어 낼 수 없었던 이 끈질긴 5년의 세월을 모두 지워 냈다.

그 때문일까 혹사당한 몸과 달리 정신은 매우 맑았다.

다프네는 이른 새벽 짐을 챙겨 동굴을 나와 무작정 걸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 걸었다.

다프네는 정면을 돌아보았다. 몇 날 며칠을 찾아도 나오지 않던 신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깊은 밀림과는 전혀 다른 깨끗한 신전 하나가 서 있었다. 다프네가 그렇게 찾아다녔던, 세르기가 말한 신전임이 틀림없었다.

다프네는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맨몸으로 신전에 들어섰다.

한참을 걷던 다프네는 넓은 공간 속 덩그러니 놓인 제단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는….’

만지는 순간 이상한 열기에 휩싸였던 제단이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은 다프네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니야.’

그러나 번뜩 정신을 다잡았다. 데미안을 살려야 한다. 여기서 세르기가 말한 것을 찾아야만 데미안을 살릴 수 있었다.

다프네는 결혼 후 잔혹한 추위를 뚫고 북부에 도착한 후에야 데미안을 처음 보았다.

에드먼과 똑 닮은 얼굴의 데미안과 에드먼은 다정하게는 아니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뚝뚝 흘렀다.

그 순간 다프네는 벼락에 맞은 듯 몸을 떨었다.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다프네의 몸에 족쇄가 채워졌다.

잔혹하게 죽은 유모와 친모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과 동시에 다프네는 깨달았다. 이 평온한 이들에게 자신이라는 불행이 무슨 영향을 끼치게 될지.

지키고 싶었다. 지켜주고 싶었다.

그것은 다프네의 선택이었기에 후회하지 않고 책임을 물을 생각 따윈 없었다. 곧 떠날 것이고 이것이 마지막이다.

다프네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제단에 가까이 다가갔다. 최대한 제단과 접촉하지 않기 위해 신경 쓰며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세르기가 말한 것은 조금이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럴 리 없어.”

세르기가 제게 거짓말을 했을 리 없다. 그럴 이유가 없다. 골려 먹을 사람도 아닐뿐더러 만약 다프네를 없애기 위함이었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번거로운 작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다프네는 미친 듯이 제단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다프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유일한 희망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사라지자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하, 하하….”

다프네는 입술 사이로 힘 빠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프네.”

또다시 에드먼의 환청이 들렸다.

“다프네!”

환청은 더 가까이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다프네는 저 멀리 다가오는 에드먼을 발견하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그 사이 에드먼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프네의 상태가 이상하다가는 것을 눈치챈 에드먼이 속도를 늦췄다.

“다프….”

“그만, 제발 그만!”

그 외침에 에드먼의 걸음이 멈췄다.

“나를 제발 놔 줘요, 제발!”

다프네는 충혈된 눈으로 에드먼을 바라보았다.

“…돌아가서 얘기합시다.”

“지긋지긋해요. 난, 난 그저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인데….”

지옥에서 벗어났으나 이루어질 리 없는 사랑이라는 족쇄에 속박되었다.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거미줄에 걸린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나비는 더욱이 단단히 달라붙어 떨어질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나비는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자신의 날개를 잘랐다. 날개가 잘려 땅에 처박힌 나비는 과연 어떻게 됐을까.

다프네의 숨이 점점 가빠 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프네가 휘청거리자 에드먼이 손을 뻗어 품에 안았다.

“다프네. 다프네?”

에드먼은 다급히 다프네의 뺨을 잡아 얼굴을 들어 올리던 순간이었다.

“저런, 내 누이가 큰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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