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뚝뚝.
어딘가 빗물이 떨어지는 동굴 안은 이제 익숙한 질척거림이 퍼졌다.
에드먼을 떼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살기 위해 코로 숨을 내쉬는 다프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에드먼의 셔츠를 쥔 다프네의 손은 이미 힘이 다 풀렸기에 그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매달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그만….”
간신히 입술이 떨어지자 다프네는 다급히 말했다.
그러자 에드먼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다프네는 숨을 헐떡이며 부족한 숨을 한껏 들이켰다.
“부족합니다.”
에드먼은 낮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마치 긁는 듯한 목소리에 다프네의 뒷골이 오싹해졌다.
다프네는 또다시 고개를 숙이는 에드먼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툭.
그리고 에드먼은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
에드먼은 어둠 속에 있었다.
그는 머지않아 이곳이 자신의 기억 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드먼은 어린 자신이 아버지에게 훈육을 가장한 폭력을 당하는 것을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갈수록 시간은 흘러갔다.
어린 그는 공작 위에 올랐고 전쟁터에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거침없이 움직이던 에드먼의 걸음이 멈춘 것은 다름 아닌 어느 장면의 앞이었다.
“고개 좀 들지.”
그의 말에 앞에 서 있던 여인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프네 블레드입니다.”
차분하면서도 높낮이의 차이가 거의 없는 목소리.
이내 모래처럼 바스러지더니 새로운 장면이 나타났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볕 아래 다프네가 있었다. 소파에 앉은 다프네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햇볕은 그대로 그녀를 비추었다.
에드먼은 그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프네가 눈을 깜빡이자 속눈썹에 내려앉은 빛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착각이 들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햇볕 아래에서 달콤한 색이었다. 만지고 싶을 만큼.
“고마워요.”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에드먼은 눈을 번쩍 떴다.
에드먼은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그는 동굴 한쪽에서 상의를 탈의한 채 누워 있었다.
상체를 일으킨 에드먼은 마지막 기억을 끄집어냈다.
“…….”
입을 맞추고 숨을 섞던 순간을.
에드먼은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끄집어낸 기억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에 두통이 일어나는 머리로 향하던 손이 허공에 멈출 정도로 당황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에드먼은 당황하며 어정쩡하게 들었던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깨어났어요?”
익숙한 목소리에 에드먼은 흠칫, 놀라며 동굴의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다프네가 나타났다. 다프네가 벗은 로브를 털자 빗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습니다.”
에드먼은 다프네의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다프네에게 온 정신이 빼앗긴 바람에 생각 없이 대답하긴 했어도 그의 몸 상태는 정말 괜찮아졌다. 축축 처지던 몸은 훨씬 가벼웠고 두통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에드먼의 대답을 들은 다프네는 이내 자루에 무언가를 담기 시작했다.
“지금 뭘 하는 겁니까.”
“당신한테 필요한 거요.”
알 수 없는 말에 에드먼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시선을 느낀 다프네가 허리를 폈다.
“돌아가야죠.”
“내가… 말입니까?”
“그럼 당신 말고 누가 있겠어요.”
에드먼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는 다프네의 말에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다가 여길 왔는지 몰라도 돌아가야죠.”
에드먼은 번뜩 무언가를 깨달았다. 다프네는 에드먼이 자신 때문에 여기 왔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전혀.
“난 당신 때문에 온 겁니다.”
짐을 챙기던 다프네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프네는 하,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제 굳이 그런 거짓말 할 필요 없지 않아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럼?”
다프네는 에드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날 데려가기 위해 왔다고요?”
“…그렇다면.”
“에드먼.”
다프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상황에서조차 에드먼은 다프네가 자신을 각하라 부르지 않는 것에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린 끝났잖아요. 제발 다시는 이러지 말아요.”
다프네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어서 돌아가요. 당신은 황녀님 옆에 있어야 하는 몸이니까.”
어느새 일어난 것인지 에드먼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에드먼은 물었다.
“내가 황녀의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왜 그런 걸 물어요? 당신은 황녀님과 결혼해야죠.”
다프네는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채 조금은 흥분한 상태였다. 그 물음의 의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 같은 건 그냥 잊어버리고요.”
다프네는 순간 자신이 한 말에 스스로 조소를 삼켰다. 그에게 날 잊을 만한 기억 같은 게 있기라고 할까. 있더라도 그 기억 모두 서로에서 안 좋은 것뿐일 테지. 가령 협박으로 성사된 첫 만남이라든가, 결혼식이라든가.
“다프네.”
“각하.”
다시 돌아온 호칭에 에드먼의 심장이 순간 바닥에 깊이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불안감을 인지한 심장이 쿵쿵,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에드먼은 다프네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빠르게 입을 열었다.
“지금 함께 돌아간다면 모두 눈 감겠습니다. 그냥 그대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에드먼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다프네가 지금까지 무엇을 하면서 5년을 보내왔는지 그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냥 조용히 살라고요?”
“…아이.”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던 에드먼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이.
다프네를 구속할 수 있는 유일한 것.
“그대는 지금 내 아이를 품고 있습니다.”
“…아이요?”
다프네는 조용히 되물었다. 혼잣말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예. 그게 그대가 내 곁에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게 다인가요?”
다프네는 에드먼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날 잡는 이유가 그게 전부예요?”
왜일까. 전혀 다름 물음인데도 다프네가 자신을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느냐 묻던 것이 떠올랐다.
에드먼은 입술을 벌렸으나 조금 뒤에야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그게 전부입니다.”
다프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참이 지난 후 나직이 말했다.
“당신은 정말 날 단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네요.”
“다프네.”
에드먼은 마지막 남은 한 걸음을 옮겼다. 다프네의 얼굴은 어두운 동굴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에드먼이 걸음을 뗐으나 다프네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면서 소리치는 것이 더 빨랐다.
“아이는!”
고개를 든 다프네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입꼬리는 위를 향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는 없어요, 에드먼.”
다프네는 자신의 배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황녀님을 독살했다는 누명을 쓰고도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았던 이유인 아이가! 당신이 그렇게 날 잡으려고 애쓰는 이유인 아이가!”
“…….”
“없다고요.”
다프네는 거친 숨을 몰아 내쉬느라 어깨를 크게 들썩이다가 손을 툭, 떨궜다.
“애당초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어요.”
“왜?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온 것처럼.”
그때.
“내가 그냥 보내 줄 것이라 생각했습니까, 감히.”
그때 알아차렸다.
그의 단단한 품 안에 안겨 배 위를 손이 덮었을 때. 오해해도 단단히 했구나. 말해야지, 말해야지. 계속 생각했다.
“내 씨를 품은 당신을 놔줄 것 같습니까.”
잔혹한 말이다.
그 말은 곧 임신하지 않았다면 미련 없이 놔주었을 거라는 말이었으니까.
하고 또 한 다짐은 그의 말 한마디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마치 숙명처럼.
운명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달콤한 것이었고 다프네의 처지에는 숙명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한 것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다프네는 또다시 굴복하고 말았다.
고작 한 번의 잠자리로 아이가 생겼을 것이라 생각하는 그가 나를 붙잡을 때면 그에게서 필요한 이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짙은 마음 역시 밀려왔다.
그는, 내가 아닌 내 배 속의 아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알면서도 외면했다. 도망쳤다.
“…에드먼.”
거친 숨이 어느새 모두 가라앉은 다프네가 에드먼을 빤히 보았다.
“당신, 다… 알고 있었어요?”
목소리와 함께 다프네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에드먼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으나 다프네는 직감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어, 언제부터요? 아니, 어떻게요?”
그리고.
“왜…?”
왜 지금까지 속은 척한 거지? 왜?
다프네는 숨을 헐떡였다.
“도대체 왜…! 읍!”
다프네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한순간에 입술을 겹쳐 온 에드먼은 다프네를 깊게 끌어안았다. 그의 손이 다프네의 뺨을 움켜쥐고 허리를 잡아당겼다.
다프네는 버둥거리며 그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숨이 섞일수록 손에 힘이 빠졌다.
“하….”
짧고 굵은 입맞춤 후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다. 다프네는 거친 숨을 내뱉느라 바빴고 에드먼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에드먼은 다시 고개를 숙여 서로의 입술이 닿기 전 멈추었다. 마치 동의를 구하듯이.
다프네는 그것이 모순처럼 느껴졌다. 내가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그녀는 조소를 삼켰다. 마지막, 그리고 처음으로 내보는 욕심이다. 그간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잘게 찢겨진 가슴이 안타깝고 비참해서, 그래서 내보는 욕심인 것이다.
제 입술을 꾹 깨문 다프네는 대답 대신 입을 맞췄다. 둘은 입술이 닿자 동시에 눈을 감은 채 서로에게 집중했다.
에드먼은 안도했고 다프네는 눈물 한줄기를 흘려보냈다.
다프네, 당신은 여전히 날 사랑해.
에드먼, 이젠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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