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다프네가 눈을 뜬 것은 스산한 한기 탓이었다. 흐릿한 시야는 이미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으나 이곳에서 며칠이나 지낸 다프네는 지금이 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짐승들은 오직 밤에만 움직였다. 다프네는 최대한 숨을 죽이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신을 잃기 전 아슬아슬하게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다프네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동굴 안쪽에 꺼진 불씨를 살리기 위해 움직였다. 빨리 불을 살리고 동굴 앞에 불을 피워야 했다.
하지만 동굴 안으로 달빛도 들어오지 않았기에 다프네는 아무런 빛 없이 그저 손끝과 발의 감각에만 집중해서 걸어야 했다. 마치 눈먼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에 다프네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발치에 무언가 치였다.
나무였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움찔하던 다프네는 서둘러 상체를 숙여 바닥을 더듬거렸다. 머지않아 불씨가 꺼진 장작더미가 손에 잡혔다.
이제 막 어둠에 익숙해지던 찰나였기에 희미하게 보이는 나무토막을 들어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방법은 알지만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기에 유난히도 불 피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프네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이런 생존 지식 모두 한땐 세르기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습득한 것들이었다. 이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다프네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무런 불빛 없이 피어오르는 연기에 눈이 따가워질 무렵, 꺼진 불씨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다프네는 더 빠르게 손을 움직였고 머지않아 작은 불이 피어올랐다. 불씨를 살린 것이다.
다프네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불씨가 커질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후 불이 완전해지자 힘이 풀려 버린 다프네는 손을 떨궜다.
“됐다….”
다프네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지 불씨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탓에 밖에 비가 내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차가웠던 몸이 어느새 점점 녹아내리는 것과 동시에 긴장이 풀렸다. 다프네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드먼이 따 왔던 과일의 생김새를 떠올리며 겨우겨우 하루에 두 끼를 먹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기에 가뜩이나 힘이 없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오늘 왠지 모를 욕심이 생겨 더 넓게 돌아다녔고 바닥난 힘까지 끌어모아 불까지 피웠으나 잠이 쏟아지는 건 당연했다. 다프네는 몽롱한 얼굴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이미 혼인했겠지.’
다프네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에드먼에게로 이어졌다.
약혼식장에서 그렇게 강으로 뛰어들었다지만 다프네가 아는 에드먼이라면 분명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약혼식을 끝마쳤을 것이다.
그렇게 화려한 약혼식을 치렀으니 결혼식은 그보다 더 성대할 것이다. 자신과의 결혼식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그리고 그대로 잊어 가겠지.
물론 다프네는 에드먼이 사람을 보내는 것을 대비해 데미안이 해 놓은 표식을 모두 걷어 미세하지만 다른 길로 가게끔 다시 걸어 놨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사람의 흔적 따윈 아예 찾을 수 없었다.
에드먼은 다프네를 찾지 않고 있다.
다프네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와서 그런 일로 아파하기에 다프네의 마음은 이미 너무나도 잘게 찢어져 있었다.
‘이런 일이 이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었구나.’
분명 아파해야 마땅할 일인데도 다프네는 아무렇지 않았다. 정말로.
‘그냥… 그냥 빨리 돌아가고 싶어.’
데미안을 살릴 방법을 알게 되어 돌아간 후, 그를 살리고….
‘…그러고 뭘 해야 하지?’
다프네에게 돌아갈 집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하물며 같이 떠날 사람조차 없었다. 지그시 입술을 깨문 다프네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차가웠던 몸이 점점 체온을 되찾아 가기 시작하고 뻗어지는 생각을 멈추자 이내 졸음이 밀려왔다. 눈이 감기려던 찰나, 위이잉 하는 낯선 바람이 다프네의 옷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순간 소름이 아난 다프네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내 작은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쿵, 쿵. 마치 발소리처럼 일정하게 울리자 땅이 조금씩 진동하기 시작했다.
다프네는 그제야 이 동굴 안쪽에서 나타났던 짐승의 존재를 떠올렸다.
‘이걸 왜 잊고 있었던 거지?’
다프네는 허둥지둥하며 몇 개 없는 짐을 챙기려고 했다.
그러나 저 멀리, 동굴 끝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커다란 검은 형제가 나타나는 것이 더 빨랐다. 짐승은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모습이 불빛을 받아 선명하게 보였다.
다프네는 다급히 숨을 들이켜는 동시에 손바닥으로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러지 않으면 비명이 저절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짐승은 늑대의 형체를 하고 있지만 마치 인간처럼 두 발을 땅에 디디고 있고 팔은 원숭이처럼 주먹을 쥔 채 바닥을 누른 상태였다. 두 눈은 굳게 감겨 있었으며 코는 기다랗게 축 늘어져 있었고 입은 돌출되어 있어 정체 모를 피와 살점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짐승은 코를 킁킁거리더니 입을 벌려 뱀처럼 갈라진 혀를 쉬익, 거렸다. 한 걸음, 한 걸음 걷던 짐승은 불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커다란 손바닥을 휘둘렀다. 타오르던 나무토막들이 순식간에 벽으로 날아가 부딪치면서 꺼졌다.
몇 시간의 노력이 단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다프네는 부디 짐승이 이대로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눈알을 굴려 짐승을 볼 생각조차 못 했다.
불에 덴 것인지 짐승은 혓바닥으로 손바닥을 핥으며 동굴 입구로 향했다.
그 순간 긴장이 풀린 다프네가 비틀거린 바람에 발치에 작은 돌이 톡, 소리를 내며 튕겼다.
그와 동시에 짐승이 다프네를 향해 달려들었다.
***
harbaragi_syk
에드먼이 눈을 떴다. 그의 몸은 온통 젖어 있었다. 느리게 상체를 일으킨 그는 급류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에드먼은 품 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 하나를 꺼냈다.
불이 다 꺼진 벽난로에서 찾아낸 종이는 대부분이 불에 타 있었기에 내용을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에드먼이 이것을 통해 다프네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신한 이유는 이 종이가 그의 저택에서 쓰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재질이었고 에드먼은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다프네.’
죽음을 위장하면서까지 내게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난 에드먼은 그제야 비가 내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간은 완전히 밤이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는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분명 다프네가 있다. 에드먼은 수많은 세월이 흐르더라도 다프네를 찾는 것을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이 검은 숲을 온통 뒤져서라도 다프네를 찾을 것이었다. 에드먼은 목적지 없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에드먼은 익숙한 끈을 발견했다. 데미안과 다프네를 구조하기 위해 왔을 때 봤던 끈. 데미안의 찢어진 옷가지였다.
바로 걸음을 옮기려던 에드먼은 이내 우뚝 멈췄다. 그의 기억 속의 끈의 위치와 달랐다. 아주 미세했지만 에드먼은 그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에드먼은 끈이 묶인 형태를 자세히 살폈다. 위치와 마찬가지로 묶인 형태 역시나 달랐다. 엉성하게 묶여 있어서 헐렁했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단 한 사람이 떠올랐다.
다프네가 근처에 있다.
거칠게 몸을 돌린 에드먼은 이내 심호흡을 하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 주변에서 다프네가 갈 만한 곳을 찾아야 한다. 무기도, 힘도 없는 여인이 있을 곳이라면….
“동굴.”
데미안과 머물렀던 동굴밖에 없었다.
목적지를 정한 에드먼은 곧바로 빠르게 뛰었다. 딱 한 번 가 보았던 길을 에드먼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에드먼은 미숙하게 지워진 자그마한 발자국을 발견하고 걸음을 더 빨리했다.
머지않아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드먼이 안도감에 멈췄던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크르, 륵.
성대를 긁는 소리와 함께 검은 짐승이 동굴을 나왔다.
본능적으로 인기척을 지우던 에드먼은 짐승의 돌출된 이빨에 걸린 옷가지를 발견했다. 또 다른 사람이라도 있는 것인가 싶었다. 그 옷이 다프네의 것이라는 걸 알기 전까지.
에드먼은 기척을 지우지 않아 짐승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오직 피와 비에 젖어 너덜너덜해진 옷을 빤히 보았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그때 입고 있던 소박한 드레스는 짐승의 날카로운 이빨에 찢겨 있었다.
툭. 짐승의 입에서 붉은 피가 떨어져 내렸다. 그 안에 살점을 발견한 순간, 에드먼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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