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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73화 (73/145)

73화

그레이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엘리자벳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레이스는 그제야 제대로 들은 것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녀님, 일단 진정하세요. 너무 흥분하셨어요.”

충동적인 선택을 후회할지도 몰랐기에 엘리자벳을 말렸지만, 그녀의 얼굴이 더 매서워질 뿐이었다.

“…역시. 너도 마찬가지구나.”

중얼거린 엘리자벳은 울음을 터트리듯 눈매를 일그러트리는 것도 잠시 그레이스의 뺨을 내리쳤다.

짜악! 불에 튀기듯 볼에서 고통이 일어나자 그레이스는 그 반동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뺨을 부여잡고 엘리자벳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황, 황녀님….”

단 한 번도 엘리자벳이 이런 식으로 손을 댄 적이 없었기에 그레이스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재상의 말이 맞았어. 그레이스, 내게 바친다던 충성심은 어디로 간 것이니?”

엘리자벳은 자신이 때린 그레이스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레이스, 내가 말했잖아. 배신의 대가는 죽음뿐이라고.”

엘리자벳의 부름에 밖에서 기사 둘이 들어오자 그레이스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황녀님! 재상님의 말을 믿지 마세요! 그분이 먼저 저를 유혹했어요! 정보를 전달해 주면 내년에 저와 결혼식을 치르겠다면서요!”

급하게 치맛자락을 잡고 매달려 보았지만, 그레이스를 내려다보는 엘리자벳의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황녀님!”

그레이스는 늘 자신이 지켜보던 이와 똑같은 처지가 되어 끌려 나갔다.

문이 닫히고 머릿속을 윙윙거리며 괴롭히는 비명이 사라지자 엘리자벳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제 나오렴.”

엘리자벳의 말에 커튼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이가 나왔다. 일린은 몇 년 동안 자신을 모셔 온 사람을 단 한 순간에 내치는 엘리자벳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 창백한 얼굴이었다.

“잘 봤지? 이래도 내 시녀가 되고 싶니?”

마지막 경고였다. 일린은 이내 숨을 천천히 내쉬며 머리를 빠르게 돌렸다. 엘리자벳의 최측근이 된다는 것은 언제 버림받을지도 모르는 패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지옥을 가도 지금의 상황보단 괜찮을 테지. 큰 금액을 받고 자신을 팔 궁리만 하는 오라버니. 무능력한 아버지. 제 처지에 맞지 않는 사치에 눈먼 어머니. 일린은 어떻게든 이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겠습니다.”

엘리자벳은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처음으로 할 일은… 그래. 다프네, 그 여자의 목을 가져와.”

***

“성녀…?”

황제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예, 성녀님이십니다.”

“하.”

황제는 헛웃음을 짓는 것도 잠시 이내 버럭 소리쳤다.

“지금 짐을 능멸하는 것이냐? 누굴 바보 천지로 알아!”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적잖게 분노에 찬 것인지 얼굴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성녀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성녀는 이제 나오지 않아!”

“폐하.”

그때,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린다?”

쌔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풍기는 달콤한 향기에 황제는 마치 주인을 찾는 개처럼 화를 내다 말고 고개를 길게 빼 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마린다는 자연스럽게 황제의 무릎에 앉았다.

“하아, 린다.”

황제는 마린다의 품에 고개를 박은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내 그녀에게서 나는 달콤한 향기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마린다는 황제의 화가 누그러지자 곧바로 말을 이어 갔다.

“폐하, 소녀가 말씀드렸죠? 일전에 죽을 뻔한 저를 구해 주고 폐하의 곁을 모시게 했던 그 은인 말입니다.”

“그래그래, 짐은 다 기억하노라.”

“그분이 바로… 성녀님이십니다.”

“뭐?”

황제는 마린다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도 정말 몰랐어요. 하지만 재상님이 제게 일러 주셨지요. 린다는 정말 놀랐답니다, 폐하.”

마린다는 애교를 부리며 황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내 황제는 다시 몽롱해진 눈으로 세르기와 성녀를 돌아보았다.

“정말 성녀가 맞느냐?”

“그렇습니다, 폐하.”

애첩의 말로 인해 수긍하긴 해도 황제는 영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때, 내내 침묵하던 성녀가 세르기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둘의 모습에 미간을 좁히던 황제가 입을 달싹이던 찰나 세르기가 말을 꺼냈다.

“성녀님께서 폐하께 드릴 선물이 있다고 합니다.”

“선물?”

선물과 돈을 좋아하는 황제의 눈이 반짝였다.

“그게 무엇이냐.”

성녀는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성녀가 눈짓하자 황제를 끌어안고 있던 마린다가 바닥을 딛고 멀어졌다.

황제가 당황한 그 순간, 성녀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파앗!

황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팅, 뎅그르륵. 왕관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머리카락은 아무리 신성력을 쏟아부어도 금발이라 할 수 없는 옅은 갈색에 가까워졌기에 그는 제 머리를 늘 막대한 돈을 들여 신성력으로 숨겼다.

“이, 이게 무슨….”

왕관이 떨어지면서 눈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옅은 갈색이 아닌 선명한 금발을 띠고 있었다.

“저의 소박한 선물입니다.”

가는 미성이 들렸으나 황제는 제 머리카락을 한 움큼 붙잡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영구적이니 사라질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허… 허허….”

황제는 놀란 얼굴로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성녀를 진작 알아보지 못했군!”

성녀를 경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얼마 만에 등장한 성녀인가! 내 친히 성녀를 위해 화려한 환영식을 열도록 하지!”

“폐하께 감사드리지만,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폐하께서 이제 천하를 발아래 두실 텐데 그것을 미리 축하하는 자리가 더 맞다고 생각됩니다.”

그 말에 황제는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황제는 금발로 변한 머리카락을 만족스러운 듯 매만지며 회의를 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

성녀와 황실 복도를 거닐던 세르기에게 그의 수하가 다가왔다.

그의 계획대로 황녀는 고작 말 한마디에 수년간 자신을 모신 수하를 내쳤다. 그리고….

“공작이 사라져?”

세르기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되물었다. 성녀를 흘끔 바라본 세르기는 수하와 함께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자세히 말해 봐요.”

“윈터 공작이 사라진 게 확실합니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 저택은 굳게 닫혀 있고 심어 둔 첩자를 포함한 다른 사용인들이 모두 쫓겨났습니다.”

모두지 알 수 없는 그들의 행동에 세르기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나 성녀가 있었기에 하는 수 없이 수하를 돌려보냈다.

“무슨 일 있나 봐요?”

“하하, 그럴 리가요.”

“윈터 공작이 드디어 떠났군요.”

그 말에 세르기의 발걸음이 멈췄다.

“…뭘 알고 계시는 겁니까?”

성녀의 말은 마치 에드먼이 떠날 것을 미리 알고 그것을 기다린 사람 같았다.

“글쎄요.”

성녀는 의미심장한 말과 미소를 남긴 채 앞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세르기는 뒤늦게 깨달았다. 성녀가 노리는 것은 애당초 다프네가 아니다. 다프네는 그저 미끼일 뿐이며 성녀의 목적은….

에드먼이었던 것이다.

***

잇새로 거친 숨이 튀어나왔다. 다프네는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역시나 검은 숲은 아침임에도 어두웠고 자욱한 안개로 가득했다.

다프네는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제와 다를 게 없는 풍경이다.

‘결국 오늘도….’

실패다. 신전을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데미안을 구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는 세르기의 편지에 다프네는 곧바로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에서 에드먼의 감금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다프네는 본래 계획에 없었던 죽음으로 위장했다.

그것은 소소한 복수였다.

“단 한 순간이라도 날 사랑한 적 없나요?”

그 물음은 소소한 욕심이다. 이제는 다 끝난 일이다. 다프네는 멍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며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이내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강에 몸을 내던진 것은 죽을지도 모르는 무모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다프네는 살아남았다.

물살에 휩쓸리다가 정신을 잃은 다프네가 깨어나 제일 처음 발견한 것은 멀지 않은 나무에 묶인 데미안의 찢어진 옷가지였다.

다프네는 홀린 듯 그것을 따라 걷기 시작했고 곧이어 익숙한 동굴이 나타났다. 다프네와 데미안이 지냈던 바로 그 동굴이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다프네는 동굴에서 지내면서 매일 낮마다 세르기가 말한 신전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신전은커녕 늘 같은 자리로 되돌아왔다.

동굴에 돌아온 다프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면서 불안감이 불쑥불쑥 치솟는다.

‘아니야, 아직은 괜찮을 거야.’

다프네는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그녀가 이러는 이유는 바로 딱 한 가지, 믿을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다프네가 세르기의 끔찍하고도 잔혹한 실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몸의 회복 능력이었다. 그 어떤 상처라도 일주일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누구도 다프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그녀가 딱히 숨기려 애쓰지 않아도 다른 이들은 모른다.

세르기의 편지를 받고 탈출 계획을 짜던 다프네는 문득 그사이 데미안의 상태가 악화될까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도중 갑자기 떠오른 무언가에 다프네는 손가락 끝을 살짝 베어 데미안의 입 안에 떨어트렸다.

결과는 놀라웠다. 데미안의 호흡이 안정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다프네는 자신의 기이한 회복력이 피를 통해 타인에게도 통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떠나기 전 상당한 양의 피를 뉴벨 남작 부인에게 맡겼다.

다량의 피를 뽑아내 가뜩이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은데 초조해진 마음에 저도 모르게 오늘 무리한 탓일까, 두통이 밀려왔다. 다프네는 옅은 신음을 뱉어 내며 동굴 벽을 짚었다. 이상하게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직 다 낫지 않은 허벅지의 상처도 오늘따라 화끈거렸다.

‘왜 이러지.’

다프네는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불을 피워야 밤사이 짐승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프네는 다 꺼진 불을 향해 네발로 기어갔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몸이 푹푹 꺼졌기에 가는 팔다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안 되는데….’

다프네는 꺼지려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았다. 입 안에 살을 잘근잘근 씹어 보았지만, 시야가 까무룩해지는 것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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