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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72화 (72/145)

72화

“후.”

늦은 시간이 돼서야 업무를 끝난 요한은 마지막 보고서를 작성한 동시에 펜을 내려놓았다.

쉴 틈 없이 움직이느라 뻐근해진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던 요한은 벤트를 통해 에드먼에게 전달할 보고서를 정리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덧 시간은 새벽이었기에 방으로 가져가 자기 전 다시 검토하기 위함이었다.

요한은 빗소리만 들리는 복도를 홀로 걸었다.

아무리 에드먼을 피해 생활한다고 해도 들려오는 소식을 듣는 데 어려움은 없었기에 그도 알고 있었다.

‘마님이….’

요한은 들고 있던 보고서를 꽉 쥐었다.

마님에 대해 막말을 내뱉었을지언정 결코 이런 마지막을 바란 건 아니었다. 왠지 모를 죄책감에 요한은 옅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기려던 찰나, 우연히 창밖으로 시선을 둔 요한은 다시금 우뚝 제자리에 멈췄다.

“…각하?”

밖에 있는 이가 에드먼이라는 것을 알아챈 요한은 그대로 저택을 뛰쳐나왔다.

며칠 동안 밤을 새워 가며 만든 보고서가 젖는 것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무작정 달렸다.

“각하!”

요한은 에드먼이 말에 오르기 직전 간신히 그를 불러 세웠다.

“어딜… 어딜 가시는 겁니까.”

세차게 내리는 비 탓에 눈이 잘 떠지지 않았고 에드먼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요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들은 바로는 에드먼이 강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검은 기사단이 떼로 달려들어 겨우 막았다고 했다.

그 후 저택으로 돌아온 에드먼은 이틀 동안 술만 내리 찾았다가 갑자기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에드먼은 다프네를 찾으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혹시 자신 몰래 찾고 있는 것인가 싶었지만 그것 역시 아니었다.

요한 역시 그 점이 가장 의아했다.

“…아니시지요.”

불안감이 밀려왔다.

“아니시죠.”

“요한.”

에드먼은 나직이 그를 불렀다.

“내가 없는 동안 네게 내 권한을 임시로 넘기겠다.”

“각하.”

요한의 얼굴이 굳었다.

에드먼은 지금까지 수많은 위기를 직면했다. 그것은 불시에 찾아오기도 했으며 예상을 한 적도 있다.

에드먼은 홀로 마물 소굴을 소탕하러 갈 때조차 아무런 말을 남기지 않았다. 그저 며칠 안에 돌아올 것이라는 말만 남긴 채 떠났다.

결단코 이런 말을 남긴 적 없었다. 그것은 요한의 불안감에 증폭제가 되었다.

“왜,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비에 젖은 보고서가 그의 손아귀에서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글씨를 알아볼 수조차 없게 진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나는 다프네를 찾으러 갈 거다.”

“각하, 마님은….”

죽었다.

죽었음이 틀림없다.

다프네가 강에 스스로 몸을 던진 후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인해 강의 물은 두 배로 부풀었기 때문이다. 그 비가 열흘 동안 그치지 않고 있다.

‘마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요한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정작 내뱉고자 하는 말은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기간은 나도 알 수 없어.”

에드먼은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장담하지.”

말의 고삐를 쥔 에드먼이 뒤돌았다.

“돌아오겠다.”

히이잉!

고요한 새벽, 빗소리를 뚫고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내 말발굽 소리와 함께 에드먼은 점점 멀어져 이내 작은 점이 되었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요한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기다리겠습니다. 꼭….”

***

에드먼은 달렸다. 비를 뚫고 계속 달렸다.

이미 알고 있던 비밀 통로를 통해 황궁 안으로 들어간 에드먼이 향한 곳은 약혼식이 열렸던 숲이었다.

그렇게 걷던 에드먼은 다프네가 스스로 몸을 던진 그 장소에 멈췄다.

“고마워요.”

숨을 고른 에드먼은 이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풍덩, 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과 동시에 그의 몸이 깊은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

ㅎㅂㄹㄱ.공금

그리 크지 않은 방에는 제국 권력의 중심들이 모여 있었다.

재상이 된 세르기 블레드, 베벨록 공작, 황태자, 황녀 그리고 황제.

“흠.”

황제는 시간을 수시로 확인하며 불편하다는 듯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 소리에 엘리자벳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문을 노려보았다. 곱게 차려입은 웨딩드레스가 엘리자벳의 손아귀에서 구겨졌다.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무렵 불편한 티만 내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황녀,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폐하.”

엘리자벳은 떨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에드먼이 급한 일이 있나 봐요.”

“약혼식에도 급한 일이 있다더니. 공작은 어째 황제인 나보다 더 급한 일이 많은 것 같은데.”

“폐하도 참. 그런 말씀 하시면 제가 더 섭섭합니다.”

엘리자벳의 애교에 황제의 화는 어느 정도 누그러진 듯싶었다. 그렇게 다시 일분일초가 지옥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땡땡.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에 울리고 엘리자벳은 눈을 질끈 감았다. 꽉 쥔 손이 툭, 떨궈졌다. 에드먼은 약속된 시간이 다 되었음에도 끝내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황녀.”

황제는 가라앉은 얼굴로 엘리자벳을 불렀다.

“난 충분히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폐하,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면….”

“이럴 줄 알았습니다.”

엘리자벳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벨록 공작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엘리자벳은 눈을 매섭게 뜨고 베벨록 공작을 돌아보았으나 그의 몸은 이미 황제에게 향한 후였다.

‘저 늙은 뱀 같은 작자가….’

엘리자벳은 자신이 베벨록 공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상황을 키우는 베벨록 공작을 보며 들끓는 분노를 억눌렀다.

황제의 총애를 잃게 한 엘리자벳을 치우고 자신의 딸은 황후로 앉히려는 속셈이 뻔히 보였다.

“폐하,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잖습니까. 윈터 공작은 가까이에 두서는 안 되는 인물입니다. 감히 황녀님과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니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베벨록 공작.”

“황녀님,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베벨록 공작의 말에 엘리자벳은 결국 참지 못하고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분명 황녀님께서 약조하셨지요. 공작을 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그건….”

그랬다. 엘리자벳은 사냥 대회가 시작되기 전만 해도 자신만만했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조금 삐끗거리긴 하지만 자신의 계획대로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프네가 떨어진 자리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에드먼을 본 순간,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엘리자벳은 조급해졌다. 에드먼에게 찾아가 품어 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베벨록 공작의 말이 맞다, 황녀.”

“폐, 폐하.”

황제가 베벨록 공작의 편을 들자 엘리자벳의 얼굴이 삽시간 창백해졌다.

“폐하, 진정하세요.”

그때 끼어든 것은 다름 아닌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던 세르기였다. 세르기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황녀님도 당황스러울 겁니다. 윈터 공작이 안 올 줄 당연히 모르셨겠죠.”

“맞, 맞아요.”

엘리자벳은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어찌 황녀님의 잘못일 수 있겠습니까. 모든 건 윈터 공작의 탓이지요.”

“그건 그렇지….”

세르기의 말에 황제는 한결 누그러진 태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에 베벨록 공작은 화들짝 놀라며 덧붙였다.

“폐하, 그렇지만 황녀님도….”

“피해자이시죠.”

“…예, 황녀님 역시 피해자시죠.”

여기서 부인해 버리면 황족 모독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베벨록 공작은 하는 수 없이 세르기의 말에 긍정했다.

“폐하께 따로 드릴 말씀이 있사온데….”

세르기는 말을 하다 말고 주위를 흘끔거렸다. 그 뜻을 알아챈 황제는 곧바로 베벨록 공작과 엘리자벳을 내보냈다.

문이 닫히자 세르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폐하께 소개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소개?”

문이 열리고 로브를 쓴 이가 나타났다. 겉으로 보이는 모양새나 언뜻 보이는 손으로 여자라는 걸 겨우 유출할 수 있을 만큼 꽁꽁 가린 모양새였다.

“전에 제가 잠깐 말씀드린 적 있었죠. 대신관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

“기억하네만.”

저 여인과 대신관이 무슨 관계이길래 그를 거론하는지 황제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내 여인은 하관만 겨우 보일 만큼 푹 눌러쓴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하관을 제외한 모든 얼굴을 가린 하얀 가면이 드러났기에 황제는 흠칫 놀랐다.

“폐하, 이분이 바로 성녀님이십니다.”

드러난 입술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

에드먼이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그레이스는 잔뜩 긴장한 채 문 앞에서 심호흡했다.

몇 년 동안 엘리자벳의 패악에 익숙해져 있다고는 하지만 요즘은 그 빈도가 잦아져서 그레이스조차 버거워지고 있었다.

‘세르기 님과 결혼하면 바로 그만둘 거니까. 이번만 참자.’

그레이스는 다시 심호흡한 후 문을 열었다.

날아올 찻잔을 예상하며 어깨가 잔뜩 움츠러든 상태였다.

그러나 조용했다. 익숙한 파열음이 들리지 않자 그레이스는 굽은 어깨를 펴며 고개를 쭉 빼 들었다.

“황녀님…?”

엘리자벳은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레이스.”

엘리자벳은 무표정으로 그레이스를 불렀다.

흠칫 놀란 그레이스는 잠시 멈칫하는 것도 잠시 엘리자벳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공작이 그 여자를 찾으러 검은 숲으로 향했어.”

“그런….”

엘리자벳은 그레이스를 돌아보았다.

“살수를 보내.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

빠득, 팔걸이를 움켜쥔 엘리자벳은 손톱이 부서질 듯 세게 힘을 주었다.

“둘 다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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