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벤자민의 말대로 데미안의 상태는 며칠 전과 같았다. 더 악화되지도 않았지만, 데미안은 여전히 깨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을 내려다보는 그때, 조용히 문이 열렸다.
“각하?”
뉴벨 남작 부인은 침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에드먼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드먼이 근 이틀 동안 어떤 상태였는지 충분히 전해 들었기 때문에 멀쩡한 그가 의아했다.
“데미안을 살피러 온 것이냐.”
“예, 그렇습니다.”
에드먼은 데미안을 돌아보는 것도 잠시 걸음을 옮겼다.
“수고하게.”
뉴벨 남작 부인은 에드먼이 자신을 지나치자 고개를 조아리고는 그를 멈춰 세웠다.
“각하, 괜찮으실는지요.”
“…괜찮다.”
에드먼은 벤자민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방을 나오자 텅 빈 복도가 유난히도 고요하게 느껴졌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자신은 괜찮았다. 정말로.
***
에드먼의 모습이 사라졌음에도 뉴벨 남작 부인은 쉽사리 문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머지않아 정신을 차린 그녀는 어제와 다를 게 없는 데미안을 살폈다.
이내 문가로 다가가더니 문을 걸어 잠그고 품에서 병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 안에는 붉은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병의 마개를 따자 비릿한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피였다.
뉴벨 남작 부인은 익숙하게 데미안의 입술 사이로 피를 흘려보냈다. 흘리지 않게 조심조심 피를 모조리 부은 후 누가 볼세라 빈 병을 다시 빠르게 품 안에 넣었다.
얼마 후, 데미안의 숨소리는 미약하지만 더 커져 있었다. 혈색도 이틀 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많이 돌아왔다. 이 모든 건 정확히 이 피를 먹이기 시작한 후부터 생긴 아주 미세한 변화였다.
그리고 이 피를 건넨 것은 다프네다.
모퉁이에서 마주친 다프네를 잡지 않고 보낸 후 방으로 돌아온 뉴벨 남작 부인은 방 한구석에서 처음 보는 짐 가방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정체 모를 액체가 든 손가락 한 마디의 작은 병과 쪽지 하나가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도 쓰여 있지 않고 그저 데미안에게 하루에 한 번 먹이라는 말밖에 없었다.
의아하던 찰나, 뉴벨 남작 부인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한마디의 말이 있었다.
“부탁해요.”
다프네가 그녀를 지나치면서 속삭인 말이었다.
뉴벨 남작 부인은 처음에는 아닐 것이라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무시하려고 하면 할수록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약혼식 도중 에드먼이 돌아오고 다프네가 자살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순간, 정신 차려 보니 병 하나를 들고 데미안의 방에 들어선 후였다. 그녀의 행동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마개를 열고 안의 내용물을 데미안의 입 안에 모두 흘려보낸 후에야 그것이 피라는 것을 알게 되고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결국 그날 밤 잠 못 이루고 온종일 데미안의 곁에서 그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해가 뜨고 선잠에서 깨어나 확인한 데미안의 상태는 놀랍게도 조금이지만 호전되어 있었다.
그 이유가 다프네가 남긴 피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뉴벨 남작 부인은 이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 믿기지 못할 광경을 본다고 해도 피를 먹인다는 행위 자체가 거북함을 일으킨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프네가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자신에게 남기고 갔다는 것을,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
‘마님은 모두 계획하고 계셨던 거야.’
약혼식을 보고 충동적인 선택을 한 것이 아니다. 마님은 계속 계획을 세우고 있으셨던 것뿐이다.
뉴벨 남작 부인은 데미안을 보며 다프네를 향해 뻗어 가는 생각을 도무지 멈출 수 없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적어도 그것을 말하려고 했는데….’
다프네를 살린 상처를 동여맨 셔츠의 주인이 에드먼이라는 것을.
***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에드먼의 약혼식 후로 어느덧 열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대련할 때도, 식사를 할 때도, 업무를 볼 때도, 보고를 받을 때도 에드먼은 언제나 평소와 같았다.
다만 궐련을 피우는 빈도가 잦아지면서 궐련 통이 더 빠르게 빈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화롭다고 할 정도로 조용한 나날이었다.
에드먼은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비는 내린 지 열흘이 되었음에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주적주적 내리는 비를 보고 있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통이 밀려왔다.
에드먼은 미간을 좁히는 것도 잠시 품 안에서 궐련을 꺼내 불을 피워 깊게 빨았다.
그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생각을 놓치면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이 밀려왔고 에드먼은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두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궐련을 반쯤 피웠을 무렵, 소란스러움이 적막함을 깨트렸다.
그리고 급하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각하.”
“무슨 소란이냐.”
“그것이… 황녀님께서 각하를 찾아오셨습니다.”
“들여보내.”
에드먼은 궐련을 재떨이 위에 놓으며 말했다.
벤자민이 나가고 화를 숨길 생각이 없는 거친 발걸음과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공작!”
며칠 사이에 살이 빠진 엘리자벳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에드먼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지금 나와 장난하자는 거예요?”
“무슨 말씀이신지.”
예상했던 에드먼의 태평한 태도에 엘리자벳은 이를 바득, 갈았다.
“그 여자가 황실에서 빠져나왔겠다, 이제 막 나가려는 건가요? 우린 계약을 했잖아요. 내가 그 여자를 빼내 줬으니 공작도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지!”
“황녀님, 다프네는 황녀님이 꺼내 주신 게 아닙니다.”
다프네가 하혈을 하였고 황실은 혹시 유산했을까 지레 겁먹고 에드먼이 그녀를 저택으로 데려간 것을 외면하며 묻었다. 결단코 황녀가 한 일이 아니란 말이었다.
“그렇다고… 그렇다고 약혼식을 뛰쳐나가는 게 어디 있어요! 지금 사교계에 내 평판이 어떤지 공작이 알기나 해요?”
“약혼식을 강행한 것은 황녀님이십니다. 또한 그런 것을 굳이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바람대로 황녀님과 제 사이를 세상 모두가 알 텐데.”
“그건….”
엘리자벳은 입술을 거칠게 깨물었다. 그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맞는 말이었기에 반박의 여지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를 나름대로 배려해 주었다. 다프네가 그의 눈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충격에서 헤어 나올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엘리자벳은 초조함에 잠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어쨌든 내 인내심은 여기까지예요. 내일 폐하의 앞에서 결혼식을 치를 거예요.”
느닷없는 말에 에드먼의 얼굴이 얼핏 일그러졌으나 엘리자벳은 멈추지 않았다.
“약소하지만 폐하가 증인이 되어 주실 거예요. 내일 이혼 서류도 함께 제출하는 거예요. 알겠죠?”
흥분을 가라앉힌 엘리자벳은 할 말을 모두 끝내자 한껏 온순해진 태도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공작, 폐하가 우리 둘의 사이를 의심하고 있어요. 행여나 내가 공작과 손을 잡고 반역을 꿈꾸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에요.”
불과 몇 분 전까진 황녀의 기품 따윈 잊은 채 소리 지르던 모습과 상반되는 태도로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폐하께 그리고 내게 확신을 줘요, 에드먼. 네?”
그러곤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날 안아요.”
“날 안아 줘요.”
에드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꺅!”
그의 코앞에 있던 엘리자벳은 당연히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벳은 에드먼이 거칠게 설렁줄을 잡아당기는 것을 멍하니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부르셨습니다.”
“황녀님을 모셔다드려라.”
에드먼은 서늘한 얼굴로 엘리자벳을 내려다보며 벤자민에게 명령했다. 그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무실을 나왔다.
‘또….’
다프네의 목소리다.
정차 없이 걷던 에드먼은 자신의 걸음이 멈춘 방 앞을 보았다.
“하.”
자신의 방이자 다프네가 머물렀던 방이었다.
에드먼은 문을 열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체취가 많이 묻어 있을 침대로 향한 에드먼은 자신의 궐련 냄새 속에서 다프네의 향을 찾을 수 있었다.
‘다프네.’
그때, 거친 비바람으로 인해 창문이 벌컥 열렸다.
에드먼은 순식간에 비에 젖고 말았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자신을 세차게 몰아붙이는 비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풍덩!
그 비바람 사이로 섬뜩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에드먼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수면 위로 막 올라온 듯 숨이 거칠었다.
에드먼의 심장이 쿵, 쿵 거센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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