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윈터 공작과 엘리자벳 황녀의 약혼식이 중간에 중단되었다. 그 이유는 윈터 공작이 갑작스럽게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급한 일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알음알음 소문이 퍼졌다. 전처의 부름을 받고 달려간 것이다. 황녀와는 계약 결혼이며 아직 전처를 사랑한다.
이제 막 건져 올린 파닥거린 싱싱한 물고기 같은 소식이지만 황실의 입김이 들어가자 빠르게 잠잠해졌다. 그러나 뒷말이 나오는 것까지 막을 순 없었다.
“소문을 최대한 막아 보려고 했지만 이게 막는다고 막히는 게 아닌지라….”
“그냥 말해.”
엘리자벳이 신경질적으로 말을 끊자 일린은 허리를 푹 숙였다.
“공작님께서 이혼 서류를 제출하지 않은 소문 역시 떠돌고 있습니다.”
둘의 거래가 성사되던 날 에드먼은 모든 게 완료된 이혼 서류를 그대로 가져갔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서명한 후 바로 제출했어야 했는데. 엘리자벳은 이를 바득, 갈았다.
“또 다른 건?”
“다른 건….”
허드렛일을 많이 한 일린은 귀족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들과도 친분이 있었기에 그들로부터 정보를 쉽게 수집할 수 있었다.
“…황녀님의 입지가 매우 안 좋아졌습니다. 아무리 황실에서 압박을 줘도 말이 늘 나오기 때문에….”
일린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날아오는 찻잔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행히 찻잔은 비켜 나갔지만 만약 맞았다면 저 뜨거운 물이 얼굴에 흉측한 흉터를 남겼을 것이다.
황녀의 최측근 시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일린은 그저 기쁨에 젖었다. 이제 인생이 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황녀는 알려진 것과 달리 폭력적이고 괴팍했다. 지금처럼 화를 못 이겨 찻잔이나 주변의 물건을 던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더군다나 이런 화풀이마저 모두 아랫것들이 당해야 했다. 일린은 고개를 조아린 후 빠르게 방을 나갔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그레이스는 일린이 나가자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엘리자벳에게 다가갔다.
“황녀님, 소문은 가라앉기 마련입니다.”
“누가 그걸 몰라?”
엘리자벳은 고개를 휙 돌렸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탓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어 흉한 모습이었기에 그레이스는 움찔했다.
“제가 다른 소문을 흘리겠습니다.”
“웬만한 이야기로는 이 소문은 절대 묻히지 않아.”
안타깝게도 사교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엘리자벳은 그레이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닙니다, 황녀님. 제가 어디서 주워들은 소문인데….”
그레이스는 아무도 없음에도 엘리자벳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정말?”
얘기를 들은 엘리자벳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래, 이 정도면… 이 정도면 충분해. 그사이 결혼식을 앞당겨서 하면 돼. 그럼 소문이 가라앉고 내 입지도 다시 돌아오겠지.”
엘리자벳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조금 진정한 것 같아 보이자 그레이스는 속으로 안도하며 엘리자벳의 옆에 앉아 차를 따랐다.
“황녀님, 윈터 공작에 대해서도 너무 걱정 마세요. 그가 전처에게 한 행동들은 누가 봐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아, 차가 다 떨어졌네요. 가져올게요.”
“단 한 순간이라도 날 사랑한 적 없나요?”
그레이스의 말에 그 장면이 다시금 떠올랐다. 찻잔을 들던 엘리자벳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그렇게 풍덩 소리가 나고 에드먼의 움직이기 전 갑자기 나타난 그의 수하들이 먼저 달려들었다.
족히 열 명이 넘는 이들이 달라붙었지만 에드먼은 하나둘 떨쳐 내며 다프네가 사라진 곳으로 향하려 했다.
“…그럴 리가.”
엘리자벳은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프네!”
엘리자벳은 에드먼의 그런 표정을 처음 보았다. 늘 보이던 무표정이나 서늘한 얼굴이 아니었다.
만약, 그의 세상이 무너지고 세상에 홀로 남는다면 그런 표정이겠지.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에드먼이 다프네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방을 나온 그레이스는 주방으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들리는 인기척에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잠시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재상님.”
“그레이스.”
세르기는 그레이스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조금 날카롭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레이스는 세르기의 미소에 녹아내리듯 작게 감탄했다.
황녀와 세르기가 협력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그레이스에게 접근했다. 처음에는 밀어내던 그레이스는 세르기의 드문 미모와 다정함에 넘어가 어느새 모든 정보를 그에게 술술 말하게 되었다.
말이 끝나면 늘 미련 없이 돌아가지만, 그레이스는 내년에 결혼식을 올리자는 세르기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이분은 달라.’
이제껏 정보만 노리며 다가온 남자들과 세르기는 달랐다.
“어때요?”
“아, 황녀님께 말씀드렸어요.”
“잘했어요.”
세르기의 미소에 그레이스는 그의 품을 파고들려고 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다음에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지도 몇 개월이 지났지만 세르기는 그레이스의 몸에 손 하나 대지 않았다. 그것이 그레이스의 믿음에 큰 거름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아쉬움을 지울 수 없는 그레이스는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에요?”
그레이스는 목소리를 낮췄다. 세르기가 건넨 정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정말 성녀님이 등장하시나요?”
“그럼요. 아무에게나 말하지 않은걸요.”
그레이스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역시, 자신은 세르기에게 특별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그레이스는 예고 없이 세르기를 끌어안았다.
동시에 세르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불쾌한 접촉을 할 때면 표정을 숨기기 힘들었기 때문에 차라리 그레이스의 머리를 덮어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했다.
“우리 내년에 결혼하는 거 맞죠?”
“날 믿지 못하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그냥 너무 좋아서요.”
세르기는 자신이 한 거짓된 약속에 집착하며 확인하려는 그레이스를 내려다보며 작게 혀를 찼다.
‘이제 이것도 버릴 때가 됐군.’
적당한 구실을 잡아 황녀에게 넘기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간단한 계획을 세우던 세르기는 이내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사로잡혔다.
‘그나저나 그분은 무슨 생각이시길래….’
다프네를 그 신전에 보낸 것일까?
데미안을 살릴 수 있다는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
솨아아아. 비가 쏟아졌다.
벤자민은 창밖을 보다가 가까이 다가갔다.
이틀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좀처럼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리는 비를 멍하니 보고 있는 그때, 종소리가 작게 울렸다.
에드먼이 침실에서 설렁줄을 잡아당겼다는 뜻이었기에 벤자민은 빠르게 술을 챙겼다.
계단을 오르는 벤자민의 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이틀 전, 에드먼이 돌아왔다. 약혼식 도중에 나왔고 술만 내리 찾았다. 벤자민은 그 이유를 뒤늦게 들을 수 있었다.
마님이… 강에 몸을 던지셨다.
왠지 모를 이상함에 에드먼의 뒤를 따랐던 알렉이 직접 본 것이었다.
막을 새도 없이 마님이 강에 몸을 던지셨다. 그 강은 검은 숲과 이어지는 곳이었고 조금만 흘러가면 검은 숲이었기에 매우 위험한 지역이었다.
알렉은 간신히 에드먼을 막을 수 있었다. 마님이 강에 몸을 던진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에드먼이 술을 찾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벤자민은 한숨을 삼키고 문을 두들겼다.
“각하, 들어가도….”
말이 다 끝나기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늘 술과 궐련에 취해 소파에 있던 에드먼이었기에 벤자민이 흠칫 놀랐다.
“각하?”
“술은 왜 챙겨 온 거지?”
문을 열고 등장한 것은 멀쩡한 에드먼이었다.
술과 궐련 냄새도 풍기지 않고 멀끔한 모습의 에드먼은 벤자민이 들고 온 술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물어볼 것이 있어서 부른 것이다.”
벤자민은 멍하니 에드먼을 보는 것도 잠시 허둥지둥 술병을 복도에 놓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불과 반나절 전, 바닥에 술병이 마구 나뒹굴었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평소처럼 깔끔한 집무실이었다.
에드먼은 의자에 앉았다. 책상 한쪽에는 처리된 서류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에드먼은 방금 서명을 마친 서류를 옆에 내려놓으며 가만히 서 있는 벤자민을 돌아보았다.
“앞으로 와.”
“아, 예, 예.”
“올가는 어디 있지?”
“…올가는 지하실에 있습니다.”
“심문 결과는?”
“이미 예전에 세뇌를 당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올가의 세뇌를 풀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저주를 건 주술사를 찾아야 했다. 하지만 아직 아무런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상태였다.
“닉은?”
“연락이 끊겼습니다. 한 번 더 연락을 취해 볼까요.”
에드먼은 반지를 매만지며 고개를 내저었다.
“됐다. 데미안의 상태는? 더 악화했는가.”
“며칠 전과 같습니다.”
에드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벤자민은 그가 데미안에게 가려는 것을 눈치채고는 얼른 몸을 틀었다. 에드먼이 그를 스쳐 가려는 그때, 벤자민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에드먼은 우뚝 멈췄다.
“괜찮다.”
벤자민은 그렇게 멀어지는 에드먼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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