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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69화 (69/145)

69화

다프네가 눈을 뜬 것은 이제 막 오후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아무리 늦게 잠이 들었다지만 이런 시간에 일어난 것은 처음이었기에 다프네는 잠기운이 남은 눈으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제 무리를 해서 그런가?’

다프네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밀려오는 어지러움에 순간 비틀거렸다.

‘목말라….’

습관처럼 침대 옆 작은 테이블로 손을 뻗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늘 물을 준비하던 안나가 사라졌으니 당연하였다.

문득 든 안나 생각에 다프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안나는 자신 때문에 큰일을 당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엘리자벳이 안나를 죽이지는 않았을 거라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거면 돼.’

살아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다프네는 불안정하게 빨리 뛰는 심장께에 손을 올리고 심호흡을 했다. 조금 안정되자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하녀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방으로 들어왔다. 하녀는 왠지 모르게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부, 부르셨습니까.”

“물 한 잔만 가져오겠니.”

“예, 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하녀는 마치 떠밀려 들어온 것처럼 다프네의 말이 끝나자마자 후다닥 방을 나갔다.

다프네는 의아함에 하녀의 뒷모습을 쫓았다. 문이 닫히기 전 얼핏 들리는 목소리에 다프네는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아닐 거야.’

초조함에 땀이 이마에서 흘러내렸다. 다프네는 축축해진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고 옆으로 돌렸다.

탁.

그러나 중간이 막힌 듯 문고리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마님.”

문 너머로 검은 기사단의 부단장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하녀를 다시 불러 드릴까요.”

“…상황 설명이 좀 필요한데.”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빨라지는 호흡을 최대한 가라앉히며 말했다.

“…각하의 명이십니다.”

“날… 가둔 게 그의 명이야?”

“가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오늘만….”

“열어.”

다프네는 문고리를 거칠게 돌렸다.

“열어!”

거친 숨 탓에 어깨가 크게 들썩거렸다.

“…죄송합니다.”

돌아온 대답에 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자 다프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다프네는 곧바로 창가로 달려갔다. 가까이에서 본 창문은 철장으로 막혀 있었고 바로 아래에는 기사들이 서 있었다.

다프네는 결국 벽에 몸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입술이 경련하듯 잘게 떨렸다. 입술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그러했다.

이게 가축이 아니라면 무엇이지? 난 이렇게 아이를 낳을 때까지 갇혀 지내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아이를 낳은 후에….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하… 하하….”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

웃음이 가시자 다프네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빨리 이 저택을 빠져나가야 했다.

다프네는 다급히 창가에 달라붙어 흠을 찾고자 애썼다. 하지만 철장은 촘촘했고 높이는 3층이었기에 탈출은 거의 불가능했다.

다프네는 최대한 숨을 느리게 들이쉬고 내뱉는 것을 반복했다. 거울 앞에 서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듬고 구겨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리고 문가로 향했다.

“데미안을 보고 올 테니 문 열어.”

“죄송합니다. 각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열 수 없습니다.”

다프네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 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대로 다른 이유를 계속 들먹였다가는 계획을 눈치챌지도 모른다.

번뜩 든 생각에 다프네는 드레스를 들어 올려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한 번의 심호흡 후 상처를 꾹 누르기 시작했다.

밀려오는 고통에 다프네의 몸은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뒤덮였다. 다프네는 누군가 들어오는 것조차 모른 채 상처가 터지길 기다렸다.

입 사이로 터져 나오는 신음을 꾹 억누르고 손에 힘을 더 주는 그때, 누군가에 의해 다프네의 행동이 저지되었다.

“마님!”

뉴벨 남작 부인은 다급히 다프네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 뭐 하세요!”

“부인.”

다프네는 충격을 받은 듯한 뉴벨 남작 부인을 보며 말했다.

“난 나가야 해.”

“마님….”

“도와주길 바라는 게 아니니깐 그냥 무시해.”

다프네는 붙잡힌 손을 빼냈다.

멍하니 있던 뉴벨 남작 부인은 정말 다프네가 겨우 아문 상처를 터트리려 한다는 것을 깨닫자 또다시 손을 붙잡았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이러지 마세요.”

그녀가 도와줄 것이라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다프네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탈출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가져오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라며 덧붙인 뉴벨 남작 부인이 나가고 다프네는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올렸다.

머지않아 별안간 문이 벌컥 열렸다.

뉴벨 남작 부인이라 생각하며 몸을 일으킨 다프네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올가?”

올가였다.

“쉿.”

올가는 검지를 입술 근처에 들어 올렸다.

“약효가 얼마나 갈지 모르겠어요. 부단장을 겨우 재웠으니 조용히 따라오세요.”

다프네는 올가의 붉은 눈을 보며 세르기가 편지에 말한 ‘데리러 간다.’의 뜻을 깨달았다.

세르기는 무려 에드먼의 저택에 사람을 심어 놓았다.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세르기의 행동에 다프네는 침음을 삼키며 올가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문을 지나치던 찰나.

“…마님?”

우뚝 선 상태로 기절해 있던 크리스가 깨어났다.

“뒷문으로 가세요.”

다프네가 뒤를 돌기도 전에 올가가 빠르게 속삭인 후 크리스에게 달려들었다.

“세계의 평화와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세계의 평화와 영원한….”

“올가 님, 이거 놓으십시오!”

다프네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렸다.

복도의 모퉁이를 돈 순간, 뉴벨 남작 부인과 마주쳤다.

둘은 서로를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마님!”

바로 뒤, 크리스가 올가를 제압하기 시작한 것을 본 다프네가 몸을 움직였고 뉴벨 남작 부인은 몸을 틀어 공간을 내주었다.

다프네는 입을 뻐끔거리며 뉴벨 남작 부인을 지나쳐 뒷문에 도착했다.

뒷문에는 처음 보는 마차 하나가 정차해 있었고 다프네는 올라타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퀴가 굴러갔다.

“마님!”

뒤에서 들리는 크리스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그가 작은 점이 되고 나서야 다프네는 안심했다.

“설마 누이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감금할 줄은 몰랐어.”

창밖을 보던 다프네는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세르기였다.

다프네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세르기를 붙잡았다.

“데미안을 구할 방법이 뭐예요?”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지난 새벽, 다프네에게 세르기가 보낸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데미안을 구할 방법을 알려 줄 테니 내일 저택을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급하게 굴지 마, 누이. 마침 네게 보여 줄 것도 있고.”

여유로운 그의 태도에 다프네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황궁이었다.

“…이게 오라버니가 제게 보여 줄 것이었나요?”

다프네는 화려한 약혼식을 보며 물었다.

“그래. 어때, 다프네.”

어떠냐니. 다프네는 아름다운 두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그저 데미안을 구할 생각밖에는.

“…데미안을 살릴 방법이나 알려 주세요.”

“뭐, 좋아. 검은 숲에 있는 신전으로 가야 해. 그 제단 위에 있는 물을 떠다가 마시게 하면 깨어날 수 있을 거야.”

“확실해요?”

“누이에게 거짓말을 해서 내가 얻는 게 뭐가 있겠어.”

세르기는 이어서 재촉했다.

“해가 지기 전에 가는 게 좋을 거야.”

“…잠깐만요.”

다프네는 자신을 발견한 에드먼의 눈일 피하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그에게 할 말이 있어요.”

***

‘다프네?’

에드먼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 멀지 않은 숲에서 눈이 마주친 이는 다프네였다. 하지만 다프네는 바로 사라졌다.

다프네가 이곳에 있을 리 없었기에 잘못 본 것이라 여기려던 찰나 알렉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각하, 마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뭐?”

“그리고 올가 님의 눈이 붉….”

“뭐 해요?”

잠시 자리를 비웠던 엘리자벳이 나타났다.

“이제 곧 약혼식이 시작될 거예요. 비가 올 것 같아서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니죠?”

“…일이 있어서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에드먼. 에드먼!”

엘리자벳은 자신이 막기도 전에 사라지는 에드먼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왠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따라가자.’

엘리자벳은 에드먼이 사라진 숲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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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았어.’

잘못 본 것이 아니다. 다프네가 맞았다. 에드먼은 다프네가 사라진 곳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일까. 다프네의 머리카락 한 올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에드먼의 귀에 물소리가 들렸다. 그는 홀린 듯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풀을 헤집으면서 나오자 약혼식 근처에서 흐르는 강과 연결된 물가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다프네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프네.”

에드먼의 부름에 다프네가 뒤를 돌았다.

달빛에만 겨우 의지한 채 어두운 방 안에서 봤던 다프네는 햇빛 아래에서 보자 더욱 창백하고 말라 있었다.

“오늘 자리를 비운 이유가 약혼식 때문이었어요?”

다프네의 건조한 물음에 에드먼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까지 숨길 필요 없었을 텐데요. 그냥 말하지 그랬어요.”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다프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다프네는 물가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왠지 그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기에 에드먼은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지만 다프네는 곧바로 막아섰다.

“다가오지 말고 들어요.”

“에드먼, 거기 있어요?”

엘리자벳의 목소리에 에드먼은 뒤를 돌았다.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은 바로 근처에서 들렸다.

“다프네, 장소를 옮기고 마저….”

“아니요. 난 여기서 묻고 싶어요.”

“에드먼?”

엘리자벳의 소리가 가까워진다. 다프네는 느리게 입을 열었고 둘의 눈이 마주쳤다.

“에드먼, 여기서 무엇….”

“단 한 순간이라도 날 사랑한 적 없나요?”

이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멈췄다. 엘리자벳이 바로 뒤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에드먼은 뒤돌아볼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다프네의 물음으로 가득 찼다.

엘리자벳이 바로 뒤에 있다. 자신의 대답에 따라 다프네가 살 수도,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없습니다.”

“…그렇군요.”

다프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마치 지난 새벽 지었던 것과 같은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아슬아슬한, 미련 하나 남지 않은 미소.

“고마워요.”

다프네의 몸이 기울어진다.

풍덩!

소름 끼치는 물소리가 에드먼의 귀를 가득 에워쌌다.

툭, 비가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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