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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68화 (68/145)

68화

다프네는 눈을 빠르게 몇 번 깜빡였다.

에드먼의 얼굴을 담은 눈이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럼….”

아이를 낳은 후에는요?

다프네는 결단코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물었다.

아이를 낳은 후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가 원하는 건 내가 아닌 오직 내 배 속의 아이뿐인데. 아이를 낳으면 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다프네는 두려움에 잠식되어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한 채 가는 숨만 헐떡였다.

“아시겠습니까.”

다프네는 에드먼의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차디찬 시선이 모든 것을 말해 줄 것 같았기에, 다프네는 일부러 눈을 내리깔며 에드먼의 시선을 피했다.

“우리 사이는 달라질 게 없습니다.”

“…우리 사이가 뭔데요?”

저절로 튀어 나간 물음이었다. 도대체 당신과 나는 무슨 사이일까. 서로 상처 주는 것밖에 하지 않는 우리 사이가, 남보다 못한 우리가, 도대체 무슨 사이인가.

“…당신은 내 씨를 품었고. 나는 그것을 책임져야 하고.”

에드먼은 빠르게 둘 사이를 정의했다.

다프네는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것이 꽤 마음 아팠다.

자신은 그저 어디까지나 그의 씨를 품은 여인에 불과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에드먼은 다프네가 애써 무시하고 있던 것을 자각시켜 주었다. 그것이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도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

그것을 다시금 깨달은 다프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요.”

다프네는 빠르게 덧붙였다.

“피곤해서 그런지 몸이 좋지 않아요. 나가 주시겠어요?”

“…쉬세요.”

에드먼은 몸을 일으켰다.

몸 위를 덮었던 에드먼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다프네는 텅 빈 느낌을 받았다. 마음 한편에 자리하던 무언가가 빠져나간 것처럼. 다프네는 고장 난 인형처럼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던 에드먼이 고개를 돌리자 미소를 지었고, 그가 사라지고 나서조차 가만히 앉아 있었다.

됐다. 이것으로 됐다.

에드먼은 다프네를 사랑하지 않는다. 다프네는 에드먼을 사랑하길 포기했다. 달라질 게 없다는 그의 말이 맞다.

에드먼은 다프네를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으며, 사랑할 리 없으니까.

“하….”

남은 것은 너덜너덜해진 마음밖에 없는 짝사랑의 끝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다프네는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저도 모르게 꽉 쥔 주먹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톡, 톡.

톡, 톡.

반복되는 소리에 다프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휘청거렸다.

다프네의 시선이 향한 곳은 창문이었다. 창문 앞에는 눈이 붉은 까마귀 하나가 종이를 내려놓은 채 창문을 부리로 쪼고 있었다. 다프네는 비틀거리며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열어 편지를 뜯은 다프네의 손이 잘게 떨렸다. 창백한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참을 수 없는 조소가 비집고 나왔다.

이내 다프네는 굳은 표정으로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오라버니….”

당신은 에드먼 못지않은 악마야.

다프네는 중얼거렸다.

***

딸깍.

에드먼은 자신의 손 움직임에 따라 타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불빛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무심코 옮긴 시선의 끝에는 이제 막 동이 뜨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을 또 가만히 보던 에드먼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에는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에드먼이 서명할 자리만 비워진 이혼 서류였다.

라이터를 내려놓은 에드먼은 이혼 서류를 또다시 살폈다. 읽고 또 읽어 내렸다.

하지만 달라진 점은 없었고 여전히 다프네는 서명했으며 에드먼은 서명하지 않았다.

에드먼은 펜을 들었다.

그러나 서명 칸에 닿기 직전 손이 멈추었다.

“하.”

왠지 다프네가 남기고 간 이혼 서류에 서명하지 못하던 때가 떠올랐다.

“각하.”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을 각하라 부르던 다프네의 모습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 갔다.

다프네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것은 결혼 발표를 한 즈음이었다. 다프네는 통 눈을 맞추지 않는 여인이었고 많은 이들 앞이면 이상하리만큼 몸이 굳었다.

에드먼은 그것이 신경 쓰였다.

결혼식 당일, 식을 끝내고 피로연에 참여하기 전 에드먼은 다프네에게 말했다.

“내 이름을 불러.”

“네?”

“그러다가 그대와 내 사이를 누군가 의심하리라 생각한 적 없나.”

“아….”

다프네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 보였다.

“…에드먼.”

마치 연습을 하듯 다프네가 그의 이름을 중얼거린 동시에 그들 앞에 문이 열렸고 에드먼은 그녀를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가죠, 다프네.”

에드먼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그의 존대의 놀란 것인지 다프네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그 일 후로 서로의 이름을 자연스레 불렀다. 단 한 번도 이름을 부르지 않은 적 없었는데.

“각하.”

다시금 다프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자 두통이 시작되었다.

에드먼은 옅게 신음하며 상체를 의자에 묻은 채 눈을 감았다가 두통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서야 눈을 떴다.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들어와.”

에드먼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두통에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들어온 이는 벤자민이었다. 의외의 인물이었기에 에드먼은 미간을 좁혔다.

다프네와 이혼하고 황녀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이 맞다고 했을 때 벤자민은 충격을 받은 듯했기에 며칠 동안 자신을 피해 다닐 것이라 예상했다.

“각하.”

“무슨 일이냐.”

“저, 그것이…. 오늘이 약혼식이라는 것을 마님이 아실는지요.”

아. 에드먼은 눈을 깜빡였다. 오늘이 약혼식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모른다.”

“조금 있으면 황실 마차가 올 텐데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들기던 에드먼은 답을 찾은 듯 머지않아 손을 멈췄다.

“수면제를 먹여.”

“마님께 말입니까?”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약한 것으로. 아이도 있으니까.”

“…예. 뉴벨 남작 부인께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벤자민이 허리를 숙인 후 나갔다.

에드먼은 서류를 집었지만, 글자가 제대로 눈에 담기지 않자 결국 미간을 문지르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각하.”

또다시 다프네의 목소리가 올리자 에드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알렉.”

에드먼은 연무장 근처에 위치한 알렉의 방을 무작정 열었다.

“각하?”

업무를 보고 있던 알렉은 갑작스러운 에드먼의 등장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와.”

알렉은 이내 에드먼이 하고자 하는 것이 뭔지 깨닫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후 연무장으로 향했다.

알렉이 연무장으로 들어오자마자 에드먼이 달려들었다.

“큭.”

에드먼의 힘에 순식간에 뒤로 주욱 밀린 알렉은 힘겹게 검을 밀어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

평소에 힘 조절을 잘하던 에드먼은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있었다.

그가 힘을 조금만 더 실으면 크게 다칠 우려가 있었기에 알렉은 안간힘을 쓰며 그를 상대했다.

그러기를 얼마 후.

“수고했어.”

에드먼은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은 채 검을 내렸다. 알렉은 그 말에 대답할 힘도 없었기에 간신히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옷 갈아입고 외출할 준비 해. 검은 기사단에도 일러두도록.”

뜬금없는 말에 알렉이 물음을 표하기도 전에 그가 사라졌다.

그대로 방에 돌아온 에드먼은 잘게 떨리는 오른쪽 팔을 내려다보았다.

검을 맞댈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고 에드먼은 더 힘을 주었다. 고통이 무뎌질 때마다 더 큰 고통이 올 수 있도록.

옷을 다 갈아입자 누군가 방으로 들어왔다.

“각하, 황실에서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몸을 돌리자 벤자민이 서 있었다.

“마님께서는 잠드셨습니다.”

수면제를 먹였다는 뜻이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방에서 나오게 하지 마.”

“…예.”

저택을 나오자 난데없는 황실 마차의 등장에 나와 있는 이들과 마주했다.

에드먼과 대련 후 그의 명령대로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끝낸 알렉은 황실 마차가 저택 앞으로 왔다는 소식에 헐레벌떡 나온 상태였다.

그는 황실 마차와 에드먼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굳은 얼굴로 에드먼에게 다가왔다.

“크리스를 다프네의 방 앞에 배치해.”

“각하.”

“보초를 설 이들을 제외하고 다 날 따라와.”

에드먼은 그대로 마차에 올랐다.

남은 이들은 끝내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각하께서는 이미 마님과 이혼하신 후고 황녀님과의 약혼식을 위해 마차에 올랐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약혼식임에도 사람이 북적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려 윈터 공작과 엘리자벳 황녀의 약혼식이다. 그것도 이제 막 이혼한 윈터 공작과 엘리자벳 황녀다.

처음 이 소문이 퍼졌을 때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소문을 퍼트린 남작 가문의 영애가 황녀의 최측근 시녀가 된 후로 그 소문이 진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결정적으로 수도에 있는 거의 모든 귀족에게 둘의 약혼식 초대장이 돌기 시작했다.

제국은 물론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이 약혼식은 윈터 공작 부인이 황실의 실수로 아이를 유산했다는 소문을 덮기에 충분했다. 전 윈터 공작 부인이야 누가 신경 쓴단 말인가.

모든 이들의 시선은 이 약혼식의 주인공들에게 향했다.

엘리자벳 황녀는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윈터 공작은 비록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으나 모두가 그거 긴장한 것이라 여겼다.

약혼식이 열린 장소는 사냥 대회가 열린 근처였다.

강이 흐르고 새가 지저귀는 동화 속 한 장면을 본떠 만든 곳에 함께 서 있는 두 주인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어때, 다프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세르기가 물었다. 이제 믿냐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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