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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66화 (66/145)

66화

다프네가 깨어났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것은 그다음 날 오후가 되기 전이었다.

“…상태는?”

에드먼은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거동을 아직 잘 못 하시지만 식사는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그만큼의 출혈이 났음에도 상당히 이른 회복이었다.

에드먼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아 벤자민이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가지 않으시려는 겁니까?”

“…아니. 가야지.”

중얼거린 에드먼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다프네가 있는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다프네가 깨어난 즉시 보고가 올라온 탓인지 아직 뉴벨 남작 부인이 있었고, 다프네는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각하.”

조용히 들어온 에드먼을 발견한 뉴벨 남작 부인이 몸을 일으켜 조용히 물러갔다.

다프네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을 향해 있었다.

에드먼은 침대 옆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다프네.”

그 부름에 다프네가 고개를 돌리자 부스스하면서도 초췌한 얼굴이 보였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다프네는 마른 음성으로 대꾸했다.

“알다시피 그대와 곧 이혼할 겁니다. 그리고 나는 황녀와 결혼할 것이고.”

“네, 알고 있어요.”

다프네는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로 먼저 내려가 있으면 모든 걸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정리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에드먼의 말에 또다시 고개를 끄덕일 뻔한 다프네가 되물었다.

“누누이 말했잖습니까.”

“…….”

“난 그대를 놓아줄 생각 없습니다.”

다프네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하, 당신은, 정말….”

헛웃음을 내뱉는 것도 잠시, 다프네는 힘없이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이불을 꽉 쥔 손이 새하얗게 질리다 못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 때문에 그래요?”

다프네는 고개를 들었다.

이불을 쥐던 손은 어느새 납작한 배 위에 있었다.

에드먼의 대답 따윈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는 듯이 질문을 이어 갔다.

“어떻게 됐어요?”

“…….”

“아이, 살아 있나요?”

다프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물었다.

마치 에드먼을 시험하듯이.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살아 있습니다. 운이 좋았죠.”

그 말에 다프네는 스륵, 배 위에 덮었던 손을 떨궜다.

“그러네요. 운이 좋은 아이네요.”

다프네는 에드먼의 말을 그대로 따라 중얼거렸다.

“데미안을 만나게 해 줘요.”

“그렇게 하세요.”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눈을 깜빡이던 다프네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

“피곤해요, 나가 줘요.”

에드먼은 들어왔을 때처럼 조용히 방을 나갔다.

방 앞에는 뉴벨 남작 부인이 서 있었다. 에드먼은 다프네 대신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잠들었으니 나중에 찾아와.”

“예, 알겠습니다.”

뉴벨 남작 부인이 다프네를 다시 찾아간 것은 반나절이 흐른 뒤였다.

“일어나셨군요.”

“…응.”

다프네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뉴벨 남작 부인은 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꼼꼼하게 닫았다. 그사이 다프네는 이불을 걷은 상태였다.

뉴벨 남작 부인은 자리를 잡고 붕대를 꺼냈다. 그녀는 어젯밤 다프네를 치료하면서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 번째, 다프네는 하혈을 한 것이 아니다.

“상처가 꽤 깊습니다.”

뉴벨 남작 부인은 다프네의 허벅지 깊은 곳에 난 상처를 살폈다. 다행히 근육까지 다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혈관을 건든 탓에 피가 상당했다.

그리고 두 번째, 이 상처는 다프네가 직접 낸 것이다.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 묻지 않겠습니다.”

다프네는 붕대를 가는 뉴벨 남작 부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뉴벨 남작 부인은 결국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너무 무모한 짓이었습니다.”

“…….”

“조금만 더 깊었다면 남은 평생 다리를 절며 살 수도 있었어요.”

“…….”

“들켰을 수도 있고요.”

“…그냥.”

다프네는 멍한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그대라면 왠지 말하지 않을 것 같아서.”

뉴벨 남작 부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프네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이 사실을 에드먼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 에드먼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한 후 얼마나 후회했던지. 다른 시답잖은 말이나 하리라 결심까지 했었다.

속마음을 모조리 들킨 뉴벨 남작 부인은 숨을 한 번 깊게 고른 후 말을 이었다.

“현재 마님의 몸은 엉망이십니다. 독도 쌓여 있고 거동도 불편하시고. 더군다나 팔의 화상도 치료의 때를 놓쳐 고름이 가득 차 있으세요.”

어쩐지, 욱신거리더라.

다프네는 중얼거리며 화상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뉴벨 남작 부인의 말대로 화상 자국 위에는 고름이 차 있었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깨끗한 붕대로 간 후 뉴벨 남작 부인은 방을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뒤뜰에 위치한 소각장으로 향하여 바구니 안에 몰래 숨긴 피 묻은 붕대를 태우기 시작했다.

조금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불 앞에서 뉴벨 남작 부인은 다른 이들이 올까 서둘러 꼬챙이로 붕대를 깊이 쑤셔 넣었다.

그녀는 바로 옆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오기 전부터 놓여 있던 바구니 안에는 아랫단이 뜯긴 피 묻은 셔츠가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하혈을 한 줄 알고 드레스를 들쳤을 때 다프네의 허벅지는 이미 지혈된 상태였다. 워낙 상황이 급했던 터라 그것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만약 그 지혈을 하지 않았다면 다프네는 영영 깨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뉴벨 남작 부인은 홀린 듯 손을 뻗어 셔츠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이렇게나 질 좋은 셔츠를 입는 사람은 저택에서 오직 단 한 명뿐이었다.

***

“그런 일도 있었군요?”

엘리자벳은 오랜만에 전해 듣는 사교계 이야기에 눈을 반짝였다.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가십거리는 이미 시녀를 통해 들었으나 영애들은 시녀가 알지 못하는 내막을 더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처음 듣는 것처럼 반응할 수 있었다.

“그동안 심심하셨겠어요. 황녀님께 얼마나 찾아오고 싶었는지 몰라요.”

황족이, 그것도 독살을 당할 뻔한 탓에 모든 면회가 금지되었다.

그 덕분에 엘리자벳은 종일 아픈 척을 하지 않아도 되니 편했지만, 장단에 맞춰 아쉬운 체를 했다.

“그래도 큰일 없이 지나가서 다행이에요.”

“어머, 영애. 큰일이 없긴요.”

말을 끊은 영애가 슬쩍 엘리자벳의 눈치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게… 제가 이 일의 범인에 대해 얼핏 들은 게 있어서….”

엘리자벳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도 정말 믿을 수 없지만… 맞아요.”

“세상에, 그런!”

입은 걱정이 담긴 말을 쏟아 냈지만, 눈은 반짝거렸다.

엘리자벳이 그 영애를 소문을 전달해 줄 새 역할로 정했다는 것을 눈치챈 그레이스가 허리를 살짝 숙여 빠르게 신상 정보를 읊었다.

“일린 영애, 내 옆자리로 와요.”

가난한 남작 가문의 혼기가 꽉 찬 외동딸.

엘리자벳의 눈치를 보며 기다리던 일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옮겼다. 주변의 영애들은 기회를 놓친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그 소문은 어떻게 들었나요?”

대뜸 묻자 일린은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엘리자벳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영애를 나무라려는 게 아니에요. 혹여 이 소문이 잘못 새어 나가 에드먼에게 피해가… 어머!”

“황녀님, 지금 윈터 공작님의 이름을 부르신 건가요?”

“세상에. 이게 습관이 돼서 저도 모르게… 다들 못 들은 거로 해 줄 거죠?”

다들 고개는 끄덕였지만, 눈은 숨길 수 없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그게….”

엘리자벳의 말이 이어질수록 영애들은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된 거예요.”

“…세상에.”

일린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두 분은 서로를 좋아하고 계셨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아 윈터 공작님께서 먼저 결혼하셨고, 이번에 수도로 올라오셨을 때 마음을 확인하셨다는 거죠?”

일린은 엘리자벳이 둘러 말한 말의 핵심만 정확히 정리해 줄줄이 읊었다.

“그런데 공작님께서는 여전히….”

자리에 끝에 앉은 영애의 중얼거림이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엘리자벳의 표정이 얼핏 굳은 것을 바로 확인한 일린은 마치 황녀의 최측근 시녀라도 된 듯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영애, 그 말을 지금 꼭 여기서 꺼내야겠어요?”

“일린 영애, 전 괜찮아요.”

“황녀님….”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엘리자벳이 정말 괜찮아 보였기에 영애들은 의아함을 삼켰다.

“설마….”

“맞아요.”

일린의 말에 엘리자벳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정리하기로 했어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아무리 포장해 봤자 엘리자벳은 부부를 이혼시킨 불륜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서로 난감해하는 사이 일린이 외쳤다.

“정말, 정말 축하드려요. 황녀님!”

역시, 엘리자벳은 사람을 정확히 보았다.

일린을 시작으로 다들 엘리자벳과 에드먼을 축하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처음에는 얼떨결에 장단을 맞추던 이들은 열심히 아부를 떨었다.

그때였다. 시녀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와 한 귓속말에 엘리자벳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했다.

“뭐? 에드먼이 왔다고?”

이제 막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장본인이 왔다는 말에 영애들의 얼굴이 반짝거렸다.

“공작님께서 오셨나요?”

“이대로 돌려보내면 저희가 너무 죄송스럽죠. 차 한 잔이라도 하고 가시라고 하세요.”

“그럼… 공작님을 모셔 오렴.”

머지않아 꽃다발을 든 에드먼이 나타났다.

영애들은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본 에드먼에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다른 남자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와 훤칠하게 벌어진 어깨. 모든 예술인의 뮤즈라 불리는 아름다운 얼굴과 서늘한 눈매의 조화에 넋을 놓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에드먼, 어쩐 일이에요?”

“…이게 무슨 일입니까.”

에드먼은 낮게 읊조렸다.

갑자기 계약을 들먹이며 부르지 않나, 꽃다발을 쥐여 주며 티타임이 열리는 장소로 들이밀지 않나.

“웃어요. 지금 우린 누가 봐도 행복해 보여야 하니까요.”

에드먼이 미간을 좁혔다.

엘리자벳은 그것을 못 본 척 에드먼의 팔짱을 끼고 뒤돌았다.

“사실 영애들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엘리자벳은 화사하게 웃었다.

“일주일 뒤, 우리의 약혼식이 열릴 예정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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