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이른 아침, 수도에 위치한 윈터가의 입구의 보초를 선 기사는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이제 막 뜨기 시작한 해를 넋 놓고 바라보는 와중이었다.
기사는 쪼그려 앉아 바닥을 가만히 보았다.
“…기분 탓인가?”
분명 땅이 울리는 진동을 느꼈는데 고요할 뿐이었다.
잘못 느낀 것이라 여기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
저 멀리서 모래바람이 일어나고 있었다. 말을 탈 때 생기는 모래바람이라는 것을 아는 기사가 고개를 쭉 빼 들자 아까 그가 느낀 진동이 거세게 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른 시간 말을 몰고 오갈 일이 적었기에 기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각하?”
다름 아닌 자신이 보초를 서고 있는 가문의 주인이었다.
그가 나가는 것을 본 적 없는 기사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문을 열어!”
어느 정도 가까이 온 에드먼이 소리치자 멍하니 있던 기사가 허둥지둥 닫힌 정문을 열었다.
머지않아 에드먼은 빠르게 안으로 사라졌다.
기사는 순식간에 시끄러워지는 저택을 보며 자신이 봤던 것을 되짚었다.
분명 각하의 품 안에는 마님이 계셨다. 금방 숨이 넘어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창백한 마님이.
이른 아침, 홀연히 사라졌던 에드먼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의식을 잃은 다프네가 함께였다.
잠을 청하고 있던 뉴벨 남작 부인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한 채 에드먼의 방으로 들어와야 했다.
다프네를 본 뉴벨 남작 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프네의 간소한 베이지색 드레스의 아랫부분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라 판단한 뉴벨 남작 부인은 곧바로 진료를 시작했다.
준비된 믿을 만한 의원이 없던 탓에 그녀 혼자 모든 것을 해야 했다.
그렇게 몇 번의 고비를 맞이하던 힘든 시간이 흐르고, 뉴벨 남작 부인은 한층 혈색이 돌아온 다프네를 보며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후….”
흐르는 식은땀을 대충 닦아 낸 그녀는 몇 시간 만에 허리를 폈다.
마지막으로 열을 재고 출혈이 멈춘 것을 확인한 후 다프네가 고비를 넘겼다는 것을 확신하고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보이는 에드먼의 모습에 뉴벨 남작 부인은 흠칫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각하.”
“다프네는?”
에드먼의 시선이 곧바로 뉴벨 남작 부인의 어깨 뒤, 침실로 향했다. 더 정확하게는 다프네에게로.
“고비는 간신히 넘겼습니다.”
에드먼은 눈을 감았다가 옅은 숨을 내뱉은 후 떴다.
뉴벨 남작 부인은 문득 자신이 이 방에 막 들어왔을 때 침대 곁에 우두커니 서서 다프네를 내려다보던 에드먼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프네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얼굴과 거친 호흡. 그리고 무엇보다 마치 세상에 다프네와 단둘이 남겨진 듯 그녀를 보던 시선.
진료를 위해 나가야 한다는 말에 한참 뒤에 반응하며 문이 닫힐 때까지 그의 시선은 다프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보는 에드먼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출혈이 상당하고 몸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큰일을 연달아 두 번이나 겪으신 탓에 더 마르셨고요.”
고작 며칠 만에 본 다프네는 더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그래도 다프네 탓만은 아니었다. 주변 환경이 좀처럼 그 마른 몸에 살이 붙을 틈을 주지 않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독이 아직 남아 있어 회복이 전보다 훨씬 더뎌질 것 같습니다.”
설상가상 몸에 쌓인 독이 다 빠져나가지 않았다.
일반인이라면 다 빠지고도 남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으나 약해질 대로 약해진 다프네의 몸은 여전히 독을 머금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말을 하는 와중에도 뉴벨 남작 부인은 그런 최악의 사태는 상상도 하기 싫었기에 고개를 내저었다.
데미안이 깨어나지 않고 상황이 악화되는 와중에 다프네마저 큰일을 당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됐을 것이다.
“혹시… 더 궁금하신 게 있으세요?”
뉴벨 남작 부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배 속의 아이 얘기나 혹은 배 속의 아이 얘기 등등….
“다른 주의해야 할 점은 있나?”
예상과는 다른 물음이 돌아오자 침까지 삼키며 대답할 준비를 한 뉴벨 남작 부인이 반 박자 늦게 대꾸했다.
“아, 이상하게 손의 상처가 심하세요. 손톱도 다 상하여 곧 빠질 것 같은 게 몇 개 있고, 멍도 드신 것이 단단한 무언가를 손으로 세게 두드리고 긁은 것 같습니다.”
“그렇군. 아침부터 소란스럽게 했군. 가서 쉬어.”
뉴벨 남작 부인은 이내 몸을 돌렸다.
“저, 각하.”
두어 걸음을 걷고 몸을 돌리기까지 수십 번, 수백 번 고민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프네에 대해 관련된 것인가.”
에드먼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예.”
“그 얘긴 나중에 하지.”
에드먼의 시선은 뉴벨 남작 부인을 빗나가 있었다.
뉴벨 남작 부인이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요한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리를 비켜 주겠나.”
일전에 에드먼이 그녀에게 말한 것은 없지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확신한 뉴벨 남작 부인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에드먼은 다가오는 요한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널 부른 적 없는 것 같은데.”
“실례를 무릅쓰고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리시는 처벌은 나중에 한꺼번에 받도록 하겠습니다.”
에드먼은 다프네가 있는 자신의 방을 흘끔 본 후 뒤돌았다.
“따라와.”
그가 향한 곳은 집무실이었다.
밤사이 차가워진 방에 들어선 에드먼은 의자에 앉았다.
“아침에 생긴 일에 대해 전해 들었습니다.”
에드먼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각하께서도 아시겠죠.”
“말해 봐.”
어디 한번 입 밖으로 내뱉어 보라는 에드먼의 경고였다.
요한은 고요한 눈으로 에드먼을 응시했다.
“이용하십시오.”
“…….”
“마님이 유산하셨다 하시고 황실을 공격하십시오. 이건 기회입니다.”
“…….”
“각하께서는 분명 황실 의원에게 마님을 보이시지 않으셨을 테죠. 마님의 상태를 알 방도가 그들은 없습니다.”
요한의 말이 끝났다.
에드먼은 화를 쏟아 내지도, 돌아가라 말하지도 않은 채 그저 책상을 느리게 두들겼다.
그리고 품 안에 손을 집어넣더니 멈칫하며 종이 하나를 꺼내고, 곧이어 궐련을 꺼내 불을 붙였다.
치이익.
궐련의 끝이 타올랐다.
창문 하나 열어 두지 않았기 때문에 방 안은 빠르게 궐련 연기로 가득 찼다.
계속 버티던 요한은 궐련이 반 이상이 타오를 때쯤, 비틀댔다. 그러나 요한은 이내 다시 곧은 자세를 잡았다.
에드먼은 줄곧 손에 난 흉터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프네와 곧 이혼한 후 황녀와 결혼할 예정이다.”
“…….”
요한의 눈이 잘게 떨렸다.
“그게… 마님을 빼 오는 대가였습니까?”
“그건 극히 일부분에 불과해.”
에드먼은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애매한 대답을 했다.
“이혼한 후에도 이 일로 황실을 공격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이 일은 제가 도맡아 준비하겠습니다.”
“보고서는 다른 이를 통해 주고받는 것으로 충분하겠지.”
에드먼은 여전히 요한에게 실망하였고, 그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예. 모든 보고는 집사님을 통해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나가.”
모든 볼일이 끝나자 축객령이 떨어졌다. 요한은 허리를 숙인 후 집무실을 나갔다.
궐련을 재떨이 위에 놓은 에드먼은 채 빠지지 않은 궐련 연기를 그저 가만히 응시하다가 손을 들어 심장 위에 올려놓았다.
쿵, 쿵, 쿵.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다프네가 하혈을 한 채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향했다.
“다프네!”
마치 다프네를 집어삼킬 듯 피에 흠뻑 젖은 드레스 자락이 가장 처음으로 보였다.
우스운 것은 그 와중에도 다프네의 상태를 보려는 황실 의원을 밀쳐 내고 다프네를 들어 올렸다는 것이다.
이미 정신을 잃은 다프네의 손이 툭, 허공으로 떨궈졌다.
“공작님! 위급한 상황입니다. 당장 공작 부인을 내려놓으십시오.”
의원에 말에 에드먼은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된다.”
“공작 부인을 살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살리고 싶지 않으냐니.
정말 살리고 싶지 않다면 이렇게 달려오지도 않았을 텐데.
터무니없는 질문에 코웃음 마저 나려던 찰나 에드먼은 창백한 다프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에드먼은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십니까!”
다급히 묻는 황실 의원에 말에 에드먼은 곧바로 말을 타고 저택으로 왔다.
에드먼은 그제야 아직도 자신이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했다. 손과 옷에는 다프네의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옷을 벗고 새 셔츠의 단추를 채우던 에드먼은 문득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피 묻은 셔츠의 찢어진 아랫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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