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뚜벅, 뚜벅.
조급한 발걸음 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걸음은 문 앞에서 멈췄다. 다급하게 자물쇠를 푸는 소리가 나고 이내 문이 벌컥 열렸다.
“…다프네.”
독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에드먼은 문 앞에 주저앉은 다프네를 발견하고 멈췄다.
그 목소리에 다프네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더니 느리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프네를 본 에드먼은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입술은 각질이 하얗게 올라와 있고 눈은 밤을 새운 사람처럼 퀭했으며 몸은 힘없이 축 처져 있었다.
“에드… 먼.”
입 안이 버석하게 마른 탓에 낮고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다프네는 마치 오랫동안 멈춘 머리를 굴리듯 버벅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에드먼?”
“왜 이곳에 앉아 계십니까.”
에드먼은 다프네를 들어 올렸다.
다프네의 마른 몸이 가볍게 들려 침대에 앉혀졌다. 에드먼은 뛰어오기라도 한 듯 조금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사이 다프네는 에드먼을 빤히 쳐다보다가 자신에게 닿았던 그의 손을 보고는 다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당신이에요?”
“맞습니다.”
다프네는 황급히 손을 뻗어 에드먼의 옷자락을 힘주어 꽉 붙잡았다.
“데미안은… 어때요?”
두려움에 차마 데미안이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 맞냐고 묻지 못했다.
다프네는 부디 거짓이길 바라며 에드먼을 응시했다.
“괜찮은 거 맞죠?”
두 번째 물음에서는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 왔다.
다프네는 밀려오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했다. 그러나 에드먼의 옷자락을 쥔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힘이 가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다프네.”
에드먼의 부름에 다프네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의원이 다녀갔습니까?”
“…네?”
다프네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되돌아오자 멍하니 되물었다.
“의원이 다녀간 게 맞습니까?”
그녀는 자신이 어떤 질문을 했는지 생각했다가, 제대로 한 것이 맞다는 것을 확신한 후에야 에드먼의 말에 대꾸했다.
“맞아요.”
“그리고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대꾸한 후에도 에드먼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프네는 길게 덧붙였다.
“당신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아요. 그런 일 없었어요. 의원은 제게 손도 대지 못….”
그가 진짜 궁금해하는 게 무엇인지 깨달은 다프네는 중간에 말을 끊었다.
“아이는 멀쩡해요. 그러니 말해 줘요.”
“…….”
“데미안의 몸은… 괜찮나요?”
별것 아닌 질문에도 에드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죠?”
다프네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아니잖아요.”
그저 세르기가 나를 자극하기 위해 꾸며 낸 것이라 몇 번이나 생각했다. 그 계획이 성공했으니 세르기를 향해 제발 나오라고 소리치기를 몇 번.
에드먼의 얼굴을 마주한 다프네는 인정해야 했다.
“데려가 줘요.”
“…….”
“제발. 지금이라도 손을 쓰면 괜찮아질지도 몰라요. 제발 나를 데미안에게 데려가 줘요. 네?”
다프네는 간절히 속삭였다.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황녀가 말했습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허탈한 음성으로 말한 다프네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애써 가라앉혔다.
숨을 내뱉는 턱이 파르르 떨렸다.
“데, 데미안의 상태는 어때요? 깨어날 기미조차 없어요? 다른 반응 같은 건 해요?”
“그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무리 계약 결혼이라지만 내가 그 정도는 알 권리가 있잖아요.”
에드먼은 무덤덤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대가 안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다프네.”
“…아는 것조차 안 되나요?”
에드먼은 말없이 긍정했다.
다프네는 입술 사이로 허탈함을 내뱉었다.
“알겠어요. 알겠으니까… 얼굴 한 번만 보고 오면 안 돼요? 잠깐이면 돼요. 멀리서 봐도 상관없으니까 잠깐만… 아주 잠깐이면….”
“경비가 강화되었고, 마법까지 걸어 놔 불가능합니다.”
“당신은 할 수 있잖아요.”
다프네는 확신했다.
“가능하잖아요, 당신은.”
“들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프네는 문득 이 대화에서 답답함이 느껴지는 이유가 자신이 벽과 대화하는 것 같다는 기분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드먼. 당신… 날 이곳에서 빼낼 생각은 있어요?”
“…….”
아.
에드먼은 나를 이곳에서 꺼내 줄 생각이 없어.
그것을 이제야 눈치챈 다프네는 무슨 말을 내뱉어야 할지 몰라 눈을 깜빡였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고요?”
다프네는 조금 멍하니 에드먼의 말을 되짚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도대체 뭐지?
“나중에 다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해 줘요. 당장.”
다프네의 완강한 태도에 에드먼이 입술을 달싹거리던 찰나.
“에드먼.”
누군가 그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며 방으로 들어왔다.
“…황녀님.”
“그냥 이름으로 부르라니까요.”
엘리자벳은 화사하게 웃으며 에드먼의 팔에 팔짱을 꼈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갔나 싶었는데… 부인께 말해 주러 온 거였군요?”
다프네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다정하게 낀 팔짱. 서로를 친근하게 부르는 애칭. 반짝이는 황녀의 눈동자.
에드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엘리자벳은 이내 아, 하면서 입가를 가렸다.
“어머, 이제는 부인이 아니라 전 부인이죠?”
엘리자벳은 다프네를 향해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에드먼이 내 제안을 수락했다고. 이혼 서류도 가져갔다는 걸요. 음, 여기 있네요?”
엘리자벳은 에드먼의 품에서 조금 삐져나온 종이를 콕, 집었다.
쿵.
‘뭐지?’
다프네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상함에 대해 제대로 생각할 틈도 없이 엘리자벳이 움직였다.
“에드먼, 이만하고 내 방으로 가요. 내가 몹시 어렵게 구한 과일주나 한 잔씩 할까요? 날이 밝으면 아버지께 인사드리러 가요.”
엘리자벳은 에드먼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 그래서.’
뇌리에 꽂힌 듯 번뜩, 무언가를 알게 된 다프네는 순응했다.
에드먼이 저를 이곳에서 빼내 주지 않으려는 이유는 다름 아닌 엘리자벳과 수월하게 결혼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잡음 없이 깨끗하고 순수한 결혼을 할 수 있으니까.
자신은 그저 걸림돌에 불과한 것이었다.
“…예, 가죠.”
순순히 엘리자벳을 따르는 에드먼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았다.
다프네는 그저 그렇게 멀어지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염없이.
***
ㅎㅂㄹㄱ.공금
“어딜 그렇게 서둘러 가나 했는데, 전 부인에게 간 거였어요?”
방으로 돌아온 엘리자벳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에드먼이 오기 전까지 홀로 홀짝이고 있던 과일주를 다른 잔에 담아 내밀었으나 에드먼은 묵묵부답이었다.
“에드먼?”
“…됐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기라도 한 것인지 에드먼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엘리자벳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태도 좀 어떻게 해 봐요. 이래 봬도 우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잖아요.”
안 그래요?
엘리자벳은 에드먼의 대답을 구하며 덧붙였다.
“왜 오신 겁니까.”
“내가 공작에게 준 시간은 단 10분이었어요. 난 그냥 시간이 됐길래 간 것이었고.”
에드먼에게 권했던 잔을 내려놓은 엘리자벳은 자신의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사실 당신이 올 줄 몰랐어요. 날 그렇게 내쳤잖아요?”
“황녀님의 목적이 단순히 제가 그 결혼에서 벗어나는 것만이라는 게 아니라는 걸 압니다.”
에드먼의 차가운 눈이 엘리자벳에게 향했다.
“우린 그저 계약 관계에 불과합니다.”
엘리자벳은 어깨를 으쓱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부인… 그 여자의 배 속의 있는 씨는 어떻게 할 예정이에요?”
에드먼이 무슨 선택을 하든 다프네와 그 씨를 없앨 생각이지만 그가 너무 큰 관심을 보인다면 어려울 수도 있다.
혹시 모를 또 다른 대비를 질문에 에드먼은 좀처럼 답하지 않았다.
“…생각을 안 해 봐서.”
“뭐, 그건 아이가 태어난 후에 해도 상관없죠.”
여유 있게 답은 했지만 엘리자벳은 서둘러 계획을 세웠다.
태어나기 전에 죽일 방법은 없을까? 차라리 이곳을 빠져나가기 전에 바로 없앨까?
“그 여자는 어떻게 할 거예요?”
다프네를 칭하는 말을 ‘그 여자’로 정한 엘리자벳은 빈 잔에 과일주를 따르며 물었다.
그러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도 생각을 안 해 본 거예요?”
엘리자벳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그 여자를 빼낼 방법이 없어지니까 내게 온 거였군요.”
엘리자벳은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렸다.
“아, 벌써 해가 뜨려는 모양이에요.”
엘리자벳은 창밖을 보더니, 시녀 하나를 불러 황제에게 전갈을 넣었다.
“이제 슬슬 준비해요. 아버지께 우리의 사이를 말씀드려야 하잖아요?”
내내 생각에 잠겨 있던 에드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 궁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엘리자벳은 에드먼의 팔을 꼭 붙은 채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에드먼을 보는 엘리자벳의 눈웃음이 이전보다 더 화사했기에 주변 사람들은 둘을 흘끔거렸다.
“흐음, 그래.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황제는 옷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로 둘을 마주했다.
“공작? 그대가 왜 황녀와….”
“아버지, 그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붉어진 얼굴로 말문을 튼 엘리자벳이 에드먼을 한 번 본 후 고개를 돌렸다.
엘리자벳이 말을 막 꺼내려는 찰나, 시종장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 모습에 황제는 미간을 좁혔다.
“시종장, 황녀와 공작이 있는 자리에 이게 무슨 결례인가.”
“폐, 폐하. 그것이….”
순간 에드먼은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극에 달한 것을 느꼈다. 다프네와 떨어진 순간부터 발치를 맴돌며 그의 신경을 긁던 불안감은 덥석, 예고 없이 에드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집어삼켰다.
“윈터 공작 부인께서 하혈을 한 채 쓰러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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