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각하, 부디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십시오.”
요한은 다급히 에드먼의 앞을 막아섰다.
“폐하께서 알현을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각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다.”
“그래도 난 폐하를 뵈어야겠다.”
“각하!”
저도 모르게 소리친 요한은 주위를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행여 각하께서 잘못되시면 어떡합니까. 소공작님께서 깨어나신 후 얼마나 혼란스럽고 힘드시겠습니까, 예?”
“그럼 다프네를 포기하라는 것이냐.”
에둘러 좋게 포장한 말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다프네와 데미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요한은 그중 데미안을 선택하라 에드먼을 설득하고 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럼?”
“이런 상황일수록 이성적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성적으로?”
에드먼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추었다.
일단 그를 막았다는 생각에 요한은 안도하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마님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더 나은 선택지를 골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다프네보다 데미안을 선택하는 것이 더 옳다.
데미안은 장자 윈터가를 이를 후계자이고 그들에겐 마님보다 더 소중한 이니까. 그건 에드먼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요한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님이 윈터가의 씨를 품으신 게 신경 쓰이신다는 걸 이해합니다. 혹여나 마님이 유산이라도 하신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으로 황실을 공격하는 데 좋은 패로….”
“요한.”
요한은 퍼뜩 에드먼을 보았다.
평소처럼 무표정이다. 그러나 갈무리되지 않은 살기가 요한의 근처까지 넘실거렸다.
요한은 저절로 움츠러드는 어깨를 억지로 폈다.
“각하, 제 말이 무례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부디 잘 생각해 주십시오.”
“…그래.”
요한을 응시하던 에드먼은 살기를 거두는 것과 동시에 고개를 잘게 끄덕였다.
“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겠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던 요한의 얼굴에 안도가 스치던 그때, 에드먼이 말을 이었다.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만 하나 확실한 건 내가 지금 네게 실망했다는 것이지.”
“…각하.”
“그러니 당분간 널 보고 싶지 않다.”
에드먼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요한을 보았다.
“돌아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드먼은 뒤돌았다.
요한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에드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에드먼의 거침없는 발걸음의 목적지는 황제 궁이었다. 시종이 그를 보며 허리를 조아렸다.
“윈터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폐하께 알현을 요청해.”
“송구하지만 폐하께서는 지금….”
기다렸다는 듯이 거절의 말이 떨어지자 에드먼은 그대로 시종을 지나쳐 문을 벌컥 열었다.
“공작 각하!”
당황한 시종이 급하게 그의 뒤에 붙었다.
에드먼은 빠른 걸음으로 순식간에 황제의 침실로 가는 복도에 도착했다.
느슨해져 있던 기사들은 에드먼을 보고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헐레벌떡 뒤를 따라오는 시종을 보고 상황을 판단한 듯 검집에 손을 올렸다.
숨을 헉헉거리며 에드먼을 따라잡은 시종이 그의 앞을 막았다.
“공작 각하, 여기서 멈추십시오! 계속 이러신다면 기사들을 부르겠습니다!”
“그대들로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고작 황실 기사도 자신을 막을 수 없다는 오만한 말이지만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에드먼은 명실상부 대륙에서 손에 꼽는 실력을 지닌 기사다. 황실 기사단이 한꺼번에 덤벼도 에드먼을 이긴다고 보장할 수 없을 만큼.
“…큰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은 내가 해야 할 것 같은데. 나야말로 큰 소란을 만들 생각 없다.”
에드먼은 움찔거리는 기사들을 훑었다.
“나와.”
결단코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마주한 기사들은 본능적으로 수그러지는 허리에 힘을 빳빳하게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실의 기사가 꼬리를 내리고 문을 열 수도 없는 노릇.
대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에드먼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는 기사들을 응시하다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기사들이 화들짝 놀라 검을 빼 들며 긴장감이 고조되는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시종장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시종은 문을 연 사람을 확인하고는 안도한 듯 시종장을 불렀다.
“각하, 들어오시지요.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시종장의 말에 에드먼은 기사들을 지나쳐 시종장의 뒤를 따랐다. 기사들은 그제야 안도하며 긴장이 풀리자 비틀거렸다.
에드먼은 기나긴 복도를 거닐었다.
온갖 사치스러운 것으로 치장한 복도를 훑던 에드먼를 향해 시종장이 입을 열었다.
“폐하의 상태가 좋지 않으십니다.”
“주의하지.”
“피바람이 부는 일은 없겠지요.”
시종장은 걸음을 멈추고 에드먼을 돌아보았다.
“노력하지.”
“…알겠습니다.”
시종장은 그것으로 만족했는지 이내 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폐하. 윈터 공작을 들이겠습니다.”
시종장이 몸을 틀어 문을 열자 에드먼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뿌연 연기가 에드먼에게 훅, 끼쳤다.
“공작?”
“폐하.”
잠시 걸음을 멈춘 에드먼은 황제의 목소리에 걸음을 마저 옮겼다.
황제는 정체 모를 연기에 취한 듯 몽롱하게 젖은 눈으로 에드먼을 응시했다.
“공작이 왔군. 그래. 내게 할 말이 있다고?”
“제 부인이 갇힌 감옥의 경비가 강화된다 들었습니다.”
“아아, 그거 말인가. 그렇게 됐네.”
에드먼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텐데도 황제는 멍한 표정이었다.
황제는 지금까지 에드먼이 수십 번 요청한 면회를 모두 기각했다. 그 이유를 물어봤자 돌아올 대답이 빤했기에 에드먼은 다른 말을 꺼냈다.
“…폐하께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제안?”
초점을 잃었던 황제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돌아왔다.
그러나 이내 황제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히 에드먼을 무시하는 비웃음이었다.
“명색의 윈터 공작도 궁지에 몰리니 내게 제안을 다 하는군.”
중얼거린 황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정했네.”
뿌연 연기 너머로 황제의 옅은 금안이 번뜩였다.
지난 며칠 동안 황제는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윈터 공작 부인이 황녀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갇혔다는 소문은 빠르게 제국 내로 퍼졌다. 제국민들은 처음에는 의아해했으나 의문을 제기했다.
윈터 공작 부인께서 왜 황녀님을? 황실이 윈터 공작가를 해하기 위해 누명을 씌운 것 아니야?
온 제국민이 배고픔과 가난에 시달리는 전쟁 통에서 에드먼은 영웅 그 자체였다. 수도 근처의 성벽이 뚫리자 곧바로 야반도주를 감행한 황실보다 에드먼을 지지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럼 도망가지 말라는 것인가? 이곳에 남아 죽으라고?’
황제는 분노에 떨었다.
본래도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엔 에드먼이 여러모로 쓸모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화를 삭였다.
하지만 이제껏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곁에 애첩이 있다는 것이다.
애첩은 속살거렸다.
“더는 참지 마셔요. 윈터 공작에게 본때를 보여 주세요. 그를 처참하게 무너트리고 짓밟으세요. 그 시작은… 윈터 공작 부인으로 해요.”
에드먼을 응시하는 황제의 눈은 어느새 이글거리는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붉게 충혈된 탓인지 일순 그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가 순식간에 그 자취를 감추었다.
“더는 이 일에 관여할 시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것으로 알겠네.”
“폐하.”
동시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린다…. 린다를 불러와! 당장!”
애첩의 치마폭에 감싸여 있으면 이 고통이 씻은 듯 사라진다는 것을 학습한 황제가 미친 듯이 애첩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이내 그 잠깐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 뛰쳐나갔다. 애첩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잊지 않은 채.
에드먼은 황제의 뒤를 서둘러 뒤쫓는 시종장을 보다가, 텅 빈 침실을 나와 마차로 향했다. 요한은 사라졌고 에드먼은 마차에 오르기 전, 고개를 돌려 다프네가 있을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
저택에 도착한 에드먼은 곧바로 제 사람들을 소집했다.
요한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에드먼은 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황제에게 거래를 제시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런….”
“면회를 모두 거절한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황제가 이렇게 나올 줄은 미처 몰랐군요.”
“다른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 내일부터 심문이 시작하니 늦어도 일주일 안에 다프네를 그곳에서 빼내 와야 해.”
“빠듯합니다.”
뉴벨 남작은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각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을 꺼낸 이는 닉이었다. 닉은 그때와 다름없이 초췌한 모습이었다.
“황실에 심어 둔 제 수하 하나가 본 것입니다. 이게 정확하진 않지만… 오늘 이른 아침 의원 하나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를 발견한 곳은 마님의 감옥이 위치한 건물이고요.”
“…뭐?”
에드먼이 눈을 깜빡였다.
“그럼 마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갑자기 경비가 강화되어 그것까진 미처 알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으나 에드먼은 통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소득 없이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홀로 남게 된 에드먼은 멍하니 생각했다.
만약 최악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다프네는 아마 지금쯤….
에드먼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말에 올라타 있었다.
황궁에 들어선 에드먼은 곧바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작?”
궁의 주인은 늦은 밤 갑작스레 찾아온 에드먼을 보고 당황했다.
“그 제안.”
에드먼은 말했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엘리자벳은 이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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