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다프네는 뒤돌았다.
“깨어 있었네요, 부인.”
“…황녀님.”
갑작스러운 엘리자벳의 등장에 다프네는 긴장했다.
지나치게 차분한 엘리자벳의 표정이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다프네는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 봤거든요, 부인.”
가까이 다가온 엘리자벳은 마치 밤을 새운 사람처럼 피곤함에 젖어 있었다.
“너무 분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엘리자벳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아요. 난 제국에서 제일 고귀하고 아름다운데 왜….”
멍하니 중얼거리던 엘리자벳은 다프네의 앞이라는 것을 자각하고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꾸역꾸역 삼켰다.
이것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패배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다를 게 없어지기 때문이다.
엘리자벳은 거짓을 휘감은 채 화사하게 웃었다.
“공작이 내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부인.”
“…이혼에 합의했다는 말씀이신가요?”
다프네의 물음에 엘리자벳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의 시간도 없이 바로 합의하던데요?”
눈을 깜빡이던 다프네의 고개가 점점 수그러졌다.
“그렇… 군요. 다행이네요.”
“그래요. 다행이죠.”
얼마 지나지 않아 다프네는 고개를 들었다.
절망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 무표정이 마치 에드먼을 생각나게 했다. 이런 반응을 원한 것이 아니다.
엘리자벳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근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생겨서요, 부인.”
엘리자벳의 눈은 형형하게 빛났다.
그 시선을 본 다프네는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감지했다.
“정말 임신한 게 맞나? 싶더라고요.”
“…….”
“들어와.”
엘리자벳의 말에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황실 의원이었다.
다프네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황녀님, 이러지 마세요.”
“맥을 짚으면 임신한 건지 안 한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으니까. 아주 잠깐이면 아무도 모르겠지.”
엘리자벳은 중얼거렸다.
“그레이스, 잡아.”
엘리자벳의 건조한 명령에 그레이스가 다프네의 팔을 움켜잡았다. 다프네는 다급히 발버둥 쳤다.
“황녀님, 이러시면….”
짜악!
불꽃이 확 튀면서 따끔거리는 고통이 볼에서 느껴졌다.
“황녀님!”
놀란 그레이스가 엘리자벳을 부르자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 뺨 맞았다고 애가 떨어지겠어?”
엘리자벳은 이내 날카롭게 황실 의원을 쏘아보았다.
“뭐 해? 빨리 임신인지 아닌지 확인해.”
“부, 부인.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일에 제 가족의 목숨이 달려 있어서….”
의원은 가까이 다가왔다.
다프네는 다급히 도망갈 곳을 찾아보았지만 있을 리 없었다. 소리를 치고 도움을 요청해 봤자 쓸데없는 짓일 것이다.
그레이스의 속박에서 벗어난다고 한들 의원은 건장한 성인 남성이니, 힘으로 이기지도 못한다.
의원은 끝내 다프네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다프네는 눈을 찔끔 감았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러나 누군가 의원의 손을 붙잡으면서 다프네는 의원한테서 벗어날 수 있었다.
“블레드 후작?”
갑자기 계획이 어그러지자 엘리자벳은 얼굴을 찡그렸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그러는 황녀님은 왜 여기 계십니까.”
세르기는 자연스레 몸을 틀어 엘리자벳의 시야에서 다프네를 가렸다.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아버지가?”
“예. 황녀님의 궁으로 가신다고 하셨는데… 곧 도착하시겠군요.”
엘리자벳은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로 침을 삼켰다.
“그레이스! 당장 나와!”
그러고는 황급히 사라졌다.
“거기.”
세르기는 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는 의원을 향해 말했다. 의원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방금 아무 일도 없었던 거예요. 알겠죠?”
싱긋 미소를 지은 세르기의 말에 의원은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예, 예예. 당연한 말씀입니다.”
의원은 이내 허둥지둥 방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다프네는 우두커니 서서 숨을 헐떡였다.
“누이.”
“…오라버니가 왜 이런 누추하신 곳까지 오셨나요.”
세르기의 부름에 번뜩 정신을 차린 다프네는 그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는 뒤로 물러났다.
“많이 초췌해졌구나.”
세르기는 손을 뻗었다.
다프네는 가까워지는 손을 보며 고개를 돌려 눈을 질끈 감았다.
“방금 내가 널 도와줬다는 걸 잊었나 봐? 너무 긴장하지 마.”
세르기는 다프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그러곤 작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왜 오셨어요?”
다프네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물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돌아가셨으니 이제 우리 둘밖에 안 남았는데, 하나뿐인 오라비를 왜 이렇게 경계하니.”
다프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런 어머니를 죽인 건 세르기다. 공복임에도 속이 울렁거리고 토악질이 치밀어 올랐다.
“오늘부터 심문이 시작될 거야.”
세르기는 빙그르르, 가볍게 뒤돌았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구나.”
“네?”
“저런, 아무런 소식도 못 들었니? 새벽에 네 남편의 수하가 다녀갔을 텐데.”
“무슨 소식인지 저는 잘….”
“소공작이 깨어나질 않는다는구나.”
다프네는 세르기의 말을 하나하나 뜯듯 되짚었다.
데미안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프네는 흔들리는 눈으로 세르기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네게 거짓말을 해서 뭘 하겠어.”
세르기는 덧붙였다.
“하지만 이건 누이의 선택이잖아.”
혼란스러워하는 다프네를 향해 세르기는 하나하나 설명했다.
“누이가 공작을 선택해서 소공작이 이런 일을 당한 거야. 공작이라면 버텼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소공작은 아니라서. 게다가 그 이상한 목걸이를 몇 년 동안 꼭 붙들고 있었으니 기가 약해질 대로 약해졌을 테고… 영영 깨어나지 못할지도 몰라.”
‘내 선택….’
다프네는 에드먼을 선택했다.
두 선택지 앞에 놓인 다프네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깨닫지도 못했다.
“소공작은 누이가 그렇게 만든 거야.”
세르기는 허리를 숙였다.
“아, 아니지. 몇 시간 전에 온 윈터 공작의 수하가 누이를 데려갔더라면 소공작은 살았을지도.”
그리고 속삭였다.
“하지만 어쩌겠어. 공작이 선택한 사람은 누이가 아닌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르기가 방을 나갔음에도 다프네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한참이 흐른 후에야 다프네는 털썩 주저앉았다.
다프네는 무릎걸음으로 자리를 옮겨 문을 두들겼다. 소리치고 손이 긁히고 멍이 들도록 문을 두들겼다.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순간까지.
다프네는 손을 멈췄다. 입을 뻐끔거렸으나 그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프네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데미안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에드먼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절망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도록, 다프네는 조용히 울부짖었다.
***
“크흠,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제는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으나 윈터 공작 부인의….”
“시간이 어느새 이렇게 됐군. 다음 일정이 좀 급하게 잡혀서 말이야.”
오늘도 칼리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하려는 얘기는 내일 하도록 하지.”
“…예.”
황제파는 어제처럼 오늘도 할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에드먼은 그런 칼리토를 응시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칼리토는 황제파가 다프네에 대해 얘기를 꺼내려는 즉시 화제를 돌렸다. 결단코 우연이 아니었다.
“아, 윈터 공작.”
돌아선 칼리토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소공작은 좀 괜찮나?”
“…….”
갑자기 숨통을 옥죄어 오는 살기에 시끌벅적하던 회의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음? 왜 그러는가. 소공작이 다쳤다는 소문 때문에 걱정이 돼서 말이야. 신성력이 든 마력석이라도 하사할까 하는데.”
모두가 얼어붙은 그때 칼리토만이 유일하게 멀쩡한 모습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습니다. 그 정도로 심한 부상이 아닌지라.”
“그런가. 그럼 뭐, 알겠네.”
에드먼은 멀어지는 칼리토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에드먼이 칼리토의 물음에 저도 모르게 살기를 터트린 이유는 지난 새벽, 데미안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빨이 딱딱 부딪힐 정도로 몸을 떨었고, 엄청난 양의 식은땀을 흘렸다. 게다가 데미안의 몸 안에는 오러가 이리저리 뒤엉켜 폭발 직전처럼 부풀어 있었다.
곧바로 저택으로 가기 위해 마차로 향했다. 마차 앞에는 에드먼을 기다리는 누군가 서 있었다.
“각하.”
저택에 있어야 할 요한이었다.
에드먼은 순간 데미안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싶었다.
요한은 낮고 빠르게 속삭였다.
“소공작님의 상태는 그대로지만 더 악화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문제로 각하를 뵈러 온 것입니다.”
어차피 저택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찾아왔다는 건 쉬이 넘길 만한 문제라는 뜻이다.
“간밤에 마님이 갇혀 계신 감옥에서 한 수감자가 탈옥하려고 시도하여 경비가 더 강화되었고, 결계 마법까지 칠 계획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님에게 접근하는 게 불가능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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