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열심히 보고하니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아, 당분간은 내가 대리인으로 나올 것이니 참고하게.”
에드먼은 사라지는 칼리토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 황실 어딘가에 다프네가 있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공작.”
그때 누군가 에드먼에게 접근했다.
“나와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엘리자벳이었다.
“죄송하지만 바쁜 일정이 있어서.”
에드먼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오늘 공작 부인께 다녀왔어요.”
엘리자벳이 한 말이 아니었다면.
에드먼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엘리자벳은 그런 그의 행동에 속으로 조소를 참을 수 없었다. 속과 달리 엘리자벳은 화사하게 웃었다.
“제 방으로 같이 가요.”
엘리자벳은 에드먼의 팔에 팔짱을 꼈다. 많은 사람이 보게끔 최대한 느리게 걸었으나 에드먼의 걸음은 성급했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공작. 시간은 많잖아요?”
에드먼은 무표정한 얼굴로 엘리자벳을 내려보았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엘리자벳은 그를 자극하는 것을 멈추고 속도를 올렸다.
“편하게 앉아요.”
엘리자벳은 찻잎을 우린 차를 에드먼의 잔에 따랐다.
향긋한 차 내음이 순식간에 방 안으로 퍼졌다.
“향이 참 좋죠? 어렵게 수입해 온 차랍니다. 맛보세요.”
엘리자벳의 권유에도 에드먼은 찻잔을 그저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 오늘은 정원을 산책했는데 중간에….”
“공녀님.”
에드먼은 엘리자벳의 말을 끊었다.
“본론이 무엇입니까.”
“…본론이라.”
엘리자벳은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은 후, 잔을 내려놓았다.
“공작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요.”
“무슨 제안입니까.”
“아버지는 이번 건국제가 지나면 저를 동대국으로 시집보내실 거예요.”
동대국은 야만의 나라다.
그들은 아직 문명이 다 발달하지 않았지만 군사력 하나는 제국을 능가했기에 골칫덩어리였다.
그런 동대국이 한 가지 거래를 제시했다.
더 이상 제국을 노리지 않을 테니 동맹의 의미로 황녀를 달라고.
“나, 가기 싫어요.”
엘리자벳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웬만한 귀족은 아버지의 눈에 차지 않았으니 동대국 왕의 말이 솔깃하셨겠죠. 하지만 전 그런 야만인과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엘리자벳은 촉촉하게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공작, 나와 결혼해 줘요.”
“전 이미 결혼을 한 몸입니다.”
“이혼하면 되잖아요.”
자리에서 일어난 엘리자벳은 에드먼의 옆에 앉았다.
“굳이 이런 이유뿐만은 아니에요. 공작도 알잖아요. 내가… 공작을 많이 좋아하는 거.”
사랑을 고백하는 여인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붉게 상기된 볼과, 반짝이는 눈동자. 긴장감에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까지.
엘리자벳은 일부러 얇은 옷을 골랐고, 둘의 몸은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녀는 몸을 더 밀착시켰다.
“공작. 날… 안아 주면 안 될까요?”
“안아 줘요.”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와 겹치자 에드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공작?”
“제게 손대지 마십쇼.”
에드먼은 엘리자벳이 붙잡았던 옷깃을 툭툭, 털었다.
“하실 말씀이 끝났으면 이만 가겠습니다.”
에드먼은 문고리를 잡은 상태로 멈춘 후 고개만 돌렸다.
“전 이혼할 생각 없습니다.”
바득, 이를 간 엘리자벳은 소리쳤다.
“공작이 원하지 않으면 뭐 해요? 공작 부인은 원하는 것 같던데.”
또다.
다프네의 이야기에 마치 주술이라도 걸린 것처럼 에드먼이 멈췄다.
문고리를 잡은 손을 놓은 에드먼은 뒤를 돌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왜요? 증거라도 보여 줘요?”
엘리자벳은 다프네가 서명한 서류를 꺼내 들었다.
에드먼은 건네받은 서류를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보았다. 다프네의 글씨체가 맞았다.
다프네가 직접, 아무런 저항 없이 쓴 것이다.
“이제 믿어요? 난 부인이 그렇게 순순히 쓸 줄은 몰랐어요.”
엘리자벳은 그를 도발하듯 말했다.
하지만 에드먼은 엘리자벳을 완전히 잊고 서류에 온 신경을 빼앗긴 후였다.
“공작, 공작?”
엘리자벳은 순식간에 멀어지는 에드먼의 뒤에서 그를 불렀다.
그러나 에드먼은 이미 엘리자벳의 목소리가 닿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후였다.
“…하.”
엘리자벳은 결국 참지 못하고 조소를 내뱉었다.
에드먼이 한 입도 대지 않은 차는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
황녀 궁을 빠져나온 에드먼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알렉을 불렀다.
“유진에게 황궁 안으로 진입해 다프네를 살펴보라 명해라.”
“각하,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아무리 황실이어도 윈터가의 씨를 품은 마님을 어떻게 하진 못합니다.”
“아니.”
단호하게 말한 에드먼이 말을 이었다.
“이건 명령이다, 알렉.”
“…예, 알겠습니다.”
유진에게 말을 전하기 위해 알렉이 사라지고 에드먼은 걸음을 빨리 옮겼다.
급한 일정이 있다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에드먼은 회의가 끝났을 무렵 수하를 통해 전갈을 전해 받았다.
에드먼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데미안의 방이었다.
“오셨습니까, 각하.”
“상태는?”
에드먼은 바로 침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데미안이 누워 있었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로.
이틀이나 흘렀으나 데미안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뉴벨 남작 부인이 이틀 동안 진찰을 보았지만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고요히 잠을 자는 것 같던 데미안이 이따금 발작 증세와 비슷한 것을 보였다.
“지금은 괜찮으십니다.”
다행히 그 증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러 각성인 것 같습니다.”
“오러 각성?”
뉴벨 남작 부인의 말에 에드먼은 데미안을 돌아보았다.
몸에서 열이 나야 정상이지만 데미안은 멀쩡했다. 고통에 몸부림치지도, 열이 펄펄 끓지도 않았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몸 안에서 충돌이 생긴 것 같습니다.”
뉴벨 남작 부인은 이것 외에도 발작 증세에 관해 설명했다.
집무실로 돌아온 에드먼은 대마법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직접 써 내려갔다.
편지를 다 쓸 무렵,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올가입니다, 각하.”
“들어와.”
올가는 들고 온 것은 새롭게 채워진 궐련이었다.
“남작 부인 대신 가져왔습니다.”
“수고했어.”
“각하, 밤이 늦었습니다.”
에드먼은 그제야 해가 졌다는 것을 자각했다.
“인제 그만 쉬세요.”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올가는 이내 궐련을 내려놓고 뒤돌았다.
습관적으로 궐련을 향해 손을 뻗은 에드먼은 궐련 향이 평소보다 더 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올가.”
에드먼의 부름에 문을 연 올가가 뒤돌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하녀가 사라지던 날, 이상한 점은 없었나?”
“없었습니다. 있었다면 각하께 바로 말씀드렸지요.”
“…그렇군. 그만 가 봐.”
올가가 나가고, 에드먼은 궐련을 든 채 테라스로 나왔다.
궐련을 입에 물고 불을 꺼내자 인기척이 들렸다.
“말해.”
유진은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긴 채 보고했다.
“다치거나 피해를 입은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화륵,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에드먼은 가만히 있다가 궐련 끝에 불을 붙였다.
“그래.”
에드먼이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자 유진은 이내 조용히 물러갔다.
궐련 연기가 피어올랐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에 시야가 몽롱해졌다.
머릿속이 비워지자 아이러니하게도 팔의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에드먼은 품 안에서 마력석 두 개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이것을 손에 쥐고 힘을 조금만 주면 몸에 흡수되어 마기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에드먼은 손에 쥐기만 할 뿐 힘을 주지 않았다. 그저 그것을 멍하니 내려다보며 가만히 고통을 느낄 뿐이었다.
고통이 짙어질수록 새하얀 머릿속은 다프네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다프네.’
다프네, 다프네, 다프네.
에드먼은 고통을 핑계 삼아 다프네를 떠올렸다.
다프네로 시작한 생각은 이내 낮에 보았던 이혼 서류로 이어졌다.
에드먼은 궐련을 깊이 빨았다가 내뱉었다.
“난 부인이 그렇게 순순히 쓸 줄은 몰랐어요.”
황녀가 한 말을 떠올리던 에드먼은 저도 모르게 궐련을 거칠게 씹었다. 안에 있던 빻은 잎들이 짓뭉개져 튀어나왔다.
에드먼은 고개를 돌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테라스를 보았다. 다프네는 왜 테라스로 나와 있던 것일까.
그때 떨어진 재로 인해 생긴 손의 흉터는 이제 옅어진 후였다.
에드먼은 손에 쥔 궐련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희미해진 흉터 위로 새로운 상처를 만들어 냈다.
치이이이.
에드먼은 눈을 감았다.
고통은 짙어져만 갔다.
***
다프네는 문득 눈을 떴다.
기상할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눈이 저절로 떠졌기 때문이다.
다프네는 아직 깜깜한 밤하늘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왠지 에드먼에게서 늘 나던 궐련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순간 움찔한 다프네는 냄새를 다시 맡으려 했으나 새벽 공기만 느껴질 뿐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동이 틀 무렵, 별안간 문이 벌컥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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