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그렇게 마님이 스스로 가셨다고요?”
요한은 에드먼의 입으로 직접 전해 들었음에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래.”
“말리셨어야죠!”
요한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그곳에서 무슨 짓을 당할지 어떻게 압니까.”
“다프네가 아이를 가졌으니 육체적으로 피해를 주지는 못할 것이다.”
에드먼의 말에 요한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렸다.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것을 자각한 요한은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분명 마님의 짐에서 독을 빼냈다고 들었습니다.”
“…맞다.”
“하, 또 다른 독을 가지고 계셨을 줄은….”
요한은 당연히 다프네가 범인일 것이라 여기며 중얼거렸다.
에드먼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닉은 세뇌를 당한 상태였다. 그때 말한 것이 다프네가 황녀를 독살하려 한다는 것이었고.”
“그렇죠.”
“왜 그 말을 의심해 보지 않았을까.”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왜 당연하다는 듯이 수긍했지?
“그건….”
요한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자 화제를 돌렸다.
“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건 나중에 따지도록 하죠.”
“…그래. 그러지.”
그때였다.
“각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자리를 비웠던 뉴벨 남작은 전갈을 받고 다급히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께서 황녀 독살 혐의로 잡혀가시다니요. 분명 독을 회수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걸 알 방도가 없다.”
“허어.”
뉴벨 남작은 주름이 깊어지는 미간을 꾹 눌렀다.
“남작님, 일전에 부탁드린 건 구하셨습니까?”
“아, 여기 있습니다. 각하.”
뉴벨 남작이 내민 것은 신성력이 담긴 마력석이었다.
그가 다녀온 곳은 다름 아닌 제국의 모든 정보를 꿰뚫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보 길드였다. 다른 방계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으나 이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다.
소문은 어떻게든 새어 나갈 테니 아예 방향을 틀어 마력석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온 길드를 노린 것이었다.
뉴벨 남작에게서 마력석을 건네받은 에드먼은 바로 사용하는 대신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벤자민이 들어왔다.
“각하, 마님을 모시던 하녀가 사라진 것이 맞습니다. 올가의 말대로라면 어젯밤부터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라져?”
“예. 그리고… 하녀의 짐과 마님의 장신구 몇 개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하.”
뭐 하나 풀리지 않는 상황에 에드먼은 한숨을 내뱉었다.
팔에 상처가 욱신거리자 어지러움이 두 배가 되는 듯했다.
“아무래도 그 하녀가 황녀에게 매수당한 것 같군.”
“그렇다면 마님을 빼 올 방법이 매우 좁혀지는군요. 각하께서 황제와 알현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프네는 황녀를 암살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던 도중 에드먼이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하녀는 야반도주한 것 같고 모든 증거가 마님이 독살했다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다프네가 범인이 아니야. 그러니 이 얘기는 여기서 그만하도록.”
에드먼은 확신에 찬 듯 단호했다.
다른 이들이 말을 덧붙이지도 못할 만큼.
“요한, 너는 알렉과 함께 사라진 하녀를 추적해라.”
“알겠습니다.”
“남작, 그대는 황실에 연이 있는 자와 연락하도록.”
요한과 알렉이 나가고, 에드먼은 마른세수를 하는 것도 잠시 뉴벨 남작이 자리를 지키고 있자 고개를 돌렸다.
“각하, 정보 길드장과 접촉했습니다.”
정보 길드장은 소문이 무성한 자다.
성별도 알 수 없고 정체를 드러낸 적이 손에 꼽기 때문에 이런저런 소문이 많지만, 적어도 그것 중에서 진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고위 귀족 중 중 하나일 것이라는 소문이 그나마 가장 신빙성이 높았다.
어쨌든 절 둘러싼 소문에도 입 하나 뻥긋하거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길드장과 접촉했다는 얘기에 에드먼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건넸습니다.”
“…마력석?”
신성력이 담긴 마력석이었다.
전혀 탁하지 않은 흰색의 옅은 빛을 내뿜고 있는 마력석 안에는 순도 높은 신성력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지불한 돈을 돌려주었습니다. 마땅히 가야 할 이에게 가는 것이니 받지 않겠다면서 말입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마땅히 가야 할 이에게 가는 것이라….”
길드장이 남긴 의미심장한 말을 되짚는 에드먼의 미간이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보 길드장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이렇다 할 연이 없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에 이런 일까지 생기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알겠다. 이만 물러가.”
뉴벨 남작에게 축객령을 내린 에드먼은 책상에 놓인 마력석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먼이 향한 곳은 닉이 있는 지하였다.
“각하….”
며칠 동안 갇혀서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닉은 메마른 입술로 에드먼을 불렀다.
에드먼은 의자를 끌고 와 그의 앞에 자리했다.
닉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대가 한 짓을 기억하는가.”
“죄송합니다….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예상했던 답이 돌아오자 에드먼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마지막 기억이 무엇이냐.”
닉은 기억을 더듬다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머리를 움켜쥐었다.
“크흑, 윽!”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에 온몸이 경련했다.
이윽고 고통이 사라지자 닉은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기억하라고 할 때마다 이런 고통이 밀려옵니다. 시도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에드먼은 닉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아예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닉은 초췌한 얼굴이지만 눈만큼은 선명하게 빛났다.
“붉은 눈.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붉은 눈이 기억납니다.”
붉은 눈이라.
에드먼은 닉의 말을 머릿속에 새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한에게 말을 해 둘 테니 현재 상황을 전달받아. 그대가 할 일이 생겼다.”
***
“으음.”
안나는 두통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떴음에도 시야가 깜깜했기에 놀라는 것도 잠시, 자신이 안대를 쓰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전에 주술을 걸었던 주술사가 죽어 저택의 시녀장에게 다시 주술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저 하녀가 봤다고요?”
“예.”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하던 남자의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안나는 뒤늦게 남자와 대화하고 있는 이가 스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정신을 잃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랐다.
무언가 이상해 보이던 시녀장님과 그것을 말하자마자 변한 스웬의 태도.
“그래, 뭐. 원래 데려오려고 한 건 맞으니까.”
중얼거린 남자는 아, 하더니 중얼거렸다.
“일어났네요.”
“안나.”
안나는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손발이 결박된 탓에 버둥거리기만 할 뿐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안나, 진정해.”
스웬은 안대를 벗겼다. 순간 빛이 쏟아지자 안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너, 너 도대체 뭐야. 누구야?”
“왜 그래? 나 스웬이잖아.”
안나는 전처럼 상냥해 보이는 스웬의 얼굴을 보며 형용할 수 없는 섬뜩함에 사로잡혔다.
그는 분명 안나의 고향 친구, 스웬이 확실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행동 하나하나가 꺼림칙했다.
“안나.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넌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 다치진 않을 거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안나, 신을 믿어?”
갑작스러운 물음에 안나는 혼란스러웠다.
“곧 새로운 신이 나타날 거야. 우리는 그분을 먼저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중이고.”
스웬은 안나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면서 황홀해했다. 안나는 그런 스웬의 모습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감격에 젖은 스웬의 갈색 눈동자에 붉은 기가 돌았다.
“안나, 나는 네게 굳이 손대고 싶지 않아. 그러니 날 잘 따라와 줄 수 있지?”
대답을 재촉하는 그의 얼굴에 안나는 몸을 덜덜 떨었다.
“웬만해서는 주술을 쓰지 마세요. 다프네가 꽤 아끼는 아이 같으니.”
안나는 이 공간에 다른 이가 있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 정체가 자신이 모시는 마님의 오라비, 세르기라는 것을 본 안나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르기 님.”
스웬은 안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세르기는 이내 방을 빠져나왔다.
본래 계획은 사냥 대회 동안 다프네의 수발을 들었던 저 하녀에게 주술을 걸어 황녀에게 선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프네가 꽤 아끼던 하녀라는 것을 전해 들은 후, 다른 계획에 쓰일 용도가 되었기에 대충 비슷한 하녀를 황녀에게 보냈다.
‘멍청한 짓도 정도껏 해야지.’
세르기는 그런 황녀의 무지함에 혀를 찼다.
그렇다고 그가 멍청한 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멍청한 이만큼 이용하기 쉬운 사람이 어디 있다고 싫어하는가.
세르기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지났다.
빽빽하게 들어선 방에서는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렸지만 세르기는 마치 명곡을 감상하듯 눈을 감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르기는 한 방의 문을 열었다.
“대신관님.”
그 안에는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신복을 입은 이가 있었다.
황제 다음으로 높은 권력을 누리는 대신관이었다.
“아, 이제는 블레드 후작이라 불러야 하는가.”
“전처럼 편하게 부르십시오.”
싱긋 웃은 세르기는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열 명 남짓한 이들이 들어왔다. 그들의 성별, 나이대는 모두 달랐으나 공통점이 있었다.
멍하던 얼굴은 세르기를 발견하자마자 공포에 물들었다.
“이만 나가 봐요, 노아.”
이들을 모두 꿇린 노아가 나가자 세르기는 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이번 상품들입니다.”
“흠.”
대신관은 그들의 상태를 살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세르기는 상품의 상태를 살피는 대신관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허, 참. 그대의 눈은 못 속이겠군.”
대신관은 몸을 틀었다.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이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인사드리게.”
얼굴을 다 가릴 정도로 큰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이가 손을 들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로브를 내렸다.
세르기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성녀님일세.”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