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신은 공평하지 않다.
모든 능력을 갖춘 윈터가도 이것을 피해 가지 못했다.
한 세대마다 엄청난 기여를 하는 윈터가의 핏줄은 극히 귀했다. 보통은 한 세대에 한 명만 태어난 탓이다.
이것은 윈터가의 유일한 약점이라 불렸다.
윈터가의 사람들이 어린 나이부터 수많은 위험에 시달리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때문에 윈터가는 유일한 핏줄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던질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자신들이 데려가야 할 여인이, 그 윈터가의 핏줄을 품고 있다.
‘어쩌지?’
만약 데려갔다가 일이 잘못되어 유산이라도 된다면 황제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내칠 것이다.
아무리 황제의 명을 받았다지만 베벨록 공작은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에드먼을 밀어붙일 생각은 없었다.
에드먼의 도발적인 말에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베벨록 공작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 상황을 도저히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던 찰나, 수하가 다가와 무언가 속삭였다.
베벨록 공작의 얼굴이 조금은 환해지던 그때.
“무슨 일인가?”
“폐하!”
황제가 등장했다.
상황이 거의 마무리된 줄 알았는지 황제는 여유롭게 뒷짐을 지고 나타났다. 그러나 대치 중인 것을 보고는 멈칫하더니 베벨록 공작을 보았다.
마치 지금까지 상황을 정리 안 하고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따지는 듯했기에 베벨록 공작은 억울할 따름이었다.
“저, 폐하. 그것이….”
“다프네가 임신했습니다.”
“…무어라?”
황제는 멍하니 되묻는 것도 잠시 뒷짐을 풀었다.
“어, 그, 윈터가의 둘째라니. 이게 얼마 만인지… 그, 축하하네. 하지만 원칙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제 아내가 황녀님을 독살하려 한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
황제는 생각했다.
증거 따윈 없었다. 딸아이가 울면서 말하길래, 그저 옳다구나 싶어서 덥석 잡은 것이지 증거를 조작할 시간도 없었다.
‘저렇게 버틴 이유가….’
공작 부인이 임신했다면 에드먼의 행동이 모두 납득 가능해졌다.
황제는 기억을 더듬었다. 윈터가의 둘째가 생긴 것은 거의 백 년만이었다.
이런 변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황제 역시 베벨록 공작처럼 굳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증거라 하면….”
황제는 급하게 베벨록 공작의 팔을 툭툭, 쳐 보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하여튼 일절 도움도 안 되는 놈!’
“증거요?”
그때 들리는 목소리에 황제는 뒤를 돌았다.
“황녀?”
엘리자벳이었다.
‘이럴 줄 알았어.’
베벨록 공작이 황실 기사단과 함께 숲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음에도 영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엘리자벳은 결국 숲으로 향했는데 이런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임신이 확실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엘리자벳은 아픈 척 시녀에게 기대고 있던 몸으로 에드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에드먼의 품 안에 안긴 다프네를 보며 이를 갈다가, 위아래로 쭉 훑어보았다.
“임신이 맞냐고요. 거짓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려는 건지 어떻게 알아요? 확인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엘리자벳은 마지막 말과 함께 황제를 돌아보았다.
황제는 엘리자벳이 의도하는 바를 바로 알아듣고는 외쳤다.
“의원을 빨리 불러와라!”
“윈터가의 의원이 아니면 진찰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잊으셨습니까?”
“뭐? 그 무슨….”
황제의 말이 뚝 끊겼다.
그는 뒤늦게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에드먼의 아버지, 즉 선대 공작이 태어나기 전 본부인이 아이를 가진 적이 있다. 황제는 축하의 의미로 황실 의원을 주치의로 붙여 주었으나 그 의원은 뇌물을 받고 배 속의 아이를 유산시켰다.
어쩌면 영영 윈터가의 씨가 마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크게 분노한 윈터가를 진정시키기 위해 당대 황제는 약조를 하나 하였다.
윈터가의 씨를 품은 여인을 진찰할 수 있는 건 오직 공작이 정한 사람이어야 한다. 대마법사가 그 약조의 증인이었기에 현 황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상황을 파악한 엘리자벳은 다른 쪽을 노렸다.
“증거가 없다고 했죠? 증인은 있어요.”
엘리자벳은 제 시녀에게 명령했다.
“데려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는 하녀 하나를 데려왔다. 다프네는 그 하녀를 보고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안나…?’
***
‘아니야, 안나가 아니야.’
안나와 같은 머리 모양과 비슷한 체구로 인해 잠깐 착각했으나 가까이 다가온 하녀는 안나가 아니었다.
하지만 갈색 머리카락과 주근깨까지, 놀랍도록 안나를 닮은 하녀였다.
“이 아이를 아시는 눈치네요, 공작 부인.”
엘리자벳은 하녀가 등장하자 당황하던 다프네의 행동을 콕 집어 말했다.
“…다른 아이와 착각을 했을 뿐이에요.”
“그럴 리가요. 기억나지 않으세요? 사냥 대회 동안 부인의 수발을 들었던 하녀인데?”
다프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수발을 든 아이는 북부에서 데려온 하녀입니다.”
“어머, 부인. 제대로 봐 보세요.”
엘리자벳은 하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상황이 불리해지니 자신의 수발을 든 하녀까지 내치시려는 건가요? 저도 정말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엘리자벳이 눈짓하자 누군가 나타났다.
황실 시종이었다.
“이 하녀의 고향 친구가 마침 황실 시종이었더군요. 그래서 이 시종이 둘이 사냥 대회 둘째 날 함께 있는 모습을 봤다고 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황실 시종은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저 하녀가 맞습니다! 제가 분명 봤, 봤습니다!”
다프네는 할 말을 잃었다.
이 하녀가 안나와 몹시 닮은 것은 사실이었다. 자칫 스쳐가듯 본다면 안나로 착각할 정도로.
엘리자벳은 하녀를 향해 말했다.
“자, 이제 네가 사실대로 말해 주지 않겠니?”
엘리자벳이 하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하녀는 어깨를 흠칫하는 것도 잠시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입술을 열었다.
“어, 그게요…. 마지막 날 사냥 대회가 막 시작했을 무렵이에요. 막사에 있었는데 황녀님이 먼저 찾아오셨어요. 윈터 공작님과 파트너가 된 것에 대해 사과하시겠다면서요.”
“그리고 티타임에 참석하셨는데… 부인께서 가져온 찻잔을 갑자기 바꾸셨어요. 찻잎이 잘 우려지지 않은 것 같다는 이유로요. 분명 두 분 다 같은 차를 드셨지만, 황녀님은 차의 첫맛이 이상하다고 하셨어요.”
다프네는 좀처럼 하녀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신경은 온통 사라진 안나에게 향했다. 정말 저택에 안나가 없다면 안나는 지금 어디 있는 걸까.
“갑자기 부인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셨고… 궁으로 돌아가신 황녀님이 피를 토하고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가 부인의 짐에서 발견한 겁니다. 혹, 혹시 몰라 챙긴 것입니다.”
에드먼은 하녀가 꺼낸 것을 보며 손을 움찔했다.
다름 아닌 에드먼이 다프네의 짐에서 꺼내 처리했던 독과 똑같은 것이었다.
“공작, 증거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아무 말 못 하던 황제는 히죽거렸다.
비록 윈터가의 아이를 품은 다프네를 어떻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공작 부인, 이리 오시지요.”
조용히 있던 베벨록 공작이 나섰다.
“다프네, 갈 필요 없습니다.”
“공작, 그게 무슨 망발인가. 황녀님이 하신 말씀을 못 들었을 리는 없고.”
“저 하녀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폐하.”
“그 말은 즉 황녀의 자작극이라는 말인가? 미쳤다고 독을 스스로 먹어?”
황녀의 움찔거리는 얼굴을 발견하지 못한 황제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지금 공작의 말이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키는지 정녕 모르는 것인가!”
황실 기사단은 칼을 빼 들었고 검은 기사단은 검집에 손을 올렸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다프네는 이런 상황에서조차 가만히 있는 에드먼을 보았다가, 데미안이 있는 막사를 보았다.
‘이대로는… 안 돼.’
심호흡한 다프네는 에드먼의 품에서 벗어났다.
“가겠습니다.”
“다프네.”
“걱정 마요. 아이는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테니까.”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 올리며 에드먼을 향해 말했다.
순간 에드먼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다프네는 그 얼굴을 자세히 눈에 담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뒤늦게 움직인 에드먼의 손끝에 다프네의 손이 살짝 스쳤다.
“좋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 부인.”
베벨록 공작이 이끄는 대로 걷던 다프네는 뒤 한 번 돌지 않았다. 다프네는, 그렇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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