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스웬?”
황실에서 일하고 있는 고향 친구, 스웬이었다.
안나는 저도 모르게 안심하며 스웬에게 가까이 붙었다.
“무슨 일로 날 찾아왔어?”
“그냥, 할 얘기가 있어서. 여기 응접실을 쓸 수 있을까?”
스웬은 안나에게 말하고 있었으나 시선은 올가에게 향하고 있었다.
“하녀 주제에 무슨 응접실이야. 그냥 정원에서….”
“아니야, 안나. 손님인데 응접실로 모셔야지.”
“네?”
올가가 직접적으로 말한 적 없으나 안나는 그녀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산뜻한 허락에 안나는 당혹스러웠다.
“내가 다과라도 가져올 테니 손님하고 응접실로 가 있어.”
안나는 거의 떠밀리다시피 스웬과 응접실로 들어왔다.
“안나,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안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문을 흘끔거리자 스웬이 물었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고개를 내젓는 것도 잠시, 안나는 씻을 수 없는 찜찜함에 결국 입을 열었다.
“스웬. 혹시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을까? 시녀장님이 어디 안 좋으신 것 같아서 내가 가 봐야 할 것 같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셔?”
안나는 망설였다.
“그게 내가 잘못 본 걸 수도 있지만… 시녀장님….”
“너.”
스웬은 안나의 말을 뚝 잘랐다.
불안감에 문을 흘끔거리던 안나가 스웬에게 고개를 돌렸다. 스웬은 마치 올가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스, 스웬.”
“다 봤구나?”
스웬의 눈이 붉게 반짝였다.
순간 안나는 옆으로 스르륵 쓰러졌다.
“뭐, 들켰지만 널 데려가야 했으니까. 잘된 일이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스웬은 허리를 숙여 안나를 내려다보았다.
“푹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거야.”
안나는 스웬의 말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
검은 기사단이 찾은 길로 올라오자, 작은 인기척이 허둥지둥 멀어졌다.
‘종자?’
그 기척을 놓치지 않은 에드먼은 멀어져 가는 자의 옷차림으로 황실 종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누가 심었는지 모를 첩자는 당장은 중요하지 않았다.
“뉴벨 남작 부인께서 오는 중이라고 하십니다.”
알렉은 데미안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열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막사에서 응급 처치하고 갈까요?”
긴장의 끈을 한시라도 놓을 수 없는 곳에서 하느냐,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안전한 저택으로 가느냐.
에드먼은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쌕쌕 내쉬는 데미안을 보며 결단을 내렸다.
“발이 빠른 자를 보내 남작 부인을 데려와.”
“알겠습니다. 각하, 마님을 넘겨주십쇼.”
에드먼은 품 안에 꼭 끌어안은 다프네를 내려다보았다.
동굴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다프네는 긴장이 풀린 듯 곧바로 잠이 들었다.
“됐다. 넌 다른 할 일을 해.”
“…예.”
알렉은 에드먼을 흘끔, 보았다.
에드먼은 미처 자각하지 못했을지 몰라도 옆에 있었던 알렉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님이 깨지 않게 한 발짝 한 발짝을 아주 조심스럽게 걷는 각하를.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 생각이 없었던 알렉은 곧바로 유진을 보내 뉴벨 남작 부인을 데려오도록 지시했다.
머지않아 뉴벨 남작 부인은 유진의 등에 업혀 나타났다.
뉴벨 남작 부인은 데미안이 있는 막사에 들어간 후,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야 핼쑥해진 얼굴로 나타났다.
자신의 막사 침대에 다프네를 내려놓고 한참을 바라보다 밖으로 나온 에드먼이 그녀를 맞닥뜨렸다.
“상태는?”
“괜찮습니다. 단순히 열이 오른 것이라 체온을 낮추었습니다. 깨어나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군.”
다행히 큰일은 아니었다.
“마님은 어디 계십니까? 폭주하는 소공작님과 접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뉴벨 남작 부인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 막사에 있다. 같이 들어가지.”
뉴벨 남작 부인은 쉴 틈도 없이 다프네에게로 향했다.
진찰을 끝낸 뉴벨 남작 부인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후, 마님도 멀쩡하십니다. 생채기가 있긴 하지만 오염도 되지 않았고, 피로가 쌓여 혼절하신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르니 전 소공작님의 곁에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데미안의 열이 어느 정도 떨어지면 그때 출발할 것이니 참고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뉴벨 남작 부인이 나가고, 에드먼은 잠든 다프네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뉴벨 남작 부인이 젖은 옷을 갈아입히고 막사 안이 따스한 탓인지 다프네는 아까보다 좀 더 편안한 안색이었다.
그런데 다프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에드먼은 손을 움찔거리며 다프네에게로 느리게 뻗었다. 일그러진 미간에 닿기 전, 수십의 인기척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에드먼은 막사를 박차고 나왔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베벨록 공작이었다.
수십의 황실 기사단을 이끈 베벨록 공작이.
“부인과 소공작을 무사히 구출했다는 소식 들었네.”
베벨록 공작은 앞으로 한 발짝 나왔다.
“이런 말을 할 상황은 아니지만 내게도 중요한 일이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지.
에드먼의 미간이 좁혀질 무렵이었다. 베벨록 공작이 뒤를 돌아 기사단을 향해 외쳤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그대들에게 지시한다! 윈터 공작 부인이 황녀에게 독살 시도를 한 범인이다. 당장 끌어내라!”
***
다프네는 눈을 떴다.
낯선 천막 안이라는 것을 알아챈 다프네는 주춤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옷은 뽀송뽀송하게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도 잠시, 이 막사에서 익숙한 체향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는….’
에드먼의 막사였다.
다프네는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이내 자신이 소란스러움에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조심스레 막사의 문을 연 다프네는 제 앞에 펼쳐진 광경에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수십의 황실 기사단과 검은 기사단이 서로를 경계하며 대치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 마침 공작 부인께서 나오시는군요.”
황실 기사단의 선두에 서 있는 베벨록 공작은 다프네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다프네에게 쏠렸다.
“다프네, 들어가 계십시오.”
다프네에게 다가온 에드먼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문득 불안감에 휩싸였던 다프네는 그의 얼굴을 보며 안도했다.
“…무슨 일이에요?”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저….”
“공작 부인, 발뺌하셔도 소용없습니다.”
베벨록 공작은 히죽거리며 끼어들었다.
다프네는 미간을 좁혔다.
“도대체 그게 무슨….”
“부인께서 황녀님을 독살하려던 것이 다 탄로 났단 말입니다.”
“제가 어찌 각하께 거짓을 할 수 있습니까? 게다가 마님께서는 황녀를 독살하시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프네는 문득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던 닉의 말에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던 에드먼과 알렉.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대로 넘겼었다.
다시 이 문제를 직면할 줄 꿈에도 몰랐다.
“…전 황녀님을 독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베벨록 공작.”
다프네는 마른 손으로 옷가지를 꽉 쥔 채 한 단어 한 단어에 최대한 힘을 실었다.
“다프네.”
에드먼은 굳은 얼굴로 다프네의 앞을 막아섰다.
다프네의 시야가 순식간에 그로 가득 찼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 계십시오.”
“에드먼, 하지만 이건… 저와 관련된 일이잖아요.”
“당신이 있으면 상황만 악화될 것이라는 걸 모릅니까?”
다프네가 고집을 피우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진 에드먼은 말을 채 고르지도 못하고 입을 먼저 열었다.
“그냥 제발… 안에서 가만히 있으세요.”
다프네는 미미하게 찡그려진 에드먼의 미간을 보다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다프네가 막사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베벨록 공작이 가까이 다가왔다.
“공작 부인, 지금 어딜 가는….”
하지만 베벨록 공작이 다프네에게 닿기도 전, 에드먼의 검집에 막혔다.
황실 기사단과 검은 기사단 사이의 긴장감이 순식간에 고조되었다.
“…하, 이렇게 무력을 행사하시겠다?”
뭔갈 해 보기도 전에 에드먼에게 막히자 자존심이 상한 베벨록 공작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누가 먼저 달려들었는지 잊은 모양이군.”
베벨록 공작은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에드먼이 꼴도 보기 싫었다.
분명 공작 부인을 사랑할 리 없으니 순순히 내놓을 줄 알았다. 그 잘난 얼굴에 코웃음이라도 칠 생각이었다.
그래서 자처하여 이런 일까지 한 것이었다.
‘망할 놈.’
새파랗게 어린 것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다니는 게 보기 싫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드먼은 베벨록 공작이 죽을 때까지 경계하며 증오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나는 황제 폐하의 명을 수행하는 것인데, 만약 이를 거부한다면 폐하께서 어떤 뜻으로 받아들이실지 궁금하지 않나?”
에드먼을 공격하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정작 당사는 멀쩡했고, 그 뒤에 있는 공작 부인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다프네는 에드먼의 소매를 붙잡았다.
“…제가 갈게요.”
“다프네.”
“죄가 없으니 금방 누명이 벗겨질 거에요.”
결심을 내린 듯한 다프네의 모습에 에드먼은 혼란스러웠다.
분명 다프네는 황녀를 독살하려고 했다. 물론 그 전에 아무도 모르게 독을 회수했지만, 황녀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공작 부인, 순순히 오시길 바랍니다. 저는 괜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은지라.”
신경을 살살 긁는 베벨록 공작의 말 따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에드먼은 조금 긴장한 모습에 다프네가 자신을 지나쳐 한 발짝 나가는 것을 그저 멍하니 눈에 담았다.
또 다른 독을 숨겨 놨을 가능성은? 당일 다른 독을 구했을 가능성은? 정말, 정말 다프네가 황녀를 독살하려 한 것이라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에드먼?”
갑자기 손목이 잡히자 다프네의 몸이 휙 틀어졌다.
다프네의 의아한 음성이 들렸다.
“…안 된다.”
“하, 윈터 공작. 공작이 이렇게 막아 봤자….”
에드먼은 다프네의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프네의 작은 몸이 딸려 와 에드먼의 품에 안겼다.
그는 당황한 다프네의 어깨를 쥐었다.
“부인이 현재 임신했다.”
“에드먼…!”
다프네는 놀라 비명을 내지르듯 그의 이름을 불렀고, 베벨록 공작 역시 적잖게 놀란 얼굴이었다.
“무려 윈터가의 핏줄을 품었는데….”
에드먼은 다프네를 흘끔, 본 후 베벨록 공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데려가는 게 가당키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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