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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마님이 사라졌다-56화 (56/145)

56화

“다행히 폭주 증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뒤늦게 에드먼을 따라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던 알렉은 데미안의 상태를 살폈다.

열이 비이상적으로 높긴 했지만, 폭주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고비를 넘긴 알렉은 눈앞의 상황을 주시했다.

에드먼의 재킷을 걸친 다프네는 멍하니 데미안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멀쩡한 거지?’

절벽에서 떨어질 당시 데미안은 폭주 상태였다. 그의 몸 주위로 오러가 피어올랐을 것이다.

잠시 후 다프네는 데미안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흘끔 본 다프네의 양손은 작은 생채기만 나 있을 뿐 멀쩡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렉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억누르고 데미안을 마저 살폈다.

머지않아 검은 기사단이 동굴까지 찾아왔다. 알렉처럼 곳곳에 표시된 옷가지로 길을 찾았다.

“올라갈 길을 찾았습니다.”

기사의 말에 알렉은 데미안을 들쳐 들었다.

멍하니 있던 다프네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에드먼은 미간을 좁히며 크리스에게 물었다.

“여분의 신발이 있느냐.”

“없습니다.”

에드먼은 다프네에게 다가갔다. 다프네은 재킷이 흘러내리는 것도 모른 채 모든 신경을 데미안에게 집중한 상태였다.

에드먼은 얇은 드레스가 비에 젖어 반투명이 된 것을 보며 눈살을 일그러트리곤 제 재킷을 걸쳐 주며 턱 아래까지 깃을 끌어 올린 후 단추를 잠갔다.

그제야 다프네가 에드먼을 돌아보았다.

에드먼은 이내 다프네를 가뿐히 들어 올렸다. 예고 없이 일어난 일이었기에 다프네는 비명을 지르며 에드먼의 목에 팔을 둘렀다.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예요?”

“신발도 없이 가기엔 길이 험할 겁니다.”

“아….”

다프네는 그제야 자신이 맨발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아까 정신없이 뛰어갈 때 벗겨진 모양이다.

다친 것을 인지하자 울퉁불퉁한 돌에 찢긴 상처에서 뒤늦게 고통이 밀려왔다. 발이 따끔거리면서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다프네는 단단한 에드먼의 품에서 경직돼 있던 것도 잠시, 그의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슬쩍 풀었다.

최대한 신체 접촉을 최소화하려고 했으나 걸을 때마다 몸이 들썩거리면서 에드먼의 가슴에 뺨이 닿았다.

다프네의 몸의 체온이 떨어진 탓에 에드먼의 품은 따스하게만 느껴졌다. 마음이 안정을 되찾자 긴장이 풀린 몸은 빠른 속도로 무거워져 갔다.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잠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따스한 체온과 안정감에 휩싸인 나머지 눈꺼풀은 이내 닫혔다.

***

“…뭐?”

엘리자벳은 몰래 심어 놓은 종자의 말에 되물었다.

“그것이, 윈터 공작님이 공작 부인과 소공작님을 찾으셨다고… 아악!”

종자는 갑작스러운 고통에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눈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에 몸을 덜덜 떨었다.

“…무슨 일입니까?”

“마침 잘 왔어요, 블레드 후작!”

화를 다 식히지 못한 엘리자벳은 들어오자마자 피를 흘리는 종자를 발견해 멈춰 있는 세르기를 향해 따졌다.

“공작 부인과 소공작이 살아 있다니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살아 있다고요?”

세르기는 미간을 좁힐 뿐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세르기가 손짓하자 노아는 종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고, 그는 느긋하게 차를 들이켰다.

“블레드 후작.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요!”

엘리자벳은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분명 죽을 거라고 했잖아요. 아버지와 이미 말까지 맞춰서 윈터 공작 부인이 될 준비를 모두 끝내 놓았는데… 계획이 모두 어그러졌어요!”

“진정하세요.”

세르기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느릿하게 대꾸했다.

엘리자벳은 화에 눈이 멀어 그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매서운 눈매로 쏘아붙였다.

“진정? 진정하라고요? 두 사람 다 사지 멀쩡하게 돌아오는데 진정이 가당키나 할까요?”

“…사지 멀쩡하게 말입니까?”

“그래요!”

“확실합니까?”

“제가 거짓말해서 뭐 하겠어요?”

엘리자벳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멀쩡하다고….’

세르기는 엘리자벳의 말을 되새겼다.

두 사람 모두 사지 멀쩡하다. 정말 혹시나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어도멀쩡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이런 경우가 있나?’

‘기억의 기록’에서 오러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엘리자벳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독 먹은 게 허투루 돌아가질 않나 죽었어야 할 이들이 멀쩡히 살아 돌아오지를 않나….”

“…황녀님, 다른 방도가 있습니다.”

“방도요?”

엘리자벳의 얼굴은 심드렁했다.

모든 게 수포가 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듯했다.

“예.”

“말해 봐요.”

“황녀님이 독살당할 뻔하지 않으셨잖습니까.”

“뭐, 대외적으론 그렇죠.”

“그 범인을 원래 누구로 하려고 했죠?”

“…윈터 공작 부인이요.”

“그리고 아직 사건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황녀님께서 증언하시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독을 먹은 후 며칠 동안 아픈 척하다가 증언을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윈터 공작 부인과 소공작을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탓에 증언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가야겠어요.”

엘리자벳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선물을 하나 준비하겠습니다.”

엘리자벳은 이제 그가 말하는 선물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았다.

“같이 가겠어요, 블레드 후작?”

“여동생을 사지로 밀어 넣는 취미는 없어서.”

계획에 다프네가 휘말렸다는 말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으면서.

엘리자벳은 뒷말을 삼키며 싱긋 웃었다.

“그럼 나중에 봐요, 블레드 후작.”

몸을 돌린 엘리자벳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돌아왔다.

“블레드 후작, 궁금한 게 있는데.”

“말하세요.”

“그대는 이 계획의 목표가 무엇이지?”

문득 든 의문이었다.

자신이야 에드먼을 손에 넣고 윈터 공작가를 차지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세르기는 자신과 목표가 비슷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으나 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글쎄요.”

엘리자벳의 질문이 예상 밖이었다는 듯이, 세르기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지금 가지 않으면 회의가 시작될 거라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네요.”

“아, 그러면 안 되죠! 다음에 봐요, 후작!”

엘리자벳은 황급히 방을 나왔다.

궁을 벗어나기 전, 막 힘겹게 침상에서 일어난 것처럼 화장을 덧칠하고 옷을 간소하게 입고 장신구를 모두 떼어 냈다.

엘리자벳은 간신히 회의 전 황제와 알현할 수 있었다. 회의 직전인지라 황제의 옆에는 베벨록 공작이 함께였다.

“황녀, 머리카락이 다 상했구나.”

황제는 엘리자벳을 아끼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황금색 머리카락이 옅어진 것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그 말에 엘리자벳은 어색하게 웃는 것도 잠시 입을 틀어막았다.

“콜록, 콜록!”

“몸이 다 나은 것 같지도 않은데 짐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저, 아버지 그것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일부러 거칠게 기침한 탓에 아름다운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를… 독살하려 한 범인에 대한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가린 입꼬리가 짙은 미소를 만들어 냈다.

***

ㅎㅂㄹㄱ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이 방을 청소하던 안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검은 기사단마저 며칠 전에 쭉 빠진 탓에 저택은 매우 고요했다. 마치 북부에서 마님이 사라지셨을 때와 비슷한 적막감에 안나는 괜한 불안감을 떨치고자 깨끗한 다프네의 방을 청소하고 또 청소했다.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방을 보던 안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마님은 언제 오시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아무런 정보가 없는 안나조차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마님께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최악의 생각까지 미치자 안나는 다급히 고개를 내저으며 청소 도구를 꽉 쥐었다.

“아니야. 분명 괜찮을 거야. 그래야 해….”

안나는 한숨을 내쉰 후 다프네의 방을 나왔다.

안 그래도 적적한 저택인데 벤자민마저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기에 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복도를 걷던 안나는 창문 너머 저택 입구에 정차된 마차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올가를 찾아갔다.

“올가 님, 밖에 마차가 있는데 누구의…. 올가 님?”

올가의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안나는 올가의 발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을 보며 숨을 헉, 들이켰다.

“…안나니?”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를 한 올가가 뒤를 돌았다.

표정은 인형처럼 경직되어 있었고, 눈의 깜빡임도 양쪽이 달랐다. 게다가… 눈이 붉었다.

“표정이 왜 그래? 뭐라도 봤어?”

여기서 사실대로 대답한다면 큰일을 당할 것이라는 본능적인 직감에 안나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아, 아니요. 그냥 올 손님이 있다고 듣지 못했는데 마차가 있어서요.”

“내가 말을 한다는 걸 까먹었구나. 손님이 있어.”

올가는 말과 함께 몸을 비틀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왜소한 체구에 하관을 덮을 정도로 큰 로브를 걸친 상태였다.

“아, 그렇군요….”

어색하게 미소 지은 안나는 주춤거렸다.

“그리고 널 만나러 온 사람이 있단다.”

“저를요?”

“안나.”

어깨를 붙잡는 손과 함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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